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6월에 이용구 공은 송병준과 함께 비로소 경성본교당(京城本敎堂)을 대사동(大寺洞)에 건립하였다. 15일, 공사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준공하였다. 또 교인들이 성심으로 의연(義捐)한 구리조각과 쇠토막을 모아 무극종(無極鍾)을 주조하여 교당 전면 상층에 달았다.
8월 29일. 교인원사자추도례식(敎人寃死者追悼禮式)을 미동(美洞)의 임시 교당에서 행하였다.
9월 10일. 이용구 공은 도쿄(東京)에 가서 정당(政黨) 및 사회(社會)의 공론을 널리 채집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909년) 5월에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 때에 『필지항해경(必知沆瀣經)』과 『허실권도문(虛實勸道文)』 및 『교보(敎報)』를 반시(頒示)하였다.
9월 25일.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반함(飯含)과 수의(襚衣) 입히는 일을 의식대로 행한 다음 용산(龍山) 영모정(永慕亭) 후록(後麓)에 안장하였다. 이 해에 차자 석규(碩奎)가 태어났다.
10월 18일, 이용구 공은 공작(公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용구 공은 이때 일진회(一進會)의 회장으로서 경악(驚愕)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고, 부회장 홍긍섭(洪肯燮)으로 하여금 가서 위문하고 장례식을 보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12월 4일. 공은 일한정합방책(日韓政合邦策)을 황제께 상언하고, 정부에 헌의(獻議)하고, 내외국(內外國)에 성명(聲明)하였다.
경술년(庚戌年) 8월 29일. 일한(日韓)이 병합(倂合)된 뒤에 일진회는 드디어 해산하였다.
10월 28일. 경주(慶州)의 대원교당(大源敎堂)이 준공되었다. 이에 앞서 이용구 공이 박형채로 하여금 가서 그 공사를 돕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준공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 교중(敎中) 기념일은 한결같이 양력을 따라 시행하였다.
이에 앞서 이용구 공은 폭도가 교도를 살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의식일(儀式日)이 다가오자 애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결국 피를 몇 차례 토하였다. 병이 더욱 심해져서 한성병원(漢城病院)에 가서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효과가 없었으므로, 11월에 퇴원하여 용산 본가에서 치료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911년) 3월, 다시 한성병원에 들어갔지만 또 병이 낫지 않았다.
같은 해 봄에 『시천교종헌(侍天敎宗憲)』 및 『수도규정(修道規程)』과 『직무규정(職務規程)』 등의 글을 반행(頒行)하였다.
5월 5일. 이용구 공은 문도인 지석환(池錫煥)을 데리고 내지(內地) 효고현[兵庫縣]) 수마촌(須磨村) 별장에 가서 병을 조섭하였다.
9월에 자작(子爵) 송병준(宋秉畯)과 구암(龜菴) 김연국(金演局)이 찾아와 문병하자, 이용구 공은 애써 일어나 부축을 받아 앉아서 다시 동맹을 맺고, 앞으로 있을 교무를 일체 송병준에게 위탁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이용구 공은 종례사(宗禮師)가 되고, 송병준은 종리사(宗理師)가 되었다.
임자년(壬子年, 1912년) 설날에 이용구 공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일양(一陽)의 원기(元氣)가 오늘에 펼쳐지니
만물이 모두 이를 좇아 새로워진다
상설(霜雪)의 신고(辛苦) 씻겨간 뒤에
화풍감우(和風甘雨) 바로 꽃다운 봄
이용구 공은 이후로 병세가 더욱 심화되었다.
3월에 부인(夫人) 이씨(李氏)가 두 아들 현규(顯奎)와 석규(碩奎), 장녀 봉자(鳳子)와 여서(女婿) 최원기(崔元基)를 데리고 수마(須磨) 별장으로 가서 병시중을 들었다.
같은 해 4월 20일, 이용구 공은 손수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사람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은 모두 대도(大道)에 근원한 것인데, 없는 것은 있는 것에서 생기고, 있는 것은 없는 것에서 생기니,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는 사이에서 몇 억만 중생이 모두 여기에 있고 없고 하느니라.
같은 달 22일. 이용구 공은 훈1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받고, 그 날 밤에 유서(遺書) 1도(度)를 남겼으며, 모든 사후의 일은 송병준에게 일임하였다.
5월 22일 상오 9시에 이용구 공이 무극본원(無極本源)에서 입적(入寂)하였으니, 이용구 공이 세상에 존재한 기간은 45년이었다.
같은 달 25일, 수마(須磨) 별장에서로부터 내장의(內葬儀)를 행하고 신궁(神宮)은 재회(齋會)에 받들었는데, 재주(齋主)는 후지오카 요시후루(藤岡好古), 부재주(副齋主)는 후나비키 마모루(船曳衛), 재원(齋員)은 후지오카 요시하루(藤岡好春)・오야베 킨이치로(小谷部金一郞)・카노 나오키치(加納直吉)・마츠소노 이에노리(松園家範)・야스소노 쿄스케(安園淸輔)・미나세 타다와나(水無瀨忠政) 및 영인(伶人) 오노 아키히로(小野亮廣)・카미야 요키치(神谷勇吉)・기쿠치 이와타로(菊池岩太郞)・토기 후미히로(東儀文禮)・호기 요시지(法木芳次) 등이 먼저 관전제(棺前祭)를 행하고, 양사자(養嗣子) 현규(顯奎) 및 부인(夫人) 이씨(李氏), 영양(令孃) 봉자(鳳子)가 시천교종리사(侍天敎宗理師) 자작(子爵) 송병준(宋秉畯), 관도사(觀道師) 박형채(朴衡采)와 최영구(崔榮九) 등 교우(敎友) 12인 및 지구(知舊) 제씨(諸氏)들과 함께 자리에 늘어앉아서 비장하게 악(樂)을 연주하여 식전(式典)을 마치고 드디어 영구(靈柩)를 받들어 수레에 싣고 수마 제1운동장을 넘어가서 같은 날 하오 4시 30분 화화장(火化場)에 들어가 다비식(茶毗式)을 행하였다.
같은 달 30일, 유해(遺骸)를 받들고 도로 부산(釜山)을 건넜는데, 신궁재주(神宮齋主) 후지오카 요시후루(藤岡好古)와 영인(伶人) 오노 아키히로(小野亮廣) 등이 함께하였다. 경성(京城) 본교당(本敎堂)에서 미리 박계일(朴啓一)을 부산(釜山)에, 유난파(柳蘭坡)와 진창섭(陳昌燮)을 대구(大邱)에, 안태준(安泰俊)을 추풍령(秋風嶺)에, 오세열(吳世烈)과 유창교(柳昌敎)를 대전(大田)에, 박봉윤(朴奉允)과 송세근(宋世根)을 조치원(鳥致院)에, 한재리(韓在履)를 평택(平澤)에 파송하였다. 부근 지방의 여러 교인들이 회동하여 조의(弔儀)를 표하고 남대문역(南大門驛)까지 이르렀다. 조선총독(朝鮮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대리(代理)인 총독부중추원서기관장(總督府中樞院書記官長)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정무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의 대리(代理)인 총독부인사과장(總督府人事課長) 쿠와바라 하치시(桑原八司), 경무총장(警務總長) 육군소장(陸軍少將)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조선주찰군사령관(朝鮮駐札軍司令官) 육군중장(陸軍中將) 남작(男爵)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의 대리(代理)인 참모장(參謀長) 시바 가츠사부로(柴勝三郞), 제8사단장(第八師團長) 육군중장(陸軍中將) 고이즈미 마사야스(小泉正保)의 대리(代理)인 참모장(參謀長) 보병대좌(步兵大佐) 오무라 노부유키(大村信行), 동양척식회사총재(東陽拓植會社總裁) 육군중장(陸軍中將) 우사가와 카즈마사(宇佐川一正)의 대리(代理)인 타치바나 사이스케(立花犀介), 조선귀족원대표(朝鮮貴族院代表) 남작(男爵) 장석주(張錫周), 경성부윤(京城府尹) 김곡충(金谷充), 경성거류민단장(京城居留民團長) 코죠 칸도(古城菅堂), 경무관(警務官) 구연수(具然壽)와 나카노 아리미츠(中野有光), 경시(警視) 나가타니 타카시(永谷隆志)와 마츠무라 시게나루(松村重治), 육군헌병대좌(陸軍憲兵大佐) 야마가타 시즈카(山形閑) 및 본교대례사(本敎大禮師) 김연국(金演局) 이하 일반 교우(敎友)와 조선인(朝鮮人) 각 단체 약 3,000여 명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곧장 대사동(大寺洞) 본교당(本敎堂)으로 들어가서 영구(靈柩)를 봉안하였다. 연로(沿路)가 정숙(靜肅)하고 슬픔을 머금은 상태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6월 2일, 명치천황폐하(明治天皇陛下)의 칙사(勅使)인 해군소장(海軍少將) 야마가타 분조(山縣文藏)가 가져온 제자료금(祭粢料金)이 300환, 이왕전하(李王殿下)의 어사(御使)인 유천(柳燦)이 가져온 신료금(榊料金)이 1,000환, 이태왕전하(李太王殿下)의 어사(御使)인 최건영(崔建榮)이 가져온 신료금(榊料金)이 500환, 조선총독(朝鮮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각하(閣下)의 대리(代理)인 백작(伯爵)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가져온 신료금이 1,000환이었고, 동시에 차례로 본교당에 와서 각각 영단(靈壇)에 직접 전례(奠禮)를 행하여 조의(弔儀)를 표하였고, 또 공작(公爵)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이죠 모토히로(二條基弘), 귀족원의원(貴族院議員) 키우치 쥬시로(木內重四郞)과 코야마 기타로(小山義太郞)가 도쿄(東京)로부터 각각 화환(花環) 2개를 기증하였고, 또 육군대장(陸軍大將) 남작(男爵)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 육군중장(陸軍中將) 남작(男爵)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동양척식회사총재(東陽拓植會社總裁) 육군중장(陸軍中將) 우사가와 카즈마사(宇佐川一正), 자작(子爵) 송병준(宋秉畯)과 조중응(趙重應), 경무관(警務官) 구연수(具然壽), 사법부장관(司法府長官) 쿠라토미 유사부로(倉富勇三郞), 농상공부장관(農商工部長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경성거류민단장(京城居留民團長) 코죠 칸도(古城菅堂) 및 기타 고귀명신(高貴名紳)들이 진화(眞花)를 기증하였다. 혹은 생화(生花), 화환(花環), 화통(花筒)을 기증한 것이 100여개가 되었으니, 참으로 전무후무한 영계(靈界)의 원만한 영광이었다.
6월 5일 하오 2시에 본교당으로부터 영이(靈輀)를 봉인(奉引)하여 용산(龍山) 육군연병장(陸軍練兵場)으로 발향(發向)하였다. 영이의 우측에는 자작(子爵) 송병준(宋秉畯), 경시(警視) 나가타니 타카시(永谷隆志)와 마츠무라 시게나루(松村重治), 영이의 좌측에는 육군헌병대좌(陸軍憲兵大佐) 야마가타 시즈카(山形閑), 경무관(警務官) 구연수(具然壽),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 이겸제(李謙濟)가 각각 집불(執紼)하고 도보로 따랐다. 영이의 후방 묘표보호(墓標保護)에는 경무총장(警務總長) 육군소장(陸軍少將)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가, 그 다음은 양사자(養嗣子) 현규(顯奎)가, 그 다음은 수원(隨員) 한정규(韓貞奎)와 지석환(池錫煥) 등이 모두 도보로 따랐고, 그 다음은 친임관(親任官), 귀족문무관(貴族文武官), 동등한 대우자 및 각 종교대표자, 각 단체대표자가 순서대로 모시고 따랐는데, 뻗치는 길이가 약 18정(町) 쯤 되었다.
용산재장(龍山齋場)에 들어가서 같은 날 하오 3시경에 의식을 행하였다. 주상(主喪) 이현규(李顯奎) 이하 친족(親族), 고구(故舊) 및 재주(齋主) 후지오카 요시후루(藤岡好古) 이하 제재원(諸齋員)이 집례제원(執禮諸員) 등과 함께 상(床)에 다가가서 수불식(修祓式)을 끝내고 곧 신찬(神饌)을 올리고, 재주는 또 뇌사(誄詞)를 올리고 나서 주상 이하 회장제원(會葬諸員) 및 재주제원(齋主諸員)이 차례로 옥관(玉串)을 봉진(奉進)하였다.
이 때에 궁내대신(宮內大臣) 와타나베 치아키(渡邊千秋), 원수(元帥) 공작(公爵)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공작 가츠라 타로(桂太郞), 공작 이죠 모토히로(二條基弘), 육군대장(陸軍大將) 남작(男爵)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궁내차관(宮內次官) 카와무라 킨고로(河村金五郞), 육군중장(陸軍中將) 오타니 키쿠죠(大谷喜久藏), 육군중장 무라타 아츠시(村田惇), 귀족원의원(貴族院議員) 키우치 쥬시로(木內重四郞), 남작(男爵) 메가다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츠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 육군소장(陸軍少將) 사카키바라 쇼조(榊原昇造), 조동종대본산(曹洞宗大本山), 충남도장관(忠南道長官) 박중양(朴重陽), 경북도장관(慶北道長官) 이진호(李軫鎬)가 각각 멀리서 조전(弔電)을 해왔고, 기타 중외(中外) 각 지방 본교우(本敎友)의 조전 또한 몹시 많았다.
이 식전에 참석한 중요한 인사로는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칙사(勅使)인 해군소장(海軍少將) 야마가타 분조(山縣文藏), 이왕전하(李王殿下)의 어사(御使)인 자작(子爵) 이병무(李秉武), 이태왕전하(李太王殿下)의 어사(御使)인 사무관(事務官) 이항구(李恒九), 총독(總督) 백작(伯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각하(閣下)의 대리(代理)인 백작(伯爵)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 정무총감(政務總監)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이희공(李憙公)의 대리인 이인용(李仁用), 이강공(李堈公)의 대리인 쿠로사키 미치오(黑崎美智雄),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동양척식회사총재(東陽拓植會社總裁) 육군중장(陸軍中將) 우사가와 카즈마사(宇佐川一正)가 가져온 신료금이 1,000환이었고, 동시에 차례로 본교당에 와서 각각 영단(靈壇)에 직접 전례(奠禮)를 행하여 조의(弔儀)를 표하였고, 또 공작(公爵) 가츠라 타로(桂太郞)와 이죠 모토히로(二條基弘), 귀족원의원(貴族院議員) 키우치 쥬시로(木內重四郞)와 코야마 기타로(小山義太郞)가 도쿄(東京)로부터 각각 화환(花環) 2개를 기증하였고, 또 육군대장(陸軍大將) 남작(男爵) 오쿠보 하루노(大久保春野), 조선주차군사령관(朝鮮駐箚軍司令官) 안도 사다요시(安東貞美), 경무총장(警務總長) 육군소장(陸軍少將)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 탁지부장관(度支部長官) 아라이 켄타로(荒井賢太郞), 사법부장관(司法府長官) 쿠라토미 유사부로(倉富勇三郞), 농상공부장관(農商工部長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후작(侯爵) 이해승(李海昇), 자작(子爵) 조중응(趙重應), 조선귀족원대표(朝鮮貴族院代表) 남작(男爵) 장석주(張錫周), 경기도장관(京畿道長官) 히노하라 나오스케(檜原直右), 경성부윤(京城府尹) 김곡충(金谷充), 경성거류민단장(京城居留民團長) 코죠 칸도(古城菅堂) 및 기타 내외신사(內外紳士), 각 신문기자 등 참석자가 5,000여 명이나 되었다.
의장병(儀仗兵) 1대(隊)가 총을 받쳐 들고 식장 양쪽에 배립(排立)한 가운데 엄숙하게 행례(行禮)를 마치고, 하오 5시에 영이(靈輀)를 받들고 구용산(舊龍山) 영모정(永慕亭) 후록(後麓) 이용구 공의 선비(先妣)인 김씨(金氏)의 묘소가 있는 같은 언덕으로 갔다. 주상(主喪) 이현규(李顯奎) 및 근친(近親), 종족(宗族), 인척(姻戚)이 영결(永訣)하는 가운데 관(棺)을 묻고 묘표(墓標)와 진신(眞榊)을 세운 뒤에 제원(諸員)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이어서 영전제(靈前祭)를 행하였는데, 이에 재주(齋主) 후지오카 요시후루(藤岡好古), 부재주(副齋主) 후나비키 마모루(船曳衛) 이하 여러 재원(齋員)들이 신찬(神饌)을 전해 올리고, 재사(齋詞)를 고하고, 여러 영인(伶人)이 악(樂)을 연주하고, 제원(諸員)이 옥관(玉串)을 받들고 차례에 따라 배례(拜禮)를 행하고 퇴출하였다. 본교대례사(本敎大禮師) 김연국(金演局)이 뇌사(誄詞)를 올리고, 자작(子爵) 송병준(宋秉畯)이 묘지(墓誌)를 찬하였는데, 그 전문은 아래에 붙였다.
해산 이용구의 묘지명을 붙임[附海山李容九墓誌銘]
해산(海山)은 성은 이(李), 자는 대유(大有), 초명은 우필(愚弼), 다른 이름은 만식(萬植), 해산은 그 호요, 봉암(鳳菴)은 그 도호(道號)인데, 고려 벽진장군(碧珍將軍)의 32세손이다. 부친은 이름이 일화(一和)요 모친은 김씨(金氏)인데, 무진년(戊辰年, 1868년) 정월 21일 상주(尙州) 진두리(津頭里)의 집에서 이용구 공을 낳았다.
13세 때에 조부와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효성으로 섬기니, 이웃 마을에서 칭찬하였다. 23세 때에 해월사(海月師)에게 가서 동학(東學)을 수학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동학도(東學徒)를 잡아 죽이니, 해산은 전봉준(全琫準)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나아가 관병(官兵)에 대항하니, 온 나라가 시끄러웠고, 끝내는 일본과 청나라가 전쟁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해산은 관병에게 쫓겨 도망다녔다. 한 겨울에 근친(覲親)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집은 이미 불에 타버리고 부인 권씨는 암혈(巖穴)에서 애를 낳았고, 동한(凍寒)과 기아(飢餓)가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모친이 밥을 구걸하니 마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관병이 추적하니 해산은 성명을 바꾸고 자취를 감추었다. 관병이 권씨를 잡아 가두니 몇 달 만에 병이 났고 병신년(丙申年, 1896년) 가을에 권씨는 그 아이와 결국 죽었다.
해산은 숨어 다니면서 사람들을 교화시키지 않는 곳이 없었으므로 가르침을 받든 자가 7만여 명이나 되니, 관에서는 크게 떨었다. 정유년(丁酉年, 1897년) 연말에 몰래 모친을 뵈러 갔다가 관병에게 붙잡혀 이천(利川)의 감옥에 갇혔다. 규탄이 가혹하였는데 왼쪽 다리를 잡아 꺾였고, 수레에 실려 경성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가, 뒤에 석방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901년)에 일본에 유학하면서 널리 지사(志士)들과 사귀었다. 갑진년(甲辰年, 1904년) 봄에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개시하였다. 내가 마침 일본에서 돌아오니, 해산이 찾아와서 동방이 협력하고 화합할 계책을 설명하였는데, 의론이 정밀하고 투철하며 하는 말들이 모두 폐부(肺腑)에서 나온 진솔한 말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창설할 것을 도모하였다. 정부에서는 오히려 러시아와 국교를 맺고 일본군을 저지해줄 것을 몰래 청하였다. 해산은 그 잘못을 크게 논박하고 스스로 제자를 거느리고 종군(從軍)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끝낼 때에 가서는 나는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고 해산은 밖에서 주선하여 힘써 민심을 바로잡았다.
병오년(丙午年, 1906년) 12월에는 대신사의 도를 근본으로 해서 따로 교문(敎門)을 개설하여 시천교(侍天敎)라 일컫고 교장(敎長)에 추대되었고, 정미년(丁未年, 1907년)에는 훈3등서보장(勳三等瑞寶章)을 하사받았다. 기유년(己酉年, 1909년) 9월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애통하다가 병이 되었다. 이에 앞서 내가 동경에 있을 때 동배들과 상의하여 사적으로 협력하고 화합할 계책을 강구하였었는데, 12월에 해산이 합방의견을 올리니, 경술년(庚戌年, 1910년) 8월에 천황(天皇)이 칙명으로 그를 수용하였다.
이 뒤로 해산은 다시는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도(道)를 닦는 일에만 전심하였다. 신해년(辛亥年, 1911년) 이른 봄부터 병이 점점이 심해지자, 5월에 수마(須磨) 별서(別墅)로 와서 병을 조섭하였고, 임자년(壬子年, 1912년) 4월에는 훈1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하사받았다. 5월 22일, 드디어 눈을 감았으니, 이 때 나이 45세였다. 다비(茶毗)하고 돌아와 용산(龍山)의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권씨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아 최원기(崔元基)에게 출가시켰다. 동족(同族)의 이현규(李顯奎)를 양자 들여 사자(嗣子)로 삼았다. 뒤에 이씨(李氏)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아 이름을 석규(碩奎)라 하였는데, 아직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땅을 먹고 하늘을 모셨으니, 이게 바로 사람의 도리이었네
처신(處身)이 간고(艱苦)하였으므로, 영회(靈懷)가 깊고 넓으셨네
임금 잘 섬기고 백성 잘 보살펴, 위태로운 나라 보전하셨네
명치(明治) 45년 5월 25일 송병준(宋秉畯) 찬(撰)
계해년(癸亥年, 1923년) 봄에 종무장서리(宗務長署理) 봉도(奉道) 박형채(朴衡采) 등이 “구암(龜菴) 대례사(大禮師) 김연국(金演局), 고(故) 해산(海山) 종례사(宗禮師) 이용구(李容九), 금(今) 종례사(宗禮師) 송병준(宋秉畯)이 도(道)에 대해 설교하고 덕을 펴기 위해 전도하여 종교(宗敎)를 천명(闡明)하였으니, 마땅히 위호(位號)를 진봉(進奉, 승격)해야 한다”라고 하고, 곧 종도관(宗道觀) 및 종무부(宗務部)의 임원(任員), 경향교우대표인원(京鄕敎友代表人員) 등과 더불어 여러 번 공회(公會)를 거쳐 일치 가결하였다. 그래서 4월 2일에는 구암 김연국을 진봉하여 대도사(大道師)로 삼고, 이용구 공을 추봉(追奉)하여 대례사(大禮師)로 삼고, 종례사 송병준을 추대하여 대주교(大主敎)로 삼고서, 크게 고천예식(告天禮式)을 행하고, 3일 후에 대주교봉인예식(大主敎奉印禮式)을 이어 행하였으며, 이에 대주교의 명을 받들어 각 지방 교회에 선시(宣示)하였다.
이 때에 또 고(故) 백사길(白士吉)・이내겸(李乃兼), 하산(河山) 강시원(姜時元), 송암(松菴) 손성렬(孫星烈)・유시헌(劉時憲)・장한주(蔣漢柱)・임규호(任奎鎬)・박석규(朴錫奎)・이원팔(李元八)・이관영(李觀永)・손화중(孫華仲)・전봉준(全琫準) 제공(諸公)을 추존하여 도사(道師)로 삼고, 고(故) 정종혁(鄭宗赫)・최재림(崔在霖)・문학수(文學洙)・전장섭(全章燮)・정양(鄭樑) 제공을 신도사(信道師)로 삼았다.
김낙철(金洛喆)・권병덕(權秉悳) 등이 ‘지금 이 숭봉(崇奉)・추존(追尊)・추대(推戴)의 거행은 당초 장석(丈席)이 명령한 뜻이 아니다’라고 일컬으며 당류(黨類) 몇 십명을 체결하여 정리원(整理員)이라 모칭(冒稱)하고 반대하려고 애쓰며 예식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러 날 종무본부(宗務本部)에 와서 소란을 피웠는데, 그렇게 하기를 열흘 남짓이나 하였다. 그들은 고절문(告絶文) 1통을 지어가지고 본교당 정문 밖에 와서 큰 소리로 낭독한 뒤에 해산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를 경성(京城) 북부(北部) 광통방(廣通坊) 광토교(廣通橋) 아래 하천 북변에 따로 세웠다. 본부에서 부득이 경고문(敬告文)을 지어 변정(辨正)하였다. 얼마 후에 김낙철과 권병덕 등은 김연국(金演局)을 대교주로 받들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김연국은 제세주(濟世主)의 현몽(現夢)이라 칭하고 또 교명(敎名)을 제세교(濟世敎)로 고치고 서둘러 고천예식(告天禮式)을 행한 다음 관할하는 각 포에 윤시(輪示)하고 교명을 크게 써서 문미(門楣)에 걸었다. 따라서 또 북서(北署)에 신고했다가 곧 경관(警官)의 힐책을 받고 다시 ‘제세교(濟世敎)’란 문패를 떼어냈다. 온통 권병덕의 경거망동을 원망하는 당 총부(總部)의 여러 교도들의 눈초리가 마치 뭇 화살이 집중되듯 하자, 권병덕은 불안을 느끼고 여러 번 경시총감부(警視總監部)를 찾아가서 제세교의 문패를 달도록 승인해줄 것을 간곡히 요구하였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또 ‘대종시천교(大宗侍天敎)’이란 이름으로 신청했으나 역시 인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다시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로 문패를 달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연국이 전번에 ‘현몽’이라 칭한 것은 어찌 황당하게 날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교우들은 모두 두 분 선사(先師)의 진원정맥(眞源正脈)으로써 하늘을 공경하여 명을 받고 대신사를 존숭하여 도를 보위하는 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이거늘, 김낙철, 권병덕 등과 같은 자들은 망령되이 비뚤어진 소견을 고집하고 백방으로 날조하여 결렬시키려고 힘써서 끝내 도(道)를 어지럽힌다는 비방을 면하지 못하니, 또한 무슨 심사인가? 아! 이용구 공이 임종할 때에 교무에 관한 모든 일을 이미 지금의 대주교에게 위임하고, 박형채(朴衡采)로 하여금 구암(龜菴)에게 품의(稟議)토록 하니 구암 또한 정식으로 공시(公示)하였다. 교중(敎中)의 모든 일이 지금의 대주교(大主敎)에게 전임되었으므로 이로부터 대교주는 교당(敎堂)이 소유한 재정(財政)을 새롭게 정리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니, 재정이 남아돌고 모자라지 않았다. 종전에 지방 각 포의 폐막(弊瘼)이던 곧 이용구 공을 빙자하여 부당하게 거두는 잘못된 폐습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로부터 권병덕과 김낙철 등은 꾀를 쓸 수가 없으므로 더욱 감정을 품고 곧 구암과 비밀히 의논하여 분교(分敎)하려고 하였으나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는데, 지금 또 기회를 타서 단(壇)을 나누어 기치를 세우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이 일을 결의하여 도장을 찍고 식장에 참여하여 임명된 자는 이를테면, 종도관원(宗道觀員)은 김영학(金永學)・최영구(崔榮九)・오응선(吳膺善)・염창순(廉昌淳)・이용한(李容漢)・윤경순(尹敬順)・김철제(金喆濟)・김지련(金知鍊)・최종후(崔鍾厚)・한화석(韓華錫)・김익하(金益河)・김학수(金學水)・유지훈(柳志薰)・강병업(康昞業)・민흥식(閔興植)・이겸수(李謙洙)・김기삼(金箕參)・임중호(林仲浩)・정영로(鄭永潞)・김유영(金裕泳)・배한귤(裴漢橘)・한국보(韓國輔)・한국현(韓國顯)・이범석(李範錫)・강익주(康翼周)・정종욱(鄭宗郁)・최문상(崔文祥)・김두억(金斗億)・김택현(金澤鉉)・김정식(金鼎植)・김규대(金奎大)・김광찬(金廣燦)・김영언(金永彦)・박봉윤(朴奉允)・이순조(李舜祚)・김사영(金士永)・박규철(朴奎喆)・김영규(金永奎)・안태준(安泰俊)・문천수(文天洙)・김기주(金基周)・황훈(黃薰)・최봉관(崔鳳官)・유주헌(劉柱憲)・허선(許鐥)・신동섭(申董燮)・이태윤(李泰潤)・손은석(孫殷錫)・정용태(鄭龍泰)・박충일(朴忠一)・박치준(朴致俊)・최진견(崔鎭見)・강성구(康星九)・임주희(林周熙)・방순필(方淳弼)・김용욱(金容旭)・김우선(金雨善)・길이곤(吉彛坤)・이민철(李敏喆)・조창순(趙昌淳)・오병희(吳秉熙)・김기찬(金基燦)・정두용(鄭斗容)・이선민(李仙民)・이병재(李丙梓)・김진탁(金晉鐸)・윤상우(尹相佑)・김재홍(金在弘)・이석신(李錫信)이다.
종무부원(宗務部員)은 박형채(朴衡采)・전태현(全台鉉)・최동섭(崔東燮)・박해묵(朴海黙)・최승우(崔承宇)・이면수(李冕秀)・김명수(金鳴璲)・지석환(池錫煥)・유방주(兪邦柱)・한종만(韓鍾晩)・정석우(鄭錫祐)・이양수(李亮修)・조하승(曺河承)・우창영(禹昌榮)・박영우(朴永宇)・박준호(朴準浩)・성주호(成周鎬)・이건룡(李建龍)・엄주익(嚴柱益)・강병주(姜昞周)・조대유(趙大猷)・이을우(李乙雨)・전경진(田敬振)・김영호(金榮浩)・채석호(蔡錫鎬)・이찬도(李贊道)・최계청(崔啓靑)・최재홍(崔在弘)・이양근(李養根)・이태려(李泰礪)・이봉림(李鳳林)・박능수(朴能秀)・한명학(韓命鶴)・한기석(韓琦錫)・양기준(梁基俊)・박내학(朴來鶴)・석태준(石泰峻)・방용갑(方容甲)・천주진(千周鎭)・염달한(廉達漢)・방문석(方文錫)・김성삼(金成三)・한인봉(韓仁鳳)・이우현(李雨鉉)・나홍렬(羅弘烈)・곽병박(郭秉璞)・차병기(車炳驥・) 정택수(鄭澤守)・김병수(金秉洙)・신규환(申奎煥)・한재리(韓在履)・유길수(柳吉秀)・박처하(朴處夏)・김홍경(金弘景)・오문흠(吳文欽)・최태진(崔泰鎭)・김도빈(金道彬)・고동선(高董善)・유이숙(劉利淑)・김상현(金祥鉉)・김병순(金秉淳)・김명해(金明海)・사현필(史鉉必)・양순덕(梁順德) 등 133인이었고,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아! 이용구 공은 초야(草野)의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백만 교도를 규합하여 창생을 잘못된 정사 아래에서 구제하고 종교를 미망의 세계 속에서 부축하여 함께 무극무위(無極無爲)의 영역으로 건너가려 하셨도다. 소원이 원대하였는데 일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몸이 먼저 서거하셨도다. 붓 끝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애통한 마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있으랴!
〈번역 : 김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