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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일러두기

임신년(1872년) 정월 3일에 대신사는 「참회문(懺悔文)」을 스스로 짓고 한울님에게 제사를 지내 고하고 강수(姜洙)와 함께 상주(尙州) 동쪽 관암(關巖)의 우사(寓舍)로 가서 제세주의 부인을 찾아가 뵈었다. 제세주의 부인은 병이 들어 침상에 누워 지내고 땔나무와 식량은 바닥이 난 상태였는데, 대신사가 부인을 위하여 주선하여 도와 주었다. 이때 마침 제세주의 맏아들 최세정(崔世貞)이 양양군(襄陽郡)에서 체포되어 온 집안 식구들이 겁을 먹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세주의 부인은 “화(禍)가 곧 닥칠 것인데 어찌하면 좋을꼬?”라고 말했다. 대신사는 강수와 함께 약간의 살림 도구만 수습하여 각자 등에 지고 머리에 얹었다. 제세주의 부인과 두 어린애는 남자 복장으로 분장한 뒤에 밤을 틈타 길을 출발하여 박용걸의 집으로 갔다. 앞으로 살아갈 대책은 홍석범(洪錫範)・유인상(劉寅常)・안시묵(安時黙)・김경순(金敬淳) 등에게 맡겨 부탁하여 가까스로 끼니를 이어갈 수 있었다.
같은 해 3월 10일의 향례(享禮) 때에 대신사는 또 「참회문」을 지어 한울님에게 스스로 자신을 탓하고 경건하게 고하였다. 영월군의 행수포교(行首捕校)인 박모가 평소부터 음흉하고 매우 사나운 자였는데 대신사가 박용걸의 집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기어이 체포하여 공을 세우려고 하였다. 영월군의 수연(首椽)인 지달중(池達中)이 힘껏 저지한 덕분에 다행히 그 화(禍)를 면하였다. 이날 밤에 본군의 소밀원(蘇密院)에 사는 도인(道人) 장기서(張基瑞)는 꿈속에 제세주가 잠시 왔다가 금새 길을 출발하면서 말하기를, “신탁(信托)할 일이 있다”라고 하고는 바야흐로 지달중의 집으로 향하였다. 장기서가 꿈에서 깬 뒤에 그 꿈의 내용을 대신사에게 고하였다. 대신사는 강수와 함께 지달중에게 가서 고맙다고 하였고, 지달중은 그 신명(神明)함을 경이롭게 여겨 이로부터 도를 받고 더욱 믿고 우러렀다.
대신사는 제세주의 차자(次子) 최세청(崔世淸) 및 강수와 함께 양양군으로 가서 최세정의 옥사(獄事)를 은밀히 탐지해보니 현재 한창 계속해서 형신(刑訊)을 하는 중이었으므로 줄줄이 연루되는 화가 생길까 걱정하였다. 대신사는 드디어 최세청과 강수를 데리고 밤낮없이 길을 바쁘게 달려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무의매리(舞依梅里) 김병내(金秉鼐)의 집으로 가서 의탁하였다.
제세주의 부인은 관암(關巖)에서 영춘군(永春郡) 장건지리(長建地里)로 잠시 거처를 옮겨 몸을 붙이고 살았다. 이달 초순 무렵에 김연국(金演局)이 비로소 대신사를 찾아뵙고는 즉시 몸을 드려 제자(弟子)의 예를 갖추었다. 대신사는 사흘을 묵은 뒤에 마침내 김연국 및 최세청과 함께 이리저리 다니다가 충청도 영춘군 남면 의풍리(儀豊里)에 임시거처를 마련하였다.
같은 해 4월에 대신사는 강수와 함께 정선군(旌善郡) 무은담리(霧隱潭里) 유인상(劉寅常)의 집으로 갔다. 유인상이 반갑게 맞이하여 이틀 밤을 묵은 뒤에 대신사는 연못의 물고기에게까지 재앙이 미칠까 우려하여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하였다. 유인상이 강력하게 만류하며 말했다. “자취가 만약 드러나면 두 어르신은 명거(冥擧)할 수 있고 저는 비록 붙잡혀 가더라도 그 형벌이 찬배(竄配, 流配)하는 정도에 불과할 터이니 무슨 우려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는 그가 후덕하고 보살펴주는 것이 고마워서 그대로 강수 및 전성문(全聖文)과 더불어 후원(後院)의 으슥하고 후미진 방에서 지냈고 칠칠일재(七七日齋)를 설행하였다.
5월 12일에 제세주의 큰아들 최세정이 양양군의 감옥에서 장형(杖刑)을 당하여 죽었고 그 나머지 김덕중(金德仲)이일여(李逸如・) 최경선(崔慶善) 등은 먼 곳에 유배되었으며 제세주의 둘째 딸과 최세정의 처(妻)는 모두 인제군의 감옥에 갇혔다.
금번 이 최세정의 일은 대체로 도인(道人) 김덕중이 포졸(捕卒)을 사주하여 갑자기 장춘보(張春甫)의 집에 들이닥치게 하여 잡아가도록 앞장섰기 때문에 벌어졌다. 엎어진 새둥지 아래에 비록 성한 새알이 없다지만 한 집에 사는 사람이 창을 들고 들이닥쳤으니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한다는 말인가.
이 때 대신사는 의풍리에 잠시 몸을 붙이고 살고 있었다. 정선(旌善)의 도인 신정언(辛定彦)・신처서(辛處瑞)・홍문여(洪文汝)・유계홍(劉啓弘)・최영하(崔永夏)・김해성(金海成)・방자일(房子一)・안순일(安順一)・박용걸(朴龍傑)과 인제(麟蹄)의 도인 김병내(金秉鼐), 영월(寧越)의 도인 장기서(張基瑞)와 기타 최중섭(崔重燮)・박봉한(朴鳳漢)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힘을 내어 도와주면서 항상 신경을 써주고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다.

주석
행수포교(行首捕校) 행수(行首)는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의 우두머리로, 행수 포교는 곧 포교(捕校) 중의 선임자를 말한다.
수연(首椽) 각 관아에 소속된 구실아치를 연리(椽吏)라고도 부르는데, 수연(首椽)은 그들의 책임자인 이방(吏房) 등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그들이 사무를 보는 작청(作廳)을 연청(椽廳)이라고도 한다.
백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당하게 되리라는 말이다. 송(宋)나라 성문에 불이 났을 때, 그 옆에 있는 연못의 물을 퍼서 불을 끄는 바람에, 연못의 물이 고갈되어 물고기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성문실화 앙급지어(城門失火 殃及池魚)’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칠칠일재(七七日齋) 사람이 죽은 뒤 49일 동안은 넋이 중간에 머물러 내생(來生)에 아직 태어나지 않는다 하여 이 사이에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불사(佛事)를 7일마다 올리는데, 마지막 곧 죽은 뒤 49일째의 불사를 칠칠재라 한다. 칠칠재(七七齋) 또는 사십구재(四十九齋)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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