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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6장 태백산에서 도를 강론하다[第六章 太白講道]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73년 10월 00일
일러두기

이듬해인 계유년(1873년) 겨울 10월에 대신사는 강수(姜洙)・유인상(劉寅常)・전성문(全聖文)・김해성(金海成) 등 수십 인을 데리고서 재(齋)를 올릴 양식을 싸들고 태백산(太白山) 갈래사(葛來寺)의 적조암(寂照庵)에 들어갔다. 주지승(主持僧) 철수좌(哲首座)가 예를 갖추어 맞아 들이고는 토란을 구워 올렸는데 향이 담담하여 먹을 만하였다. 밤이 이슥해지자 대신사가 철수좌에게 말했다. “입산(入山)하여 경건하게 기도하는 것은 각기 발원(發願)이 있기 때문이지만, 도과를 이룬 뒤에는 검고 흰 것이 모두 마찬가지다. 내가 공부한 것은 단지 칠칠영주(七七靈呪)만 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큰 소리로 장송(莊誦)하였다. 철수좌는 기쁘고 반가움을 누르지 못하고 성심껏 공양(供養)하여 재(齋)를 잘 마치었다.
대신사는 이로 인해 점괘를 뽑고 차례로 구(句)를 얻었다. 그 구에 이르기를, “태백산에서 공부한 지 49년 만에 나의 여덟 봉새 받아 각기 주인을 정하였네. 천의봉 위는 꽃 핀 하늘인데 오늘에야 오현금을 탁마하고 적멸 궁전에서 세상 진념 벗어났네[太白山工四十九 受我鳳八各主定 天宜峰上開花天 今日琢磨五絃琴 寂滅宮殿脫世塵]”라고 하였다.
재를 마친 날에 대신사는 전성문에게 하여금 궁을부도(弓乙符圖, 弓乙篆)를 부지런히 그리게 하였다. 철수좌는 곁에서 바라보다가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는 합장(合掌)한 채 아뢰었다. “제가 일찍이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에 살면서 말라죽은 나무처럼 꼿꼿이 앉은 채로 수도(修道)를 하였는데, 밤에 꿈속에서 여래세존(如來世尊)이 나타나시어 이르기를, ‘너는 소백산으로 가거라’고 하시기에 꿈에서 깨어나 이상히 여겼습니다. 올해 4월에 소백산 부석사로 거처를 옮겼는데 세존이 다시 꿈에 나타나시어 이르기를, ‘너는 다시 태백산으로 가거라’고 하시기에 저는 이윽고 다시 이곳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꿈속에 두 길손이 나타나 여래불(如來佛)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절을 하더니 오늘 두 존객(尊客)을 보니 영낙없이 꿈속에 본 사람과 똑같습니다. 어찌 숙세[宿世, 전생(前生)]의 깨끗한 인연[淸緣]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가 말했다. “나도 입산한 초기의 꿈속에 여덟 마리 상서로운 봉새가 하늘에서 내려와 차례로 너울너울 내 앞에 모여들기에 속으로 매우 기이하고 사랑스러워 손으로 그 중 세 마리를 껴안았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도 한 마리씩 껴안았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다섯 마리 봉새는 각기 그 주인이 있으니 네가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가 그 주인이 오기를 기다려 주어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그 일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강수(姜洙)도 말했다. “저도 간밤의 꿈에 하늘의 선인(仙人)이 보였는데 상청(上淸, 하늘)으로부터 내려와 벽을 등지고 앉기에 저는 경례를 올리고 바닥에 이마를 대어 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절을 한 불상(佛像)이 전에 본 하늘의 선인과 매우 닮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철수좌는 그 얘기를 듣고는 더욱 이상하게 여겨 말했다. “후세에 반드시 선도(仙道)와 불도(佛道)가 나란히 일어나서 그 교리(敎理)를 넓게 펼칠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철수좌는 또 말했다. “존객께서는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면서 아직 정해두고 살 곳이 없으며 행장을 보니 꽤 민망합니다. 단양군(丹陽郡)도솔봉(兜率峰) 아래가 그럭저럭 서식(棲息)할 만 하니 모쪼록 경성(警省,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깨우쳐 돌아보고 살핌)과 주상(注想, 사념에 몰입하는 일)에 힘을 쓰시고 이 늙은 중의 말을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12월 9일에 대신사는 정선군(旌善郡) 유인상(劉寅常)의 집에 있다가 제세주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訃音)을 듣고 즉시 김계악(金啓岳)과 함께 가서 애도를 표하고 무릇 함염(含殮, 飯含・殮襲) 등의 장사(葬事)를 예법에 맞게 치루어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각포(各包)의 도인들에게 부음을 알렸다. 당시에 제세주의 부인은 장건(長建)에서 살다가 이곳저곳을 거쳐 같은 고을의 미천리(米川里)로 이사하였고 그대로 세상을 등진 것이다. 이 무렵 대신사는 영춘군(永春郡) 장항리(獐項里)에 가서 박용걸의 집에서 연말을 보냈다.
이듬해인 갑술년(1874년) 2월에 대신사는 철수좌(哲首座)의 납의(衲衣)한 벌을 만들어 가지고 적조암으로 찾아갔다. 당시에 철수좌는 한창 병이 들어 열흘 남짓 침상에 누워 지내다가 자기 옷을 만들어 입게 해준 것을 고마워하고 슬픔과 기쁨이 한꺼번에 밀려들더니 그 이튿날에 그대로 시적(示寂, 涅槃, 寂滅)하였다. 대신사는 승도(僧徒)들과 더불어 화화(化火, 茶毘)의 예를 거행하고는 돌아오다가 미천리(米川里)의 제세주 부인이 예전에 살던 곳으로 갔다. 그 뒤 2월 19일에 제세주 부인의 장례를 거행하여 미천리의 우거하던 곳과 가까운 산기슭에 안장(安葬)하였다. 그 당시 장례에 모인 자들은 홍순일(洪舜一)・전성문(全聖文)・유인상(劉寅常)・최진섭(崔振燮)・신석현(辛錫鉉)・박봉한(朴鳳漢)・홍석도(洪錫道)・유택진(劉澤鎭) 등이다.
대신사는 이윽고 문도인 김연국(金演局) 및 김병내와 김연순과 홍순일(洪舜一) 등을 데리고 단양군 남면 도솔봉 아래의 절동[寺洞]으로 갔는데, 이는 철수좌가 얼마 전에 헤어지면서 권유하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3월에 대신사는 측실(側室) 안동김씨(安東金氏)를 들였다. 이는 본부인 손씨(孫氏)가 난을 당한 동안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사는 김연국과 홍순일에게 명하여 집 뒤의 조용하고 후미진 곳에 초가집 하나를 짓게 하고 칠칠일재(七七日齋)를 설행하였다.
을해년(1875년) 정월에 대신사의 큰아들 최양봉(崔陽鳳)이 태어났다.
2월에는 또 같은 군(郡)의 송고동(松皐洞)으로 이사하여 우거(寓居)하였다.
8월 15일에 정선군의 여러 도인들이 별도로 치성제(致誠祭)를 설행하면서 어육(魚肉)을 교차로 진설(陳設)하였다. 예식을 거행할 때가 되자 대신사가 강화(降話)의 말씀을 받들어 “어육을 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어육 제품(祭品)을 모두 치워 없애고 청수(淸水)한 그릇만 봉헌(奉獻)하였다. 그 뒤로 향례(享禮)와 다례(茶禮)를 막론하고 어육을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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