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대신사는 설법(設法)의 일로 정선군의 여러 도인들에게 글로 유시(諭示)하였는데 같은 달 28일에 기약한 때가 되자 일제히 모였다. 대신사는 자기가 직접 법관(法冠)과 법복(法服)을 만들어 설법제(設法祭)를 처음으로 설행하였다. 이는 도가(道家)의 의복 제도를 모방하여 변통(變通)한 것이었다. 그 법관 및 법복의 양식(樣式)과 참배(參拜)한 인원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법관은 사방이 둘러싸인 형태로 높이가 3층(層)이고 중간의 덮개는 정원형(正圓形)이며 전후(前後)는 나뭇잎처럼 둥글되 약간 오므려진 모양이다. 좌우(左右)는 잎새처럼 뽀족하되 약간 나지막하다. 색깔은 자색(紫色) 또는 흑색(黑色)으로 안쪽은 남색(藍色) 주단(綢緞)이 덧대어 있으되 정해진 색깔은 없다. 법복은 정사폭(正邪幅)으로 앞쪽은 5자(尺)이고 뒤쪽은 4자인데 소매의 직경이 1자 3치(寸)이고 세로의 길이는 7치이다. 소매의 뒤쪽은 곧바로 전후폭(前後幅) 양쪽을 잇대어 꿰맨 중간에 달라붙어 있고 소매 입구 크기는 겨우 손을 뒤집을 수 있는 정도이다.
법대(法帶)는 너비가 2치이고 둘레는 2자 남짓이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 단추를 묶어 앞쪽으로 두 가닥을 늘어뜨리는데 너비도 그렇게 하되 길이는 몸에 맞추고 색깔은 순흑색(純黑色)이다.
초헌(初獻)은 대신사, 아헌(亞獻)은 강수(姜洙), 종헌(終獻)은 전성문(全聖文), 대축(大祝)은 유인상(劉寅常), 집례(執禮)는 박규석(朴奎錫), 봉향(奉香)은 김영순(金永淳), 봉로(奉爐)는 김연국(金演局) 등이다.
예식이 끝나자 대신사는 강화(降話)의 말씀을 받들어 말했다. “내게 12개의 ‘시(時)’자 및 12개의 ‘활(活)’자가 있다. 우리들 세 사람이 먼저 ‘시’자로 이름을 고치고 ‘활’자로 자를 고치고서 한울님의 명을 공경히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강수・유인상과 더불어 나란히 이름을 바꾸었다.
제세주의 둘째아들 최세청이 죽은 후 제세주의 생신 아침의 다례(茶禮)와 돌아가신 날의 향사(享祀)를 대신사가 전담하여 받들어 설행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또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설법제(設法祭)를 거행하였는데 세 가지 색깔의 채색 명주(明紬, 彩纁)를 썼다. 3자(尺) 3치(寸)의 폐백(幣帛)을 만들고 세 가지 색깔의 소찬(素饌)을 진설(陳設)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참배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헌은 도접주(道接主) 유시헌(劉時憲), 아헌은 신석현(辛錫鉉), 종헌은 홍석범(洪錫範), 집례는 최진섭(崔振燮), 대축은 신봉한(辛鳳漢)・홍석도(洪錫道)・전세우(全世祐)・최기동(崔箕東)・유택진(劉澤鎭)・김원중(金源仲) 등이다.
병자년(1876년) 4월에 또 인제군 김연호(金演鎬)의 집에서 설법제를 거행하였는데 이때 참배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초헌은 접주(接主) 김연호, 아헌은 장춘보(張春甫), 종헌은 이은보(李殷甫), 집례는 김연국(金演局), 대축은 김종여(金宗汝), 봉향은 김경식(金卿植), 집사(執事)는 김관호(金寬浩)・이윤희(李允喜) 등이다.
같은 해 7월에 부인 손씨가 송고동(松皐洞)에 와서 모였다. 대신사는 재난을 당한 뒤로부터 손씨 부인과 서로 헤어져 지낸 지가 모두 6년으로, 소식이 갑자기 끊겨 생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부인이 갖은 고생을 하며 물을 건너고 험한 길을 걸어서 느닷없이 찾아오자 대신사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내가 형적(形迹)을 감추고 이곳에 숨어 지낸 지가 꽤 여러 해가 되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인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오?”라고 하였다. 부인이 대답했다. “꿈에 선동(仙童)이 나타나 길을 인도해 주어서 가리키는 대로 따라왔고 어려움이 없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축년(1877년) 겨울 10월 3일에 처음으로 구성제(九星祭)를 거행하였다. 향폐(香幣)와 향수(享需)를 성대히 진설하였는데, 헌관과 아홉 명의 집사(執事)는 아래와 같다.
초헌은 대신사 및 강수(姜洙)・김시원(金時元), 아헌은 유시헌(劉時憲)・김경화(金敬和)・심시정(沈時貞), 종헌은 김연국(金演局)・장춘보(張春甫)・김치운(金致雲), 집례는 장인호(蔣麟鎬), 대축은 김영순(金永淳), 봉향은 김문여(金文汝), 봉로는 안교백(安敎伯), 봉촉(奉燭)은 최창익(崔昌翼), 제물유사(祭物有司)는 유인형(劉寅享), 진설(陳設)은 윤종현(尹宗賢), 찬인(贊引)은 안교상(安敎常), 알자(謁者)는 김세필(金世弼), 집사는 허찬(許燦)・최기동(崔箕東)・안교일(安敎一) 등이다.
같은 달 16일에 대신사는 또 정선군 유시헌(劉時憲)의 집에서 구성제(九星祭)를 거행하였다. 또 문도들과 더불어 구성계(九星契)를 마련하여 해마다 한번씩 모여 스승을 높이는 뜻을 드러내기로 하였다. 그 제관(祭官) 및 계원(契員)은 다음과 같다.
초헌은 유시헌(劉時憲)・신시영(辛時永)・홍시래(洪時來), 아헌은 신시일(辛時一)・최시경(崔時敬・) 방시학(房時學), 종헌은 안상묵(安尙黙)・유진택(劉鎭澤)・김원중(金源仲), 집례는 최창식(崔昌植), 대축은 홍석도(洪錫道), 봉향은 유경식(劉慶植), 봉로는 안교백(安敎伯), 봉촉은 최창익(崔昌翼), 집사는 허찬(許燦)・최기동(崔箕東)・안교일(安敎一)・최익섭(崔益燮)・안교강(安敎康)・전두원(全斗元)・전석두(全錫斗) 등이다.
계장(禊長)은 안상묵(安尙黙), 계원은 김응규(金應奎)・유시헌・신시영・방시일(方時一)・최창식・유택진(劉澤鎭・) 최창익・전석두・홍시래・최기동・홍석도(洪錫道・) 안교강(安敎康・) 김원중・안교일・윤종현・안교백・안교상・홍상의(洪尙義・) 신용한(辛龍漢・) 안교흥(安敎興・) 홍봉의(洪鳳儀)・안교룡(安敎龍・)이득룡(李得龍・) 최진섭(崔振燮)・유인형・유경식(劉慶植)・허찬(許燦)・전두원・최흥섭(崔興燮)・최익섭(崔益燮)・전세숙(全世叔)・전세필(全世弼)・전세인(全世仁)・박영근(朴永根)・노정식(盧貞植)・최재구(崔在九) 등이다.
무인년(1878년) 4월에 대신사는 김연국과 함께 경주군(慶州郡) 최향오
같은 해 7월에 대신사는 각포(各包)에 글로 유시하여 유시헌의 집에서 개접(開接)하도록 하였다. 제세주가 철접(輟接)한 뜻을 이어 받아 이때에 다시 연 것이다.
이 달에 넷째 딸 정주현(鄭周鉉)의 며느리가 태어났다.
기묘년(1879년) 윤(閏) 3월 초길일(初吉日)에 대신사는 김연국・강시원
제세주는 대신사가 입은 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는 옆에서 모시는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릇 사람이 입을 것과 먹을 것은 정해진 분수가 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의 옷은 어떻게 이렇게 너덜너덜하고 그대의 옷은 어떻게 이렇게 곱고 화려한가. 집우(執友)를 서로 돕는 의리로 보아 어찌 도움을 베풀 방법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부끄러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제세주는 잠시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대신사가 제세주의 의대(衣帶)를 우러러 바라보니 면(綿)과 마(麻)와 주(綢)의 색이 다른 세 가지를 층층이 가닥으로 매듭이 묶여 있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제세주가 말하기를, “이 허리띠를 그대에게 주겠다”라고 하고서는 풀어서 대신사의 허리에 매어 주었다. 이에 제세주는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개 세 사람이 특별히 상재(上才)를 받았는데, 아무개 다섯 사람이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다시 이와 같이 받을 것이고 그 외 20여 인은 후일에 또 차례대로 정해져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세주는 몸을 일으켜 대를 내려왔는데 대 아래에 문(門)이 4개 있었다. 그 대에는 20여 명이 있었고 중대(中臺)에는 1백여 명이 있었고 하대(下臺)에는 몇 명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세주는 북문(北門)에 이르러 큰 글씨로 “천문개탁자방문(天門開坼子方門)”이라는 일곱 글자를 문미(門楣)에 편액처럼 쓰고 세 번을 되풀이하여 입으로 외우고 세 번을 손으로 치자 소리가 우레처럼 컸다. 대신사도 따라서 쳤으나 고요할 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여 또 그 까닭을 물어보니 제세주가 말했다. “객(客)이 응당 소리가 있어야 하오. 곧 명하는 말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물었다. “왜 이렇게 서둘러 가십니까?”라고 하니 제세주가 대답했다. “내가 한울님에게 사뢸 일이 있는데 아직 못한 까닭에 이처럼 서둘러 돌아가오”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어떤 사람이 밖에서 갑자기 들어오더니 옷깃을 풀어헤치고 가슴을 드러낸 채 뵙기를 청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례하게 뵙자고 청하는가?”라고 하였다. 제세주가 말했다. “이 사람은 쓰일 데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허물을 탓하지 마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또 “한온포(寒溫飽)”라는 세 글자를 써서 주면서 말했다. “추울 때는 ‘온(溫)’자를 쓰고, 더울 때는 ‘한(寒)’자를 쓰고, 배고플 때는 ‘포(飽)’자를 쓰라”고 하고 또 말했다. “각각 장량(張良)・진평(陳平)진평(陳平)의 지혜와 한유(韓愈)・구양수(歐陽脩)구양수(歐陽脩)의 문장과 도주공(陶朱公)・의돈(猗頓)의돈(猗頓)의 재부(財富)를 주겠다”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꿈에서 깨어나 기이하게 여겨 말했다. “지금은 우리 도(道)를 크게 천명(闡明)할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인제군(麟蹄郡) 김현수(金顯洙)의 집으로 가서 여러 도유(道儒)들을 모이게 하여 설법제식(設法祭式)을 크게 거행하였다. 그 제원(祭員)은 다음과 같다.
초헌은 김계원(金啓元), 아헌은 장춘보(張春甫), 종헌은 김현수(金顯洙), 집례는 이윤희(李允喜), 대축은 김연국(金演局), 봉향은 이은보(李殷甫), 봉로는 김관호(金寬浩), 봉촉은 김종여(金宗汝), 찬인(贊引)은 김경식(金卿植), 집사는 장희용(張喜用) 등이다.
같은 해 4월에 대신사가 강시원에게 말했다. “이제 인등설법(引燈設法)을 거행하고 싶은데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하고 하니 강시원이 대답했다. “도중(道中)에서 해야 하는 모든 시행과 조처는 오직 대신사의 지시와 교시에 달려 있는데, 어찌하여 다른 사람에게 물으십니까?”라고 하였다. 대신사가 말했다. “교단(敎團)의 역량을 헤아리건대 크게 인등설법을 거행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먼저 작은 규모의 인등 설법을 시험삼아 설행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였다. 마침내 유시헌・홍시래・최시경(崔時敬)의 집에서 각각 똑같은 방식으로 인증설법을 거행하였다. 또 10월 11일 쯤에 최경화(崔慶華)・조시철(趙時哲)・홍석범(洪錫範)의 집에서 각각 계속해서 설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