이듬 해 정유년(丁酉年, 1897년)에 몰래 평안도와 함경도를 가서 특별히 포교에 박차를 가하니, 교도들이 7만여 명까지 증가하였다. 이 해에 전주(全州) 이찬요(李贊堯)의 딸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였다. 음력 섣달그믐에 모부인(母夫人)을 충주의 두의촌(豆衣村)으로 가서 뵈었다.
무술년(戊戌年, 1898년) 정월 2일, 모부인의 생신을 맞아 음식을 약간 준비해놓고 여러 해 동안 슬하를 떠나있었던 사정에 대해 잠시 위로하였다. 그날 이른 새벽에 갑자기 관군에게 체포되어 이천군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동시에 붙잡힌 자는 김낙철(金洛喆)・신택우(申澤雨) 등 몇 사람이었는데, 여러 차례 고문을 겪었고, 대신사의 거주지를 자세히 캐물어 왼쪽 다리의 뼈가 부러지기까지 하였으나 이용구 공은 죽음을 맹세하고 복종하지 않았다. 글로써 스스로 공술하기를, “동철(銅鐵)이 비록 좋아도 단련하지 않으면 이로운 그릇을 만들지 못하고 송백(松柏)이 아무리 굳세어도 눈과 서리가 아니면 높은 절개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가서 이천에서 경성의 감옥으로 압송되었고, 또 수원의 재판소로 넘겨졌는데, 옥중에서 4개월을 지내는 동안 더욱 수련을 가하니, 부러진 다리는 점차로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효과가 있고 신색(神色)은 여느 때와 같았다. 여름 4월에 비로소 석방되었다.
이 달 5일에 대신사가 다시 원주(原州)의 송동(松洞)에서 붙잡혀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이용구 공은 대신사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려고 곧이어 경성으로 달려갔다. 이때에 비밀리 찾아온 교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대신사가 비서(秘書)로써 군중을 깨우치기를, “나의 오늘날 일은 하늘이 한 것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 근신하여 망동하지 말고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용구 공이 이로써 교도들을 면대하여 깨우치니, 점차 해산하였다.
6월 2일(양력 7월 21일), 마침내 대신사가 재난을 만났으니,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때에 김연국은 강원도로 자취를 감추었고, 송암 손천민과 의암 손병희는 충청도에 숨어 살고 있었다. 이용구 공이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각 도를 순회하면서 직접 도화(度化) 시킨 신도가 20여만 명이나 되었는데, 황해도・평안도・함경도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기해년(己亥年, 1899년) 10월에 풍기(豊基)의 현촌(縣村)으로 거처를 옮기니, 각지의 교도들이 몰래 서로 왕래하는 것이 많아서, 겨우 10개월이 지나서 자취가 다시 탄로났다.
경자년(庚子年) 8월에 손천민이 청주군에서 붙잡혀서 경사(京師)로 압송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예천군수 이소영(李韶榮)이 관군을 많이 풀어 풍기로 갑자기 들어와 수색 체포하는 일을 끝까지 행하니, 와서 머물고 있던 교도 중에 박영구(朴永九)・홍기조(洪基兆)・이동성(李東成) 등과 같은 이가 모두 붙잡혔고, 이용구 공은 겨우 모면하여 모부인을 모시고 제천군(堤川郡) 내동(內洞)으로 피해가서 살았는데, 소유한 가산은 모두 관에 몰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