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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1장 제2세 도조 해월대신사의 포덕 [第一章 第二世道祖海月大神師布德]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27년 03월 21일
일러두기

해월(海月) 대신사(大神師)는 곧 동학도(東學道)의 제2세(世)도조(道祖)이다. 제1세 도조인 제세주(濟世主)가 강생(降生)하신 지 4년째 되던 해인 대한(大韓) 조선 순조(純祖) 27년, 정해년(1827년) 3월 21일에 대한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황오리(皇吾里)에서 태어났다.
대신사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경주(慶州) 최씨의 후손으로 이름은 시형이고 자(字)는 경오(敬悟)이며 호(號)는 해월(海月)이다. 부친의 이름은 종수(宗秀)이고 모친은 월성배씨(月城裵氏)이다. 5세 때 모친상을 당하였고 12세 때인 정사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이윽고 먼 친족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17세 때부터 조지업(造紙業)을 경영하였으며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28세 때 본군(本郡)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에 병거(屛居, 세상에 물러나 집에만 있음)하였는데,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대신사의 공정(公正) 함에 탄복하여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을 맡겼다. 무릇 도박을 금지하고 싸움을 화해시키는 등 적절하게 주민들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여 사람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30세 때 가족을 이끌고 검곡(劒谷)으로 옮겼고 35세 때인 신유년(1861년) 6월에 스승에게 도(道)를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글방의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또 가정에서의 교육도 없었다. 그러나 그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한결 뛰어나고 성문(聖門)에서 친히 보고 배운 덕분에 영원히 포덕(布德)하기로 정해진 사람으로 자임(自任)하여 우뚝하게 용담(龍潭)의 고족(高足, 首弟子)이 되었다.
대신사가 연이어 주문을 외우자 박춘언(朴春彦)이 곧 옷을 벗고 펄쩍펄쩍 뛰는 동작을 계속하면서 마치 참회하여 옷을 찢어버리려고 하는 듯하더니 대신사가 다시 천령(天靈)에게 고(告)하자 금새 멈추었다. 이에 제세주는 웃으면서 도유(道儒)가 마음이 급한 것을 탄식한다는 글을 지었다.
1861년(신유년) 11월에 대신사는 학문에 충실하게 전념하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생각에 잠기어 오묘한 현리(玄理)를 깊이 연구하여 현해(懸解)한 것이 많았다. 일찍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게 말하였다. “전에 듣건대 독실히 공부한 사람은 하늘의 말을 이어 받을 수가 있다고 하였는데 나만 그것이 없으니 이는 필시 성(誠)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성은 나에게 있는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해야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슥한 밤중에 인적이 고요한 시간을 틈타서 문 밖의 대나무 숲 아래에 있는 네모진 연못에 가서 목욕을 하였다. 처음에는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가니 차가움이 뼈를 깎는 듯하다가 날마다 그렇게 하자 한달 남짓 지난 뒤에는 그 물이 차츰 온천(溫泉)과 같아졌다. 갑자기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찬물에 급히 들어가 앉으면 몸에 해롭다”라고 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천령(天靈)께서 가르쳐준 것임을 알아채고는 이윽고 목욕을 중지하였다.
이듬해인 임술년(1862년) 정월에 대신사는 한울님을 외우고 주문(呪文)을 송독(誦讀)하였는데 밤에도 기름에 불을 붙여 계속하였다. 등불을 켤 기름이 반종지기밖에 남지 않았지만 스무 하루 밤을 태웠는데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영덕(盈德) 사람 이경중(李敬仲)이 1병의 기름을 보내주었는데 이날 저녁에 전에 모아둔 반종지기의 기름이 갑자기 바닥났다.
3월에 대신사는 마음속으로 제세주가 호남(湖南)에서 집에 돌아온 것을 알아채고는 즉시 가정리(柯亭里)로 가서 제세주의 조카인 최세조(崔世祚)에게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하자 길을 돌려 경주부(慶州府) 부근으로 가서 이무중(李武仲)에게 물었는데 그의 대답도 최세조와 똑같았다. 이에 속으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고는 길을 가는 도중에 묵념(黙念)을 하자 제세주가 현(縣)의 서쪽에 사는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틀림없이 계셨다. 이에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니 제세주가 주문을 굴리는 소리가 낭랑하게 귀에 들려왔으므로 몹시 기뻐하면서 나아가 뵈었다.
6월에 대신사는 포덕(布德)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그 비용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는데 본군(本郡)에 사는 벗 김이서(金伊瑞)가 120포(包)의 나락[租]을 기증하였다. 그리하여 영해(寧海)・영덕(盈德)・상주(尙州)・흥해(興海)・예천(醴泉)・청도(淸道)의 신사(紳士)들이 모두 앞다투어 와서 옷을 걷어 부치고 날마다 강도(講道)하고 포덕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검악(劒岳)에서 포덕한다는 설(說)이 비로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어 의젓하게 제2의 장석(丈席)을 차지하였다.
대신사가 일찍이 밤에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혜광(慧光)이 저절로 비추어 마복동(馬伏洞)의 어린 좀도둑이 벽을 뚫고 금(金)을 훔쳐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을 시켜서 탐지하게 해보니 과연 그대로 들어맞았다.
같은 해 10월에 관아의 하예(下隸) 30여 인이 관아의 명령이라 칭하고 체포하면서 포학한 짓을 자행하였다. 대신사는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그들이 거짓으로 칭탁한 것을 알아채고는 생마(生麻) 30가닥으로 하예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이 손쉽게 꽁꽁 묶어버렸다. 하예들이 두려워하여 사실대로 승복하면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으므로 마침내 풀어주고 타일러서 보냈다. 이에 향리(鄕里)에 “검곡에 최장사(崔壯士)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전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교도(敎徒)들이 더욱 그 행적을 기이하게 여겼으며 믿고 우러르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계해년(1863년)에 대신사는 제세주의 명을 받들어 먼저 영덕과 영해 등지에 가서 포덕하였다. 여러 교도들과 함께 진리(眞理)를 강연(講演)하였는데, 그 때에 박춘언(朴春彦)이 섭령(攝靈)하여 옷을 벗고 마침내 귀복(歸服)하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처음의 적자(赤子)일 때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고, 기(氣)를 올바르게 하는 것은 뱃속에 있을 때의 일기(一氣)를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빼앗기지 않고 지니지 않는 것이다.

주석
현해(懸解) 이치를 깊이 안다는 뜻.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때마침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였기 때문이고, 때마침 세상을 떠난 것은 갈 때였기 때문이니, 태어나는 때를 편안히 하고 죽는 때에 순함에 처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의 감정이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니, 옛날에 이것을 일러 상제가 매달려 있는 것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古者 謂是帝之懸解]”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장석(丈席) 학덕(學德)이 높은 사람이 남들의 스승이 됨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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