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년(1870년) 겨울 10월에 대신사는 죽현(竹峴)에 있었다. 이보다 앞서 유적(流賊)이필제(李弼濟)가 성(姓)을 바꾸고 영해(寧海) 지방으로 도망하여 숨어 지내면서 몰래 형세를 타서 잇속을 챙기고 화(禍)를 즐기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계획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유(道儒)라고 사칭하고 선사(先師, 崔濟愚)를 신원(伸寃)한다고 하면서 같은 군(郡)에 사는 이인언(李仁彦)을 대신사에게 몰래 보내어 고하였다. “지난 계해년(1863년)에 일찍이 용담장석(龍潭丈席, 崔濟愚)에게 도를 받았고, 그로 인해 지리산(智異山) 속에 은거하다가 선사께서 재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를 누를 수 없습니다. 기어이 원통함을 풀고자 하오니, 부디 선생께서는 잠시 높으신 지체를 굽히시어 친히 가르침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속으로 ‘용담의 문도(門徒) 중에 애당초 그런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는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미년(1871년) 정월에 이르러 유적 이필제가 또 영해(寧海)・영덕(盈德)・상주(尙州)・문경(聞慶) 등지의 여러 도유들을 선동하여 앞장서서 말했다. ‘용담의 문도가 된 자들은 하루라도 갑자년에 선사께서 난을 당하신 원통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여러번 대신사에게 만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대신사는 더욱 굳게 거절하였다. 이해 2월에 이필제가 또다시 도유 권일원(權一元)을 대신사에게 보내 한번 만날 것을 전후로 모두 다섯 번이나 끈질기게 강요하였다. 대신사는 비록 선사를 신원할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유적 이필제로 하여금 마음을 돌려 신복(信伏)하게 하려고 그를 찾아가 만났다.
유적 이필제는 깜짝 놀라 기뻐하며 말했다. “저는 선생과 비록 평소에 교분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동문(同門)이나 마찬가지이니, 선사를 공경하고 받들며 신설(伸雪)하려는 마음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가 병인년(1866년)의 양요(洋擾)를 겪은 뒤부터 민심이 걱정과 두려움에 차 있어서 안정되지 않고 법령이 가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형편입니다. 저의 견식(見識)이 비록 보잘 것이 없지만 천시(天時)의 변천을 대략이나마 살펴보고 도운(道運)의 융체(隆替)를 개략적으로나마 추측하여 이미 동지(同志)들과 더불어 계획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만약 한번 거사(擧事)를 하기만 하면 선사의 원통함을 풀 수 있고 민생(民生)을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사의 유훈(遺訓)에도 ‘동쪽에서 일어나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동학(東學)이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살고 있는 영해(寧海)는 곧 우리 동국(東國)에서도 동쪽이니 그 잠부(潛符)와 밀증(密證)이 시기(時機)와 딱 맞아떨어집니다. 3월 10일이 곧 그날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는 그 말이 터무니없음을 듣고 그 행동거지가 불궤(不軌, 법이나 도리를 지키지 못함. 또는 반역을 꾀함)하다는 것을 살피고는 부드러운 말로 타일렀다. “그대가 선사를 위하여 설원하려는 것은 감격스럽지 않은 일이 아니지만, 우리 도는 무위(無爲)로서 교화(敎化)하는 도이고, 또 한울님을 섬기고 선사를 숭봉하는 방도는 성(誠)・경(敬)・신(信)으로써 수심정기(守心正氣)하는 것이 종지(宗旨)이다. 그러므로 막힌 것과 정체된 것을 구제하는 일은 반드시 그러할 날이 앞으로 있을 것이다. 그대는 부디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살면서 도를 닦아 시기를 기다리고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대신사는 즉시 돌아갔다.
그 뒤 3월 10일에 필적이 도당(徒黨) 500여 명을 불러 모아 단(壇)을 설치하고 예식을 갖추어 치성식(致誠式)을 거행하고 고유문(告由文)을 올렸다. 그리고는 이날 밤 중반쯤이 되자 갑자기 불을 지르고 관부(官府)에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였다. 필적은 무리 여러 명을 직접 거느리고 곧장 관부의 청사로 들어가서 지부(知府)를 묶어오게 하여 죄를 일일이 따졌다. 그 때에 본부(本府)의 별포(別砲)가 그들을 반격하여 총을 쏘았는데, 그로 인해 관인(官印)을 교체한 지부(知府)가 끝내 해를 당하였다. 필적이 그 틈에 빠져나와 영양군 일월산으로 달아나자 관군이 사방을 포위하며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필적의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필적은 다시 몸을 빼서 도망쳤다. 순찰사(巡察使) 김공현(金公鉉), 안핵사(按覈使) 안동부사(安東府使) 박제관(朴齊寬) 및 영덕현령(盈德縣令) 정세우(鄭世愚)가 각기 감영의 군졸과 군(郡)의 하예(下隸)를 풀어 사방을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니, 가는 곳마다 연루되어 졸지에 참사(慘死) 당한 도유(道儒)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울진(蔚珍)의 남기상(南基祥)・김동규(金東奎) 외 친족 4인과 영해(寧海)의 박사헌(朴士憲) 형제와 권일원(權一元) 부자(父子), 박양언(朴良彦)・박지동(朴知東)・유덕일(柳德一)과 영덕(盈德)의 임만조(林晩祚)・구일선(具日善)・강문(姜汶)・김기호(金基浩)와 청하(淸河)의 이국필(李國弼) 형제와 흥해(興海)의 박황언(朴璜彦), 경주(慶州)의 이사인(李士仁)・김만춘(金萬春・) 정치선(鄭致先)과 영양(英陽)의 장성진(張星進・) 김용운(金龍雲) 형제와 최준이(崔俊伊) 등 100여 명이다. 그밖에 유배를 당하거나 혹은 도망하여 살아난 자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 대신사는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는 길을 걸어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단양(丹陽) 정석현(鄭錫鉉)의 집에 이르러 성과 이름을 바꾸고 남의 머슴살이를 하였다. 이 해 5월에 강수(姜洙)가 영춘(永春)에서 찾아와 대신사의 곤궁함을 안타깝게 여기고는 이어 영월군(寧越郡) 정진일(鄭進一)의 집으로 모시고 가서 의탁하였으므로 대신사는 마침내 강수와 더불어 보첩(譜牒) 상의 형제가 되었다. 영양(英陽) 사람 황재민(黃在民)이 대신사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아무 때건 항상 들러서 대신사를 좇았다.
당시에 대신사의 부인 손씨(孫氏)가 혼자 집에 있었는데 어느 날 여러 명의 관청 하예들이 찾아와 매우 다급하게 수색을 하자 마을이 술렁거렸다. 이에 부인이 나가서 관청 하예들에게 말했다. “불행의 씨는 제 남편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화(禍)가 동네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그 허물을 누가 지겠소.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오. 차라리 내가 제 발로 감옥에 나아가겠소”라고 하였다.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침내 본군에 들어가 갇히었다.
같은 해 8월에 이필적(李弼賊, 李弼濟)이 다시 정기현(鄭基鉉) 등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한 나머지 무리들을 모집하여 재기(再起)하려다가 문경(聞慶)에서의 내홍(內訌)이 일어나 마침내 복주(伏誅)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필적(弼賊, 李弼濟)이 고약한 마음으로 품었던 화(禍)가 영남・충청・강원・경기 각도의 제포(諸包)에까지 파급되어 거의 모두가 두려워 벌벌 떨면서 마음 놓고 지낼 겨를이 없었다.
대신사는 강수와 함께 피신하여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낮에는 풀을 밟으며 길을 다니고 밤에는 이슬을 맞으며 노숙하다가 바위굴 하나를 찾아내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진 지가 무릇 13일이나 되자 오로지 나뭇잎을 따서 깨물어 먹으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 무렵에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항상 와서 보호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말했다. “너는 산군(山君, 호랑이)이거늘 어찌하여 여기 와서 나를 보호하느냐?”라고 하였다.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마치 기뻐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었다.
어느 날 어떤 나무꾼이 와서 물었다. “존객(尊客)께서는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대답했다. “나는 본시 영남 사람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을 유람하였는데 돌아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바야흐로 이곳에 눌러 앉아 고생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무꾼은 망태 속에서 탈속반(脫粟飯) 서너 숟가락을 떠내어 먹으라고 주었다. 이튿날 나무꾼이 또 어제처럼 찾아와서 밥을 주었다. 대신사가 그 성명과 사는 곳을 물어보니 나무꾼이 말하기를, “이놈은 영월군 직곡리(直谷里)에 사는 박용걸(朴龍傑)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사나흘 지낸 뒤에 산을 내려가 그를 찾아갔다. 박용걸은 마침 바깥에 나갔고 단지 노인네 한 분이 반갑게 맞아들였다. 예를 마치고는 저녁밥을 정성들여 갖추어 올렸는데 향과 정갈한 맛이 오래 기억할 만 하였다. 노인네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조금 있다가 자기 처(妻)의 말을 전하였다. “돌아가신 시아버지께서 유훈(遺訓)을 남겼는데 ‘내가 죽은 뒤 몇 년 후에 과객(過客)이 우리 집에 찾아올 것이니 그를 정성을 다해 공양(供養)하면 영원히 후손을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존객(尊客)의 행색(行色)을 살펴보니 보통 사람보다 한결 뛰어나니 곧 때를 만나지 못한 군자(君子)이십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은 이어 족보상으로도 형제가 되어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하자고 청하였다. 대신사는 기뻐하며 승낙하고는 마침내 그 집에서 49일의 재(齋)를 설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