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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동학도종역사
  • 기사명
    제1편 제1세 도조의 행적과 설법[第一編 第一世道祖行蹟及設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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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제세주(濟世主)는 동아세아주(東亞細亞洲) 조선(朝鮮)의 전(前) 경주부(慶州府) 구미산(龜尾山) 가정리(柯亭里)에서 태어났다. 때는 인효천황(仁孝天皇) 문정(文政) 7년 12월 19일이었다. 이때 자줏빛 기운이 집을 에워싸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으며 구미산이 3일 동안 진동하였다.
제세주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본관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이름은 제우, 표덕(表德)인 곧 자(字)는 성묵(性黙),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이다. 원조(遠祖)는 신라 때 문창후(文昌侯)에 봉해졌는데, 이름이 치원(致遠)이고 호는 고운(孤雲)이다. 그는 도덕과 문장으로 당대에 명성이 널리 알려졌는데 신라 말기에 정치가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게(偈, 공덕을 찬미하는 노래)에 이르기를, “우리 동방(東方)의 도기(道氣)가 오래토록 면면히 이어지고 우리 후손 중에 큰 성인(聖人)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곧 우리 나라 문헌(文獻)의 종장(宗匠)이다. 그 후손 중에 이름이 예(汭)라는 사람이 있어서 조선에서 문학(文學)이 뛰어나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냈는데 그가 제세주의 13세조(世祖)이다.
그의 후손 중에 진립(震立)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참판(參判)을 지냈고 시호(諡號)는 정무(貞武)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고 충사(忠祠)에 제향되며 인조(仁祖) 연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殉節)하였는데, 그가 제세주의 7세조(世祖)이다. 부친의 이름은 옥(滏)이다. 그는 임천(林泉)에 소요(逍遙)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일찍이 나이는 늙고 자식이 없음을 걱정하였는데 어느 날 정오 무렵에 우연히 몸을 일으켜 안방에 들어가자 마침 어떤 부인(婦人)이 집에 와서 내정(內庭)에 앉아 있었다. 누군지 물어보니 자기 문하(門下)의 제자인 한모(韓某)의 고모(姑母) 되는 여자였다. 이윽고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니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나이가 삼십이 넘었고 금척리의 친정에서 과부(寡婦)로 살고 있습니다. 그날 점심 무렵에 갑자기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이 되어 있을 때 태양이 품속으로 들어왔고 또 이상한 기운이 제 몸을 나꿔채듯이 끌고 가서는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마침내 함께 살다가 임신이 되어 제세주가 태어났다. 곧 상제(上帝)의 화신(化身)으로, 우리 도종(道宗)을 창립한 제1세(世) 도조(道祖)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공경하고 받들어 제세주라고 일컫는다.
제세주는 어려서부터 용모와 자태가 우람하고 풍채가 유난히 빼어나서 놀이를 할 때에도 어른처럼 의젓하였으며, 조금 자란 뒤에는 고결하고 총명하고 슬기로워서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흠모하고 찬양해마지 않았다.
제세주가 8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이 세상을 떠났고 6~7세 때에 이미 한문(漢文)을 가르치는 곳에 들어갔다. 부친 근암공(近菴公)은 지금 세상에서는 글을 읽어도 쓸 데가 없다고 여겨 향숙(鄕塾)에 입학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세주는 원래부터 타고난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보고 들으며 독학(獨學)하여 백가(百家, 諸子百家)와 시서(詩書)에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제세주는 16세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에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며 덕(德)을 관찰하고 도(道)를 즐길 뜻을 가졌다. 그러나 때마침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집안에 있던 가재 도구와 서적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20세가 되어서는 세도(世道)를 개탄하여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하늘이 장차 중대한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心志)를 힘들게 하고 그 근골(筋骨)을 괴롭게 하여 원대한 인물이 되도록 하는 법이다. 제세주도 이미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이어서 집안에 화재가 일어나게 하여 한우충동(汗牛充棟)처럼 쌓아온 서적을 모조리 사라지게 하고 풍수(風樹)의 여한(餘恨)을 풀 수가 없게 하였으니 그 운명의 외롭고 곤궁함을 참고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조선 말기의 나라가 어수선한 운세를 당하여 세상의 도덕이 나날이 침체되고, 윤상(倫常)이 점차로 파괴되어 당론(黨論)이 갈수록 드세어지고, 무당과 음사(淫祀)의 황당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관리와 호족(豪族) 중에 횡포하고 불법을 저지르는 무리들이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면서, 서로 이끌고 멸망의 길로 나아가고도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그 무렵에 불쌍한 우리 창생(蒼生)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이리저리 유랑하는 상태가 마치 그들을 밀어서 구덩이 속에 처넣는 것과 흡사하였다. 이런 까닭에 제세주는 세상을 위하여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려는 마음이 더욱 가슴 속에 맺혔고 늘 잊지 못하여 한시도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으므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였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울산군(蔚山郡)에 이르렀을 때 그 곳의 골짜기가 으슥하고 샘물이 맛좋고 산이 또렷하고 숲이 윤기나는 것을 보고는 가족을 이끌고 그곳에서 살기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과 왕래하는 일을 끊고서 덕성(德性)을 함양하고 도기(道氣)를 수련하였다. 이렇게 보낸 기간이 대략 14년이다.
을묘년(1855년) 늦봄에 어느 행각승(行脚僧) 하나가 공의 집 앞에 탁석(卓錫)하고는 절을 하고 예의를 갖추었는데 육근(六根)이 청정(淸淨)하고 누업(漏業)의 상(相)이 조금도 없었다. 제세주가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소?”라고 하였다. 행각승이 대답했다. “금강(金剛)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다시 물었다. “금강이 어떤 곳이오?”라고 하였다. 행각승은 손을 들어 가리켰다. 이에 제세주가 말했다. “이것은 모두 바람이 태허(太虛)에 쉬면서 나무를 움직여 보여주고 달은 중봉(中峰)에 숨은 채로 부채를 들어서 비유하는 것과 똑같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행각승이 말했다. “바람과 달은 본래 아무런 실체가 없거늘 보여주고 비유한들 어떻게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세주는 이 행각승이 비범한 사람인 줄을 알아채고 집으로 맞아들여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행각승이 말했다.

저는 한갓 선경(禪經, 佛經)만 읽었을 뿐 끝내 신험(神驗)을 겪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일 동안 하늘에 경건하게 기도하다가 탑에 기대어 선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어 보니 책 한 권이 탑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얼른 가져다가 한번 뒤적거려 보니 보통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사람과 하늘을 아우르는 법안(法眼)을 갖춘 인물을 찾아보려고 갖은 고생을 하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선생께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사흘 뒤에 다시 오겠다고 기약하였다. 제세주는 그때서야 말없이 알아채고 속으로 깨달았다. 이는 대체로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하나의 베개 속에 은밀하게 전해오던 보물 같은 책베개 속에 은밀하게 전해오던 보물같은 책으로서, 유가(儒家)의 글인듯 하나 유가의 글이 아니고 불가(佛家)의 글인듯 하나 불가의 글이 아니고 선가(仙家)의 글인듯 하나 선가의 글이 아니었다.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어 행각승이 정말로 다시 와서 제세주에게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였는지 물어보았다. 제세주도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하였는데, 행각승이 재배(再拜)하고 고맙다고 사례하면서 말했다. “선생께서는 하늘의 신령(神靈)이 강림하시어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장차 만세토록 도조(道祖)가 될 것입니다. 부디 선생께서는 자기 몸을 스스로 잘 챙기소서”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행각승과 책이 모두 너울너울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이 사라졌다.
대도(大道)가 장차 행해지려고 하면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가 많은 법이다. 옛날에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를 그릴 때에도 용마(龍馬)가 그림을 등에 지고 나왔고, 황제(黃帝)가 도술(道術)을 연마(煉磨)할 때에도 금갑(金甲)에 들어있던 삼황(三皇)의 옥결(玉訣)을 신(神)이 열어주어 받았다. 우리 제세주도 시대에 부응하여 출현하였으니 하늘이 장차 제세주의 손을 빌려 우리 창생들을 구제하려고 한 것이므로 신령스런 스님이 찾아와 현신(現身)하였고 영험한 책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그 일이 매우 기이하고 그 이치가 매우 현묘(玄妙)하여 전대(前代)의 성인(聖人)과 후세(後世)의 성인이 받은 서책이 똑같은 이치로 귀결된 셈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주석
표덕(表德) 표(表) 자는 정명(正名) 이외의 자(字)나 호(號)를 가리킨다.
치원(致遠)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말기의 학자로, 12세 때 당(唐) 나라에 유학하여 17세 때 중국의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는 등 우리 나라 문장(文章)의 종주(宗主)로 활약하여 문창후(文昌侯)에 봉해졌다.
예(汭) 최예(崔汭)는 1408년(태종 8년)에 진성감무(珍城監務)와 1411년(태종 11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낸 기록이 『태종실록』에 보인다.
진립(震立) 최진립(崔震立, 1568~1636)은 조선 중기의 장군으로, 자(字)는 사건(士建)이고 호는 잠와(潛窩)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해졌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용인(龍仁)의 험천(險川)에서 전사하였다.
한우충동(汗牛充棟) 책이 많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아올리면 마룻대에 닿을 정도라는 말이다.
풍수(風樹)의 여한(餘恨)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불어 흔들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는 옛말에서 나온 것으로, 자식이 어버이를 여읜 슬픔을 뜻한다.
행각승(行脚僧) 물과 구름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중. 유수행운(流水行雲)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까닭에 ‘운수(雲水)’도 행각승의 이칭(異稱)으로 쓰인다.
탁석(卓錫) 지팡이를 꽂는다는 말로, 고승(高僧)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비유한다. 육조 대사(六祖大師) 혜능(慧能)이 조계(曹溪)에 선장(禪杖)을 꽂아 두자 물이 뿜어 흘러내려 탁석천(卓錫川)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데, 이와 비슷한 여러 고승들의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육근(六根) 불가(佛家)의 용어로서, 6식(識)을 낳는 여섯 개의 뿌리,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를 말한다.
누업(漏業) 중이 속세(俗世)의 업(業)을 탈피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가치나 인연에 연연하는 것을 말한다.
베개 속에 은밀하게 전해오던 보물같은 책 도술(道術)에 관한 서적을 말한다. 한(漢)나라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베개 속에 남몰래 감춰두었던 홍보원비서(鴻寶苑祕書)를 보통 침중홍보(枕中鴻寶)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왔다는 쉰 다섯 점의 그림을 하도(河圖)라 하고,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거북이[神龜] 등에 있었던 마흔 다섯 점의 글씨를 낙서(洛書)라고 한다.
삼황(三皇) 삼황(三皇)은 태고 시대 전설적인 성왕(聖王)으로 즉 천황(天皇)・지황(地皇)・인황(人皇)을 말하는데, 천황씨는 형제 12인이 각각 1만 8천세씩 왕위를 누리었고, 지황씨 또한 형제 11인이 각각 1만 8천세씩 왕위를 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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