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 이용구 공은 송병준(宋秉畯
송병준이 면회를 요청한 이유를 묻자, 이용구 공은 몸을 굽혀 경의를 표하고 대답하기를, “나는 갑오년 동학(東學)의 괴수입니다. 무릇 만물은 불평이 있으면 울어대고, 사람은 지극한 원통함이 있으면 호소하는 것이 바로 공통적인 인정이요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 두 분 선사(先師)께서는 하늘에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아 무위화계(無爲化界)에서 창생(蒼生)을 구제하려고 하셨는데, 무도(無道)하게 사형을 잘못 당해 누명(累名)이 아직도 죄적(罪籍)에 적혀있으니,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큰 원통함입니다. 현재 백만 교도는 일본과 한국 두 나라가 질시하는 틈에 끼어 생명이 있으나 보전할 수 없고 처자가 있지만 보호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큰 원통함입니다. 국정이 날마다 그릇되어가고 세신(世臣)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므로 전국의 생령(生靈)이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졌으나 구제할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세 번째 큰 원통함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동아세아의 온대지방에 치우쳐 있어 외환(外患)이 싹트면 시국의 평화를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시기에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취하여 지구의 문명 지역과 나란히 달리는 것이 실로 나의 큰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송병준은 오랜 동안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동학은 바로 나라의 금한 바요, 또한 갑오년의 난동은 일본을 배척한 진상이 이미 드러났는데, 지금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는 중인데, 또 망동을 하여 생명을 상해할 계책을 짜내고 있으니 누가 허락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용구 공이 정색을 하고서, “우리 교의 목적이 어찌 일본을 배척할 리가 있겠소? 지난 계사년(1893년)과 갑오년(1894년)의 일은 실로 조정의 잔인하고 포학한 정치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선사(先師)의 원통함을 풀어드리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도의 환란을 면해주기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해독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관(官)과 민(民)이 상호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조정에서 먼저 청(淸)나라에 원병을 청하자, 청나라는 고의로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어기고 한국에 출병함으로써 일청교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또 일본에 원병을 청하여 동학을 초토하였으니, 우리들이 일으킨 갑오년의 일은 동학이 일본을 배척한 것이 아니고 실은 일본 군대가 동학을 배격한 것이며, 또 일본 군대가 동학을 배격한 것이 아니고 곧 조정이 동학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처럼 위급하여 존망을 판단하기 어려운 시기에 교도 백만 대중은 대국의 형세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족하(足下)와 더불어 큰일을 함께 이루기를 원하니, 오직 족하께서는 우리 백만 대중의 생명을 위하여 특별히 힘써 주선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송병준은 개연히 일어서면서, “마땅히 깊이 생각해서 도모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따라서 며칠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자, 이용구 공이 마침내 응낙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기일이 지나도 끝내 통지가 없으므로 임진섭과 조동원 등을 연달아 보내서 다시 만날 것을 강요하였다. 열흘 남짓 지나서 비로소 만나보았다. 송병준이 말하기를, “내가 백만 대중의 생명을 위하여 어떻게 일신의 희생을 사양하겠소. 그러나 다만 교도들이 한 마음인지 모를 뿐이오. 우리나라는 자고이래로 나쁜 습관이 있어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마치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여깁니다. 족하께서 반드시 백만 교도들에게 일제히 머리털을 자르게 함으로써 피를 마시며 맹세하는 것을 대신한 연후에야 생명을 보호할 수 있고 종교를 확립할 수 있고, 국세(局勢)를 유지할 수 있고, 정치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용구 공은 흔연히 송병준과 마음을 모두 드러내 문경(刎頸)의 교의를 맺고 비밀히 교회 창립의 약속을 정하였다.
이때에 독립협회(獨立協會)의 나머지 무리인 윤시병(尹始炳) 등이 유신회(維新會)를 발기하였는데, 또한 송병준에게 소개하여, 윤시병 등으로 하여금 회명(會名)을 ‘일진회(一進會)’로 고치게 하고 경성으로 피신해온 교도들을 일진회로 끌어넣었다.
이에 이용구 공은 용구(容九)로 개명하고 각 지방에 서신을 보내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다. 경향(京鄕)의 회원들이 일제히 머리털을 자르니, 이때부터 동학이 일본을 배척한다는 의심은 얼음이 풀리듯이 풀어졌다.
이 때 정부는 친러[親露]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민회(民會)가 일당(日黨)에 붙었다고 지목하고 동학이 다시 일어난 것을 질시하였다. 군(軍)・경(警) 양청(兩廳)으로 하여금 일진회 회원을 포박하게 하였고, 지방 진위대(鎭衛隊)를 엄히 신칙하여 진보회 회원을 초토하게 하여 경향에서 관과 민이 크게 충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일본이 경의군용철도(京義軍用鐵道)를 부설하면서 역정(役丁)을 한국 정부에 요청하니, 한국 정부는 겉으로는 허락하는 척하였지만, 비밀리에 지방 관리를 신칙하여 백성들을 그 공사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용구 공은 황해도와 평안도의 교도들로 하여금 그 공사를 돕게 하였고, 역소(役所)를 철도 부근에 차리고서 매일 3천 명씩 파견하였는데 자비로 공사를 도왔다. 일본 군대가 일당을 교도들에게 지급하자, 교도들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고용인이 아니고 다만 본회의 명령에 의하여 나와서 공사를 도울 뿐이니, 오직 원하는 것은 하루 빨리 이 공사를 준공해서 군용(軍用)에 편리하도록 하여 러시아를 격파하고 개선(凱旋)함으로써 우리 회(會)의 목적을 달성하여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자리 잡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공사에서 교도들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였으나, 4개월 만에 비로소 공사가 준공되었다.
이에 각 지방의 진보회를 일진회로 만들고 4대강령으로써 주지(主旨)를 삼았다. 곳곳에 연단(演壇)을 개설하여 국세(國勢)의 위급함과 인민의 궁한 형편을 통렬하게 연설하고, 보안대책에 관하여 힘을 주어 부르짖으니, 전국의 교도들이 한 목소리로 일치되었다.
이 때 함경북도가 러시아 군대에 점령되었기 때문에 인민건의소(人民建議所)를 가탁하여 함흥(咸興)의 교도들과 연락을 서로 통하였다. 함경남도의 교두(敎頭) 유지훈(柳志薰)과 한남규(韓南奎) 등이 겨우 개회(開會)하였으나 관리들의 압박으로 붙잡혔다가, 다행히 일본 군대의 보호를 힘입어 붙잡힌 즉시 풀려났다. 그러나 평안남북도의 교도들은 지난번에 태천군(泰川郡)에서 혹심한 소탕을 당해 피살자가 80여 명이나 되었다. 또 호남 교도들이 전쟁을 피해 강경포(江景浦)로 피신해와 모인 교도들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기호(畿湖)・해서(海西)・관동(關東) 등지의 교도들이 경성으로 와 모여서 임시 사무소를 종가(鍾街)의 근처에 차렸는데, 정부에서 군(軍)・경(警) 양청(兩廳)을 파송하여 각 여관 등에 모여 있는 교도들을 혹은 체포하기도 하고 혹은 내쫓기도 하였다. 또한 각 성문에 엄밀히 주재하여 머리털 자른 사람의 입성을 철저하게 금지시켰고, 병순(兵巡) 수백 명이 갑자기 들이닥쳐 사무소를 쳐 부셨으므로 수직(守直)하는 회원(會員)이 혹심하게 중상을 입었고 그 사무소에 남아있던 물품은 남김없이 쓸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회중(會中)엔 조치할 만한 것이 없어서 이현(泥峴)의 일본 여관에서 한 달 남짓 잠복해 있다가 남부(南部) 미동(美洞)의 중국인 장수 임택성(林澤成)이 관리하는 가옥을 임대해서 다시 사무소를 차렸다.
장차 개회하려고 할 때에 정부에서 또 병순을 파송하여 회중(會衆)을 내쫓고 회장 윤시병(尹始炳)과 부회장 유학주(兪鶴柱)를 경위원(警衛院)에 잡아 가두었다. 이때 회중 수천 명이 경위원으로 쳐들어가 총관(摠管) 권중석(權重奭)을 직접 만나서 회장을 잡아 가둔 사유를 따져 물어 즉석에서 석방시켰다.
이튿날 병순 수천 명이 사무소를 포위하고 위엄을 보이며 경계를 엄중히 하였으므로 회원들은 죽음을 맹세하며 굳은 결의를 하고 10명씩 결사대를 편성하여 병순의 총칼에 맨손으로 저항하니, 순식간에 서로 충돌하였다. 회중(會衆)이 군인의 칼에 맞아 쓰러진 자가 매우 많았으나 회중은 오히려 칼과 탄환을 무릅쓰고 ‘다 함께 죽자’고 크게 외치면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병순이 결국은 포를 쏘았는데, 일본 헌병 몇 명이 마침 포탄에 맞아 상해를 입었다. 이 때 일본 헌병사령관 다카야마 이츠아키(高山逸明)가 이에 대한 보고를 듣고는 크게 노하여 즉시 병력 1소대를 파송하여 사무소로 와서 해당 포를 쏜 한국 병사 10여 명을 결박하여 헌병주찰소에 잡아다 가두었다. 게다가 한국 정부에 병순을 사주하여 멋대로 무리한 행동을 해서 경찰을 위반한 이유를 논박하니, 한국 정부는 당황하였고, 군부대신(軍部大臣) 이윤용(李尹用)은 이 때문에 관직에서 해면되었다.
그래서 회원은 사무소를 확립하고 날을 잡아 연회(演會)를 열었다. 그 때 각 지방에서 개회(開會)한 교두(敎頭)는 평안남도의 문학수
이때에 정부에서 군・경 양청을 신칙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모인 사람들을 기어이 산회(散會) 하자, 회원들이 경향 각 관청에 총대(總代)를 파송하여 항시 힘을 다해 탄박(彈駁)하니, 각 관리들은 문득 위축이 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같은 해 12월에 김연국이 경성감옥서에서 특별히 풀려났는데, 노역에 종사한지 4개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