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듬해인 병진년(1856년) 4월에 양산군(梁山郡) 천성산 영주[靈呪]
지기(至氣)가 이제 이르니 4월이 왔도다. 한울님을 모시면 우리를 장생(長生)하게 해주어 무궁하고 무궁하도록 온갖 일을 알 수 있도다. 제자초학주문[弟子初學呪文]
한울님을 위하면 내 심정을 보살펴주고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이 적절하게 되리라. 강령주문[降靈呪文]
지극한 기운이 이제 이르렀으니 크게 강림(降臨)을 하소서. 본주문[本呪文]
한울님을 모시면 조화(造化)가 정해지고 영원토록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되리라.
집에 돌아와서는 산속에서 살아가려는 생각을 잊었다는 뜻을 내보이고 싶어서 집안에 남은 집과 토지를 모두 팔아넘겼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향화답(香火畓) 8두락(斗落)두락(斗落)을 전후로 나누어서 7인에게 모두 팔아 천성산 동네 입구에 있는 집 밖에다가 철점(鐵店, 대장간)을 개설하고 후원(後院)에는 도량을 열어 105일 동안이나 경건한 기도를 계속하였다.
제세주가 기도를 마친 뒤에 본향(本鄕)에 귀가해보니 그 향화답을 매수한 7인이 부정(不正)하게 팔았다고 따졌다. 제세주는 사실대로 자백하고 논을 산 7인에게 와달라고 부탁하여 자신의 잘못이니 법정(法廷)의 처결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당시에 이웃에 사는 어떤 노파가 갑자기 전질(癲疾, 간질병)에 걸려 어지러워 땅바닥에 놀라 쓰러지자 그 노파의 세 아들과 두 사위가 함께 제세주에게 와서 슬피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제세주가 “너희들은 나를 믿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시킨 대로 하였다. 이에 제세주는 깨끗한 물을 그 얼굴에 붓고 친히 자기 손으로 쓰다듬었다. 조금 지나자 노파의 목구멍 안에서 헐떡이는 숨기운이 조금 들리더니 뒤이어 피 한 덩이를 토해내고는 몸을 뒤집어 소생하였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제세주는 비로소 아픈 사람을 널리 구제할 큰 뜻을 품고서 당장 옷을 추어올리고 집을 나서 양산(梁山)과 울산(蔚山)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기이한 스님에게 영서(靈書)를 받고 깊고 오묘한 이치를 스스로 깨달았으며 천성산에 도단(道壇)을 쌓고 초두(醮斗,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집안의 숙부가 돌아가신 것을 미리 알아챈 일과 간질병으로 죽어가는 이웃 노파를 살려낸 일은 제세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자잘구레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해(同年) 여름 4월 5일
제세주가 종이를 받들고 기다리자 조금 뒤에 종이에 반짝반짝한 것이 부풀어 일어나더니 둥글게 변하기도 하고 네모진 형태로 변하다가 어느새 물체의 형상이 되었는데 이것이 영부라는 것이었다. 제세주가 아들에게 그것을 보게 하였으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제세주가 보면 또렷하게 자기 눈에만 보였다. 이윽고 상제(上帝, 한울님)가 말하였다. “영부는 곧 영원히 죽지 않게 해주는 선약(仙藥)인데 그 형체는 태극(太極)이고 또 궁을(弓乙) 처럼 생겼다. 나의 이 영부를 받아서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고 나의 주문(呪文)을 받아서 사람들이 나를 위하도록 가르치면 너도 영원히 죽지 않고 장생(長生)하면서 천하에 덕(德)을 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세주는 상제가 내린 명령을 받들어 그 영부와 글을 받아 입속에 넣어 삼켰는데, 2백일이 지나자 얼굴에 윤기가 나고 몸에 살이 올라 영험한 효과가 드러났으므로 그때서야 그것이 선약인 줄을 알았다.
제세주는 상하(上下)를 두루 유람하다가 마침내 용담의 옛집으로 돌아와서 세상을 은둔하되 걱정하지 않고 도(道)를 즐기며 스스로 즐거워 하였다. 하늘이 우리 제세주로 하여금 잠자고 남은 여가에 조용히 은거(隱居)하면서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천하에 덕을 펴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리라.
안정(安定) 6년, 기미년(1859년) 10월에 교유하던 사람들의 곁을 떠나 혼자 조촐하게 지내면서 정도(正道)를 지키는 학문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처자식을 이끌고 용담의 옛집으로 돌아가 이름자를 바꾸고 의관(衣冠)을 없애고 영원히 밖에 나가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고행(苦行)을 참고 견디어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에 축원(祝願)하는 일에 힘썼으니 이때가 태어나신 후 36년이 되던 기미년 10월이었다.
경신년(1860년) 1월 입춘일(立春日)에 제세주는 시(詩) 1수를 벽에 썼다. 그 시에 이르기를, “도기(道氣)를 오래 보존하면 사기(邪氣)가 침입하지 못하거늘, 세상 사람들은 귀추가 나랑 똑같지 않네[道氣長存邪不入 世間衆人不同歸]”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서양 세력이 동방(東方)에 점차 침투해 들어오자, 그 물밀 듯이 밀려오는 풍조를 막을 수가 없었다. 인심(人心)이 이로 인하여 끓어오르고 세도(世道)가 이로 인하여 더러워졌는데, 마음에 들지도 않고 이치에 닿지도 않았으며 천명(天命)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어느 곳이든 나아갈 곳이 없었다. 또 서양 세력이 튼튼한 배와 매서운 대포(大砲)로 무력과 위력을 뽐내어 우쭐대고, 열강(列强)은 시끄럽게 날마다 요구하고 협박하였다. 더구나 우리 동아시아 일대가 때마침 그 폐해를 물려 받았으니 어찌 입술이 없어지는 걱정[脣亡之患]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제세주는 어떻게 본래의 순수하고 질박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항상 속으로 우려하고 깊이 탄식을 하였다.
제세주는 항상 한울님[天主]을 받들어 모시는 일을 염려하여 매우 신중하게 처신하였다. 9월 9일이 되자 또 강화(降話)를 하였는데 그 하나는 환술(幻術)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부귀영화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제세주는 달가워하지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비록 명령이나 교시(敎示)가 있더라도 절대 따르지 아니하고, 상제의 명명(明命)을 받으려고 벼르면서 마침내 음식을 사절(謝絶)한 채 공경히 기다렸는데 11일
제세주는 이에 거의 1년이 지나도록 수련하고 헤아리고 나니 또한 자연(自然)의 이치가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주문(呪文)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降靈)하는 법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잊히지 않는 말씀을 만들어 차례대로 법을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21자(字)에 지나지 않았다.
제세주는 강명(降命)이 명확한 것을 깨달아 마음을 살피고 도를 음미하여 후학들을 개도(開導)하고자 「용담가(龍潭歌)」와 「교훈가(敎訓歌)」를 지었다
경신년(1860년) 10월 그믐에 제세주가 부모의 산소에 성묘를 하려고 할 때 때마침 폭우가 크게 내리자 집안 사람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성묘를 그만두라고 청하였다. 제세주는 “한울님이 내리신 명령이 있어서
이듬해인 신유년(1861년) 봄에 사방의 어진 선비들이 찾아들었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자들은 하인을 바꿔가며 그 수를 세어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혹은 감화되어 입도(入道)하고 혹은 도를 펴도록 권면하여, 마침내 「포덕문(布德文)」과 『동경대전(東經大全)』 4편(篇)을 지었다.
그 해 6월에 해월(海月) 대신사(大神師)인 휘(諱) 최경상
어느 날 하루는 제세주가 남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슬프게 탄식하기를, “요즘 우리 도를 포교(布敎)하는 자들이 거칠고 점잖지 못하니 누가 그 근원에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류(支流)를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 해 11월에 마침내 최중희(崔仲羲)와 함께 길을 떠나 호남의 남원(南原)으로 향하여 가다가 서공서(徐公瑞)의 집에서 열흘 남짓 쉬고 난 뒤에 길을 돌려 은적암(隱寂庵)에 이르렀다. 그 당시에 온갖 산의 깊숙한 곳에 대중들이 일제히 모여들어서 감로(甘露)의 법문(法門)을 열어 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