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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을사년(乙巳年, 1905년)에 북한(北韓) 일대가 러시아 군대에게 점령을 당했기 때문에 일본군 북진대(北進隊)의 군량 수송문제가 매우 곤란하였다. 이용구 공이 스스로 일진회원(一進會員) 30명을 거느리고 친히 경성군(鏡城郡)에 이르러 일본의 미요시(三好) 사단장(師團長), 오오바(大庭) 참모장(參謀長), 구라타(倉田) 참모관(參謀官)과 더불어 운송방침을 만나 상의하였다. 그래서 함경남북도의 교두들에게 알려서 매일 교도 3,000명을 동원하여 군량을 운송하고, 한편으로는 경편(輕便) 철도 공사에 나가게 하였다. 또 머리털을 기른 교도 5,000명을 뽑아서 정탐대(偵探隊)를 조직하여 적의 정세를 상세히 정탐하게 하였다. 러시아 군대가 지나간 곳은 마을이 비어버렸고 도로는 더욱 험준한데 군량은 떨어졌으므로 교도들이 각각 쌀 한 통씩을 짊어지고 힘을 다해 무산령(茂山嶺) 아래에 이르렀다. 일본 군대와 교도들이 모두 굶주려 있었지만 급히 밥을 지어 일본군에게 먹이니, 일본 군대의 장졸들은 일진회 만세를 세 번 불렀고, 정의가 한집안과 같았다. 이 때 북진대 군량을 운송하던 교도 중 죽은 자는 21명, 부상자는 수백 명이었고, 러시아 군대에게 사로잡힌 정탐대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이때 여름 장마가 그치지 않아 여러 번 익사할 위험을 겪었다. 서습(暑濕)에 병들고 기갈(飢渴)에 지치면서 목숨을 포연(砲煙)과 탄우(彈雨)의 사이에 맡긴 채 죽음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고 오직 천명(天命)만을 믿고 이기고 돌아가기만 빌었을 뿐이다.
일본과 러시아의 강화가 성립된 뒤에는 이용구 공이 하세가와(長谷川) 대장(大將)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왔다. 대개 교도들의 북진대 노역은 6월에 시작하여 10월에 끝났다. 갑진년 개회 이후 관군의 초토화로 피살된 교도는 백여 명이었고, 을사년 원주군(原州郡) 원용팔(元容八)의 작란에 지평지회(砥平支會) 이강수(李康壽)・민주혁(閔周赫) 등 살해된 자가 8명이었고, 조선 융희(隆熙) 원년 삼수(三水)・갑산(甲山)・북청(北靑)・산포(山砲)의 소란에 교도 남녀 노유(老幼)가 동시에 화를 입은 자가 7백여 명이었고, 또 각 지방 지회 교도중 해를 입은 자가 수천 명을 밑돌지 않았다.
같은 해 이용구 공은 농업회사(農業會社)를 설립하여 실업의 발달을 도모하고, 광무학교(光武學校)를 경성에 창립하고, 각 지방 지회 구역 내에 학교를 분설(分設)하여 준수한 인재의 교육을 장려하였다.
같은 해 11월 6일 이용구 공은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탁하자는 뜻으로 선언서(宣言書)를 발표하였으니, 이것은 동양평화(東洋平和)의 뜻을 주장하고 한국 조정의 변사(變詐)가 화를 불러오는 것을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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