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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6장 수운 제세주가 순도하여 선인이 되다 [第六章 水雲濟世主殉道化仙]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64년 01월 06일
일러두기

원치(元治) 원년(元年)인 갑자년 정월 6일에 〈제세주가〉 대구 감영의 감옥에 구금되었다. 순찰사(巡察使) 서헌순(徐憲淳)이 상주목사(尙州牧使) 조영화(趙永和), 지례현감(知禮縣監) 정기화(鄭夔和), 산청현감(山淸縣監)이기재(李沂在)를 명사관(明査官)으로 차정(差定)하여 제세주를 심문하게 하였다. 때마침 폭우가 많이 내리자 바로 심문을 하지 않고 오작(仵作, 지방관아에 속하여 수령이 시체를 임검할 때 시체를 주워 맞추는 일을 하던 하인)들을 시켜 문도 중에 낌새를 살피는 자를 엄금(嚴禁)하도록 하였다.
대선생(大先生, 崔濟愚)대선생(大先生)이 체포된 후 며칠 동안에 감영의 군교(軍校)와 감옥의 옥졸(獄卒) 50여 명이 해월 대신사가 거처하는 방을 빙 둘러 에워싸고는 사정없이 수색을 하였다. 대신사는 의관(衣冠)을 바르게 한 채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속으로 염송(念誦)을 하자 여러 군교와 옥졸들의 눈에는 모두 대신사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사가 이윽고 느긋한 걸음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포위한 채 따라 나왔으나 또한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신사는 마침내 몰래 성(城)에 들어가서 백방(百方)으로 주선하여 현풍(玄風) 사람 곽덕원(郭德元)을 가노(家奴)로 분장시켜 가까스로 아침과 저녁에 감옥의 대선생에게 반찬을 전해주게 하였다. 20일에 순찰사 서헌순이 비로소 선화당(宣化堂)에서 법정(法庭)을 열고는 문초하였다. “너는 왜 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패거리를 만들어 풍속을 더럽히고 어지럽혔는가?”라고 하였다. 수운 선생은 정색을 하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의 주인은 선(善)이요 말의 주인은 덕(德)이니, 선과 덕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다. 풍속을 더럽히고 어지럽힌 것이 어디 있느냐? 이 한 몸을 버리어 영원히 이 도(道)를 모시고 어둠에 빠진 생령(生靈)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진실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서헌순은 아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다시 옥중에 수감하라고 명하고는 계문(啓文)을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에 법정을 열어 재심(再審)을 하였는데 겨우 서너 차례 장(杖)을 치자마자 갑자기 우레가 울리듯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지붕이 흔들렸다. 좌우의 사람들이 다들 겁을 먹어 얼굴빛이 변하였고 순찰사도 크게 놀라 마침내 형신(刑訊)을 정지하고 다시 수감하라고 명하였다. 수운 선생은 형구를 차고 감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에도 오로지 천명(天命)을 믿고 더욱 심신(心身)을 가다듬었으며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이 없었다. 수운 선생은 기필코 이 도를 보전(保傳)하려고 스스로 “등불처럼 밝은 물 위에는 아무런 혐극이 없고, 몸뚱이는 말라죽은 기둥과 흡사해도 힘은 남아도네[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라는 내용의 시(詩) 1구(句)를 썼다. 그리고 ‘고비원주(高飛遠走)고비원주(高飛遠走)’라는 네 글자를 써서 한 가닥 종이로 꼰 새끼줄처럼 둘둘 말아서 담뱃대의 대롱 속에 끼워 넣어 남몰래 해월 대신사에게 주었다. 대신사는 그것을 꺼내 보더니 그 뜻을 알아챘다. 곧 기회를 따라 응변(應變)하여 전도(傳道)하고 포덕(布德)하라는 비밀 교시(敎示) 였다. 대신사는 이에 하늘을 우러러 길게 탄식하고는 행장을 꾸려 김춘발(金春發)과 함께 강원도 태백산(太白山) 아래까지 갔다.
2월 29일에 순찰사가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다. “요언(妖言)으로 백성들을 현혹하였으니 법에 따라 죄를 정하소서”라고 하였다. 수운 선생은 마침내 대구부(大邱府)의 관덕정(觀德亭)에서 해를 당하였는데 참형(慘刑)을 당할 때 아미산(峨嵋山) 밑의 천지가 어두워지고 음침한 비가 내렸으며 구름 낀 해가 참담하였다. 당시에 문도 중에 함께 체포된 자들이 혹은 그대로 감옥에 수감되어 옥중에서 굶어 죽은 자도 있고 혹은 멀리 달아나 숨은 채로 은신처[匪所]에서 죽기도 하였는데 거의 대부분 동학교도(東學敎徒)로 지목되는 것을 피하려고 주문(呪文)을 바꾸고 도명(道名)을 고치어 그 주장이 여러가지여서 복잡하고 요령(要領)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오직 해월 선생만 홀로 그 종지(宗旨)를 얻어 훌륭하게 동학무극대도(東學無極大道)의 제2세(世)도조(道祖)가 되었다.

상편(上篇) 종(終)

수운 대선생께서 강생(降生)하신지 41세 되던 해의 3월 10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에 순찰사 서헌순이 특별히 수운 선생의 맏아들 최세정을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시체를 내어다가 묻게 하였다. 최세정은 문도 김경필(金敬弼)・김경숙(金敬叔)・정용서(鄭用瑞)・곽덕원(郭德元)・임익서(林益瑞)・전덕원(全德元) 등과 함께 대선생의 유체(遺體)를 수습하여 수레에 싣고 경주의 고향 선산으로 향하였다. 〈운구행렬이〉 자인현(慈仁縣) 자인면(慈仁面) 후연점(後淵店)에 이르자 점주(店主)가 의분에 북받쳐 눈물을 훔치면서 영구(靈柩)를 멈추라고 간청하여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깨끗한 방을 얻어 영구를 옮겨 모시었다.
이날 쌍무지개가 연못에 걸치고 오색 구름이 집을 에워쌌으며 대선생의 유체에 약간의 온기(溫氣)가 있었고 칼로 벤 흔적은 전혀 없었다. 붉은 선(線)이 고리처럼 에워싸고 기이한 향기가 사람에게 스며들어 마치 곧 다시 살아날 듯하였다. 문도 등이 바닥에 엎드려 하늘에 기도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흘이 되자 무지개가 맑아지고 구름이 흩어지더니 선생의 얼굴이 금새 변하였으므로 이윽고 염습을 하고 길을 떠났다. 문도들은 자기들에게 화(禍)가 미칠까 염려하여 모두 중도에 절하고 돌아갔고 오직 선생의 장조카인 최세조(崔世祚)가 중도에서부터 영구를 배행(陪行)하여 선생님의 양녀서(養女壻) 정울산의 집에 이르렀다. 3월 17일에 밤을 틈타서 가정리(柯亭里)의 옛 구미산(龜尾山) 아래 용담(龍潭) 앞쪽 산기슭 교곡(橋谷)의 밭두둑 위에 임시로 장사지냈다. 선생님의 맏아들인 최세정은 강원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지내다가 양양군(襄陽郡)에서 붙잡혀 끝내 장(杖)을 맞다가 죽었고, 둘째 아들 최세청은 병에 걸려 죽었다. 선생의 대를 이을 사람은 단지 세 명의 나이 어린 며느리뿐이었다.

주석
명사관(明査官) 특별히 명확하게 조사할 일이 있을 때 임명하는 임시직 관원. 각 도의 관찰사나 순찰사가 관내(管內) 수령(守令) 중에서 임명하였다.
대선생(大先生) 동학(東學)에서는 1세 교조(敎祖) 최제우를 대선생 또는 대주인으로, 2세 교조 최시형을 선생 또는 주인이라 불렀는데, 시천교(侍天敎)와 천도교(天道敎)로 개편되었을 때에 대신사(大神師)와 신사(神師)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시천교에서는 최제우를 천사(天師)로, 최시형을 대신사로 부르기도 하였다.
선화당(宣化堂) 관찰사(觀察使)가 집무를 보는 대청(大廳)을 말하는데, 줄여서 선당(宣堂)이라 하기도 한다.
고비원주(高飛遠走) 위험이 닥쳤으니 어서 빨리 먼 곳으로 달아나라고 당부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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