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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5장 통문 및 통유와 흥비가[第五章 通文及通諭興比歌]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62년 03월 00일
일러두기

통문[通文]

이 글은 통유(通諭)하는 것이다. 당초에 사람을 가르친 의도는 병든 사람에게 약을 처방하지 않고도 저절로 낫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린애가 붓을 얻어 총기(聰氣)를 돕고 그 속에서 화선(化善)하였으니 어찌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미 몇 년이 지났으되 나는 화(禍)가 생기지나 않을까하는 의심이 없었는데 치적(治賊)의 아래에서 욕(辱)을 받았으니 이것이 무슨 액운(厄運)인가. 이는 이른바 금(禁)하기 어려운 것은 악언(惡言)이고 베풀지 못할 것은 선행(善行)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갈수록 더욱 없는 일을 날조하여 남을 무함할 것이니 말류(末流)의 재앙이 어떤 지경에까지 이를 줄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만약 선도(善道)로 서이(西夷, 西洋)의 학문에 함께 귀착하는 것은 애당초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예의(禮義)가 있는 고을에 참여할 수 있고, 어떻게 우리 집안의 가업을 욕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비록 친척의 병일지라도 남을 가르치지 말고 잠시 전도(傳道)하는 사람이 몰래 사찰(査察)하고 극력 찾아내고 있으니 이러한 뜻을 통지하여 모조리 도를 포기하게 하여 다시는 욕을 당하는 폐해가 없도록 하라. 그러므로 이에 서너 줄의 글을 명시(明示)하노니 널리 알려 보이면 매우 다행이겠노라.

임술년(1862년) 3월 일

통유[通諭]통유(通諭)

첫째는 통유(通諭)할 일이 없고 둘째는 넘지[踰] 않을 단서가 있다. 그러므로 셋째는 부득이한 행차가 있고 넷째는 차마 어쩔 수 없는 정(情)의 글이 있었다. 천만번 깊이 헤아려도 글 속에 조금도 실수한 것이 없는데 시행을 어떻게 하였단 말인가? 작년 중동의 행차는 본래 강산의 청풍(淸風)과 산간의 명월(明月)을 유람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세도(世道)가 사리에 어긋난 것을 살피려는 것이었다. 오직 그 지목(指目)하는 혐의 때문에 그 무극(無極)의 대도(大道)를 닦고 그 포덕(布德)하는 마음을 애석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달을 넘기어 거의 다섯 달이나 지났지만 입경(入境)한 처음의 뜻은 단지 이것에 있었다. 그런데 산객(山客)은 구름이 깊은 곳을 알지 못하고, 동자(童子)는 응당 약을 캐러 간 곳을 가리키어, 한편으로는 공과(工課)가 느슨해진 것을 거들고 한편으로는 가사(家事)의 안부(安否)를 들음으로써 마음 속에 걱정을 없애려는 뜻이 있었으나 이날의 광경(光景)이 삼거리에서 자취를 노출하여 한 세상에 명성을 감추었으니 사람들 마음이 내 마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당초에 잘 처리하지 못한 까닭인가. 각처의 여러 벗님들이 혹은 볼일이 있어서 오기도 했고 혹은 볼일이 없는데도 따라왔다. 풍문을 듣고 온 자들이 절반이고 논리를 배우려고 찾아온 자들이 절반이었다. 객(客)들도 또한 스스로 그 일부를 알았거늘 주인이 마침 그 수효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장차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궁벽하고 가난한 산골짜기에 빈객을 접대할 도가(道家)가 모두 합하여 1~3집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가택(家宅)에 만약 거처할 곳이 많으면 간혹 그렇지 않기도 하고 가산(家産)이 만약 풍족하게 살아갈 만하면 굴속에 살아도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도 노인(老人)이 시(詩)로써 마음을 움직이고, 소년(少年)은 예(禮)로써 애써 만류하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시로써 마음을 움직인 것은 모두 마음이 감동하여 학문을 권유하고 서로 손을 모아 붙들어준 마음이요, 예로써 애써 만류한 것은 그저 억지로 만류한 것뿐이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충심(忠心)을 도모한 선의(善誼)였던 것이다. 주인(主人)이라면 어느 누가 자공(子貢)의 마음이 없을 수 있겠으며 종객(從客) 또한 맹상(孟嘗)의 예절을 잘못 안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비록 배도(裴度)의 자산(資産)이 있을지라도 나는 내 일을 감당할 수 없고 비록 백결(百結)의 우려(憂慮)가 있을지라도 사람들도 인사(人事)를 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한다면 나중에는 어떤 지경에 처하게 될 지 알 수가 없었으므로 며칠 안 되어 즉시 길을 떠났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장맛비가 내리는 계절을 맞이하여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뿌리어 풀이 자라 옷이 젖는 것쯤이야 족히 아까울 것도 없다. 그러나 선량한 붕우(朋友)의 간절한 바람을 생각하노라면 항상 그만둘 수 없다고 여기었다. 그러므로 이에 몇 줄의 글로써 위문하고 깨우치노니 너그럽게 헤아려 용서하는 것이 어떠한가. 돌아갈 시기는 초겨울이 될 듯하니 애타게 기다리지 말고 한껏 도를 닦아서 좋은 때에 좋은 얼굴로 기다리고 있기를 매우 간절히 바라노라.

개국(開國) 461년 임술년(壬戌年) 7월 3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삼가 쓰다.

검가[劒歌]

시호시호(時乎時乎) 어내시호(時乎) 부재래지시호(不再來之時乎)로다
만세(萬世) 일개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시호(五萬年之時乎)로다
용천검(龍泉劍) 더난 칼을 아니 씻고 어이하리
무수장삼(無袖長衫)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 천지(天地) 일신(一身)으로 빗껴 서서
칼노래 한 곡조(曲調)에 시호시호(時乎時乎) 불러리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戱弄)하고
게으른 무수장삼(無袖長衫) 우주(宇宙)에 덮혀 있네
자고명장(自古名將) 어데 있노 장부당전무장사(丈夫當前無壯士)라
조을시구(鳥乙矢口) 조을시구(鳥乙矢口) 이내 시호(時乎) 조을시구(鳥乙矢口)

흥비가[興比歌] 처사가[處士歌]

1. 겨우 한 가닥 길을 얻고 나니 걸음 걸음마다 험난을 건너네[纔得一條路 步步涉險難]
2. 산 밖에 다시 산이 보이고 물 밖에 또 물을 만나네[山外更見山 水外又逢水]
3. 다행히 물 밖의 물을 건너고 가까스로 산 밖의 산을 넘었네[幸渡水外水 僅越山外山]
4. 광야가 있는 곳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대도가 있음을 깨닫네[且到廣野處 始覺有大道]
5. 봄소식을 애타게 기다려도 봄빛은 끝내 오지 않누나[苦待春消息 春光終不來]
6. 좋은 봄빛이 없는 게 아니라 오지 않으면 때가 아니네[非無春光好 不來卽非時]
7. 때가 이르면 당연히 오는 철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오네[玆到當來節 不待自然來]
8. 봄바람이 부는 밤에는 온갖 나무들이 동시에 알아채네[春風吹去夜 萬木一時知]
9. 하루에는 하루의 꽃이 피고 이틀에는 이틀의 꽃이 피네[一日一花開 二日二花開]
10. 일년 삼백 육십일에는 삼백 육십의 꽃이 피네[三百六十日 三百六十開]
11. 자기 한 몸에 꽃이 피면 온 집안이 모두 봄이로다[一身開是花 一家都是春]
12. 병 속에 선주가 있으니 백만 명을 살릴 수 있네[甁中有仙酒 可活百萬人]
13. 천년 전에 빚어내어 감춰두고 쓰일 곳에 대비했네[釀出千年前 藏之備用處]
14. 무심코 한번 열어보니 냄새가 흩어지고 맛도 담박하네[無然一開封 臭散味亦薄]
15. 이제 우리 도를 위하는 자는 이 술병처럼 입을 지키세[今我爲道者 守口如此甁]
16. 바람이 불고 비가 나뭇가지를 지나면 풍우상설이 오네[風過雨過枝 風雨霜雪來]
17. 풍우상설 지난 뒤에 가지에 핀 꽃한송이가 만세의 봄이로세[風雨霜雪過去後 一枝花發萬世春]
18. 마음속에 천지를 그려내어 사계절로 기둥 삼고 오행으로 색칠하고 싶네[心中欲圖成天地 四時爲柱五行彩]
19. 화공이 단청 물에 붓을 던지어 먼저 북쪽에 점을 찍고 팔괘를 모두 그리네[畵工投筆丹靑水 先點子方八卦盡]
20. 음양의 바탕은 해와 달의 색이고 풍운의 얼굴은 별들이 운행하는 수이네[陰陽爲質日月色 風雲成面星辰數]
21. 공인이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니 만물이 그림 속에 저절로 생기네[工人盡力以成圖 萬物自生畵裡中]
22. 솜씨와 재주가 있고 또한 신기하니 무릎 꿇고 안 보이는 곳 물어보고 싶네[於工於才亦神機 跪膝欲問不見處]
23. 종적을 알 수 없어 또 찾고 싶어서 다시 구름길 밟지만 길이 끝이 없네[蹤迹不知又欲尋 更踏雲路路無窮]
24. 천봉만학을 거의 모두 돌아다니자 멀리 보이는 허공이 바로 대도일세[千峰萬壑踏幾盡 遙望虛間是大道]
25. 평생의 기력 이 때에 바닥나고 길 앞에 당도하니 다시 망망하네[平生氣力此時盡 路前當到又茫茫]
26. 드넓어서 본진에 돌아가는 길 깨닫지 못하고, 넓게 앉아 길이 탄식하다가 잠시 꿈을 꾸었네[浩浩不覺歸眞路 廣坐長歎暫成夢]
27. 이 늙은이 풍운 사이에 기대어 선 채 말없이 한 편의 시를 외우네[此翁依立風雲間 黙然始誦一數詩]
28. 꿈이 끝나 다시 깨어 베개 높이 하고서, 생각을 해봐도 본진은 보이지 않네[夢罷更醒依高枕 思中惟有眞不見]
29. 생각하는 자는 누구이고 본진은 누구인가, 생각하는 자와 본진이 모두 마음일세[思者何人眞者誰 思者眞者都是心]
30. 찾는 자는 누구이고 그린 자는 누구인가, 찾는 자와 그린 자가 모두 그대일세[尋者誰也工者誰 尋者工者都是汝]

흥화가[興化歌]

1. 호호망망부운수(浩浩茫茫浮雲水)는 연분연분 기세로다
2. 하월(夏月)은 양월이요 이월은 삼월(三月)이라
3. 오동(梧桐)에 우는 봉(鳳)은 어이 그리 슬피 우노
4. 어느 때인고 어느 때인고 추월추풍엽락시(秋月秋風葉落時)네
5. 표일(飄逸)한 학발노인(鶴髮老人) 청려장(靑藜杖)을 둘러 집고
6. 영주 봉래(瀛洲蓬萊) 좋은 경에 갈건야복(葛巾野服) 노니다가
7. 홀연(忽然)이 생각(生覺)하니 억조 만민(億兆萬民) 동요셔라
8. 위국(爲國) 조를 일삼으니 바쁘도다 바쁘도다
8. 일시(一時)가 바쁘도다 강구연월(康衢煙月) 좋다 말라
9. 춘만 하처(春晩何處)에 매매 유(遊) 경성(京城)이요
10. 천심(天心)으로 도(道)를 닦아 내 도사를 잊지 마라

이 해 12월 3일에 제세주는 둘째 아들 최세청(崔世淸)과 김춘발(金春發)・성일규(成一圭)・하한용(河漢龍)・강규(姜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서법(書法)을 강론하고 연구하였다. 며칠 안되어 출묘입신(出妙入神)하여 마치 난새와 봉새가 너울너울 춤을 추듯 하고 천리마와 사자가 내달리듯 하여 무릇 영서(靈書)와 궁을전(弓乙篆, 弓乙符圖)을 마음대로 구사할 무렵에 거처하는 용담정사(龍潭精舍)의 기둥과 서까래가 흔들리고 빙빙 돌더니 한참 지난 뒤에야 그쳤다. 비록 글자의 획을 분간하지 못하는 어린애라도 제세주의 명을 받들어 앞에서 글씨를 쓰면 그 자획(字劃)의 생김새가 제세주가 쓴 글씨와 조금도 서로 차이가 나거나 틀리지 않았으므로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신기하고 이상하게 여기어 앞다투어 서로 찾아와서 배웠다. 제세주는 이에 「필법(筆法)」 1장(章)을 저술하였다.
6월에 제세주는 특별히 편액(匾額)을 써서 각처의 문도들에게 나누어 내려주고 7월에 철접(輟接)하기로 기약하였는데, 그 때 한 자리에 모인 자들이 50여 인이었다. 이때 제세주가 시(詩) 1구(句)를 지은 것이 있는데, 그 시구는 “용담의 물줄기는 사해의 근원이고, 구악에 봄이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라는 내용이며, 또 「보잠(寶箴)」을 지은 것이 있다.
문구(文久) 3년인 계해년(1863년) 12월 29일에 해월선생(海月先生) 최시형(崔時亨)이 수운(水雲) 대선생을 찾아뵙고 말했다. “올해 연말에는 정원(情願), 진정으로 바람이 갑절이나 더합니다. 소문을 들어보니 조정(朝廷)에서 최수운(崔水雲) 선생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 선전관(宣傳官) 정구용(鄭龜鎔)이 내려 온다고 합니다. 화(禍)를 예측할 수 없으니 대선생께서는 대책을 도모하여 미리 화를 면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수운 대선생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도(道)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고 화복(禍福)은 명(命)이 있는 법이니 천명(天命)에 순종하고 순일(純一)하여 때맞추어 오고 때맞추어 가는 법이오. 나도 벌써 잘 알고 있으니 단지 오는 대로 받아들일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수운 대선생은 그날 밤이 새도록 촛불을 밝히고 단정하게 앉아서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였다.
얼마 후에 선전관 정구용이 내려와서 경주의 관군(官軍) 수백 명을 데리고 용담의 마을 입구를 포위하여 매우 다급하게 체포하였다. 수운 대선생의 맏아들인 최세정(崔世貞)을 포함하여 문도 가운데 함께 체포되어 묶인 자들이 모두 수십 명이었다. 연행되어 가는 도중에 영천군(永川郡)에 이르러 나졸(羅卒) 중에 대선생을 위학(僞學)으로 지목하는 자의 언행(言行)이 공손하지 않았다. 이때 대선생이 타고 가던 말의 발굽이 갑자기 땅바닥에 달라붙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다. 관리배(官吏輩) 등이 겁을 먹고 무서워하여 애걸하자 그때서야 말이 발굽을 앞으로 폈다. 이때 각지의 동학도유(東學道儒)들이 한꺼번에 조령(鳥嶺)으로 모여들었는데, 그 수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가다가 경기도 과천군(果川郡)에 이르렀을 때 조선의 철묘(哲廟, 哲宗)께서 승하(昇遐)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선생은 비록 체포되어 묶인 채로 끌려가는 중이었지만 애통해마지 않았다.
며칠 후에 선전관이 다시 칙령(勅令)을 전하였다. “경주의 동학 괴수(魁首) 최모(崔某, 崔濟愚)를 다시 본도(本道)의 감영(監營)에 가두고 공초(供招)를 받아내어 조정에 계문(啓聞)하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이에 과천에서 다시 길을 되돌려 오다가 조령에 이르자 문도 수백 인이 길옆에서 기다리다가 맞이하면서 눈물을 삼키며 탄식을 하였다. 이달 29일에 유곡(留谷)에 이르러 연말을 보냈다.

주석
통유(通諭) 상부에서 하부에 내리는 지시 또는 그 지시문을 말한다.
당(唐)나라 가도(賈島)의 「방도자불우(訪道者不遇)」 시(詩)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님은 약초를 캐러 나갔다네. 이 산속에 계신 것만은 분명한데, 구름이 깊어서 어딘지는 모른다네[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라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자공(子貢)의 마음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노(魯)나라에서 매월 초하루에 종묘(宗廟)에 고유(告由)하면서 희생(犧牲)인 양(羊)을 바치는 의식을 없애려고 하자, 공자가 “자공아, 너는 그 양을 아까워하느냐? 나는 그 예(禮)를 아까워하노라”라고 하였는데, 공자가 아까워한 것은 이 의식을 통해 그나마 이런 예가 명맥이라도 보존되어 뒷날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여기에서 ‘자공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주인으로서 객(客)의 요청에 따라 자기 견해나 소신을 굽히는 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맹상(孟嘗)의 예절 맹상(孟嘗)은 전국(戰國) 시대의 맹상군(孟嘗君)를 말한다. 그는 문객(門客)인 풍원(馮諼)이 불평이 있을 때마나 칼등을 두들기며 노래하면 풍원의 불만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예우(禮遇)를 해주었다.
배도(裴度) 당 나라 때 문신으로,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양(洛陽) 남쪽의 오교(午橋)에 꽃나무 1만 그루를 심고서 그 중앙에 여름에 더위를 식힐 누대와 겨울에 따뜻하게 지낼 집을 짓고 녹야당(綠野堂)이라 이름을 붙인 뒤에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등 문인들과 모여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백결(百結)의 우려(憂慮) 현순백결(懸鶉百結)의 준말로, 옷이 마치 메추라기를 매단 것처럼 너덜너덜하게 헐어서 누덕누덕 꿰매 입은 것을 말한다.
청려장(靑藜杖) 푸른 명아주 나무로 만든 지팡이. 한(漢)나라 때 유향이 밤에 천록각(天祿閣)에서 글을 교정하고 있을 때, 어떤 노인이 청려장을 짚고 들어와 깜깜한 데서 혼자 글을 외고 있는 유향을 보고 그 청려장 끝에 불을 붙여 환하게 해 주었다고 한다.
강구연월(康衢煙月) 태평한 세상의 평화로운 마을 정경(情景)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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