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12월 19일, 제세주강생기념식(濟世主降生紀念式)을 행하였다. 이 때 각지의 교도들이 일제히 모여서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을 맞아 대례사(大禮師)로 삼았다. 김연국이 천도교(天道敎) 대도주(大道主)로서 또한 손병희(孫秉熙)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때에 와서 그를 맞이하여 한울님을 모시고 대신사를 받드는 대례(大禮)를 전임시킨 것이다. 이에 또 본교당육임(本敎堂六任)을 조직하였으니, 교장(敎長)은 박형채(朴衡采), 교수(敎授)는 권병덕(權秉悳)과 권중면(權重冕), 도집(都執)은 김낙봉(金洛鳳)과 김철제(金喆濟), 집강(執綱)은 염창순(廉昌淳)과 김지련(金知鍊), 대정(大正)은 최종후(崔鍾厚)와 김사영(金士永), 중정(中正)은 김영하(金永河)와 이병의(李秉儀)였다. 각 지방의 대교장(大敎長)은 2백72인이었다. 장석(丈席)은 봉도(奉道)・봉례(奉禮) 두 사람을 별도로 두어서 항상 모시고 따라다니게 하였다. 육임실(六任室)에는 서기(書記) 6인을 나누어 두어서 교무(敎務)를 집행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908년) 정월에 이용구 공은 화사(畵師) 심전(心田) 인중식(安中植)을 불러 제세주의 진영(眞影)을 그리게 하였는데, 경주군(慶州郡) 가정리(柯亭里)에 사는 제세주의 양녀서(養女婿)인 정울산(鄭蔚山)을 청하여 주님의 용모를 지증(指證)하게 하였으니, 울산의 나이 70여세로 일찍이 곁에서 모셔서 진면(眞面)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 달 후에 비로소 초상화를 완성하여 봉안하였고, 이후로 여러 번 종문(宗文)을 발송하여 교도들에게 성경(誠敬)으로 법을 신봉하게 권면하였으며, 칠칠(七七, 일곱 이레)・삼칠(三七, 세 이레)・백오일(百五日) 치성과 일일성미(日日誠米)・조석반고(朝夕飯告)・인등(引燈)인등(引燈)・내수도(內修道)내수도(內修道)・내칙(內則)내칙(內則) 등의 항목은 한결같이 대신사(大神師)의 유규(遺規)를 준수하고, 또 성일강화회(聖日降話會)를 행하였으며, 교장 박형채로 하여금 교무(敎務)를 반시(頒示)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