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1865년) 정월에 처자식을 이끌고 울진군(蔚珍郡) 죽병리(竹屛里)로 이사하여 우거(寓居)하였고, 제세주의 가족들을 모시고 와서 한솥밥을 해먹으며 살았다. 당시에 제세주의 아들인 최세정과 최세청의 나이가 모두 어려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는데 대신사가 힘을 다해 거들어 주었고, 매번 제세주의 부인을 찾아뵐 때마다 자기 어머니를 대하듯이 친절하게 대하여 무릇 말을 주고받는 때에 항상 ‘큰댁[大宅]’이라고 칭하였다.
병인년(1866년)에 남을 모함하고 몰래 살피어 뒤를 밟는 자들이 날로 더욱 많아지자 대신사는 마침내 영양군(英陽郡) 용화동(龍化洞)으로 이사하여 영원히 산을 나가지 않기로 마음속에 맹세하였다.
3월 10일은 곧 제세주가 재난을 당한 지 2주기(週期)가 되는 날이었는데, 대신사는 상주(尙州)의 도인(道人) 황문규(黃文奎)・한진우(韓振祐)・황여장(黃汝章)・전문여(全文汝) 등과 더불어 경건하게 예식(禮式)을 설행하였다. 7월에는 제세주의 부인이 그 아들과 딸을 데리고 뒤따라 용화동으로 오니 대신사는 자기 집을 제세주의 부인에게 드려 그곳에서 살게 하고 자기는 즉시 나가 다른 집에서 살았다. 〈대신사는〉 낮에는 땔나무를 하고 밤에는 새끼줄을 꼬아 어렵게 고생하면서 살아갔고 지성(至誠)으로 주문을 염송(念誦)하여 느긋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조금도 외물(外物)에 이끌리거나 우울한 기색이 없었다.
이해 8월에 미국(美國)의 함선(艦船)이 강화도(江華島)에 들어와 전국이 소란하였는데, 각지의 도유(道儒)들이 대신사가 있는 곳을 수색하였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10월 28일에 제세주가 강생(降生)한 생일 다례(茶禮) 때 문하의 제자인 강수
정묘년(1867년) 봄 2월에 대신사는 다시 가족을 이끌고 예천군(醴泉郡) 수산리(水山里)로 이사하였다. 제세주의 부인을 상주 동쪽의 관암(關巖)으로 보내드렸는데, 뒤를 쫒는 자들이 많은 까닭에 부인이 연루되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무진년(1868년) 봄 3월에 영양군 일월산(日月山)의 죽현(竹峴)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기사년(1869년) 봄 2월에 양양군(襄陽郡)의 도유(道儒) 김희경(金喜慶)과 김경서(金慶瑞)가 대신사를 찾아와 뵙고 수도(修道)하는 절차를 듣고 싶다고 하였다. 대신사가 그들의 연원(淵源)을 묻자, 두 사람은 대답하였다. “공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