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 대신사는 선사(先師)인 제세주(濟世主)의 유적편집소(遺蹟編輯所)를 방시학(房時學)의 집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탈고(脫稿)가 끝나자 인쇄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우선 도장을 날인(捺印)하여 단단히 봉해서 유시헌의 집에 소장하였다. 편집에 참여한 임원은 다음과 같다. 도를 받드는 제자가 외람되게 후학들을 훈도(薰陶)하는 반열에 참석하여 전발(傳鉢)의 은혜를 입고서 참마음으로 돌아가 배운 덕분에 거의 수련(修煉)을 하였습니다. 경신년(庚申年, 1860년) 여름의 운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나 갑자년(甲子年, 1864년) 봄의 변고는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습니다. 무극대도(無極大道)는 선생께서 강령(降靈)하신 날이었고 성심(誠心)한 조각은 제자로서 추원(追遠)하는 심정입니다. 오늘 좋은 날을 맞이하여 도량(道場)을 깨끗하게 마련하여 삼가 맑은 술과 몇 가지 음식을 올리노니 적지만 부디 흠향하옵소서. 대신사는 또 갑신년(甲申年, 1824년)에 대성인(大聖人)께서 강생(降生)한 원인 및 경신년(庚申年, 1860년)에 도를 받은 창운(昌運)과 갑자년(甲子年, 1864년)에 재난을 당한 액장(厄障)과 장래 도운(道運)의 형통(亨通)에 대하여 부연(敷演)해서 설명을 하였다. 하늘이 하민(下民)을 내리시어 그들의 임금을 만들어주고 그들의 스승을 만들어준 것은 오직 상제(上帝)를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임금은 예악(禮樂)으로 교화(敎化)하여 만민을 변화시키고, 법령과 형벌로 만민을 다스리고, 스승은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후생들을 가르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후생을 성취시키는데, 이것이 이른바 상제를 돕는 것이다. 아, 우리 동학도인은 이 글을 공경히 받을지어다. 파경(葩經, 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면 이에 보우(保佑)하실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고, 추성(鄒聖, 孟子)이 말하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하는 것이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늘을 믿고 정심정기(正心正氣)하여 하늘에 죄를 얻지 말고 진성진충(盡誠盡忠)하여 윗사람에게 죄를 얻지 말라는 것이다. 만물이 생장(生長)하는 것이 어찌 그러하고 어찌 그러한가. 조화옹(造化翁)이 거두고 깊이 간직한 것은 스스로 때가 있고 스스로 때가 있도다. 물의 근원이 깊으면 가뭄에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나무의 뿌리가 튼튼하면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는다. 도깨비[魍魎]도깨비[魍魎]가 낮에 출현하니 그놈이 무슨 심보인가 그놈이 무슨 심보인가. 겨울잠을 자는 벌레가 구멍에 숨어 있으니 또한 지각(知覺)이 있고 또한 지각이 있도다. 말라죽은 나무가 봄을 만나니 이때로다 이때로다. 불상(佛像)이 성인(聖人)을 보았으니 정성이고 정성일세. 알았도다, 알았도다. 성심(誠心)과 간교(姦姣)와 박잡(駁雜)을 알았도다, 알았도다. 그 주인이 된 자로서 삼가지 않을 수 있으랴. 늘 이것을 유념하여 상제를 도우면 매우 다행이고 매우 다행일세. 병술년(1886년) 2월에 대신사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당시에 서인주・황하일・박준관(朴準寬)・박도일(朴道一)・손천민(孫天民)・이관영(李觀榮)・권병덕(權秉悳)・권병일(權秉一)・박덕현(朴德賢)・서치길(徐致吉)・박치경(朴致敬)・송여길(宋呂吉)・박시요(朴時堯) 등 여러 도인들이 차츰 모여들어 계(戒)를 받고 도(道)를 신앙하였다. 무화설[无化說] 강화[降話]
같은 달에, 지난 정무년(丁戊年) 사이의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에 칠원(柒園)의 일이 이루어져 갑자기 태양이 시들어 떨어지고 천지가 암흑처럼 컴컴하여 어렴풋이 마치 진흙탕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았는데 멀리 바라보니 육지(陸地)였다. 이때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수많은 생령(生靈)들이 물고기처럼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찾는 불쌍한 정경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이 불쌍한 뭇 생령들을 어찌할까라고 탄식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인명(人命)은 지극히 중한 법이니 하늘이 어찌 보살피지 않으리오. 이에 중생(衆生)에게 이르기를, “이는 하늘에서 시킨 일이다. 하늘 외에는 기도할 곳이 없으니 한껏 마음을 다하여 축원(祝願)하라”고만 하였다. 이윽고 하늘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비치어 마치 태양이 거울에 비추듯이 맑은 광채가 하나로 합쳐지어 다시 태양이 되었고 천지가 환하게 밝아졌으니 곧 이것이 신세계(新世界)이다. 우음[偶吟]
건도(乾道)는 순환(循環)하여 그 기운이 하강하는데 춘색(春色)이 요요(夭夭)하여 만물을 기르고 변화시키는 덕을 펴네. 〈번역 : 김동현〉
도주(道主)는 해월대신사(海月大神師), 차도주(次道主)는 강시원(姜時元), 접주(接主)는 유시헌(劉時憲), 감인(監印)은 최기동(崔箕東・) 안경일(安敬一), 사서(司書)는 전세인(全世仁), 사필(司筆)은 안경상(安敬常), 사지(司紙)는 김원중(金源仲), 수찬(修撰)은 신시영(辛時永), 교감(校勘)은 신시일(辛時一), 소주(所主)는 방시학(房時學), 사접(司接)은 윤종현(尹宗賢), 사재(司財)는 홍시래(洪時來)・안교백(安敎伯)・최창식(崔昌植), 사통(司通)은 홍석도(洪錫道), 사책(司冊)은 신윤한(辛潤漢・) 안교강(安敎綱) 등이다.
경진년(1880년) 정월에 대신사는 강시원(姜時元)・김연국(金演局)・전시황(全時晄)과 함께 김연호(金演鎬)의 집에서 인등치성식(引燈致誠式)을 설행하였고, 뒤이어 김현덕(金顯德)의 집에서도 설행하였다. 2월에는 또 김진해(金鎭海)의 집에서 별도로 설행하였다. 4월 5일에 대신사는 창도기념예식(刱道紀念禮式)을 각포(各包)에서 개설(開設)하라고 명하였다.
같은 해 5월 12일에 대신사는 선사의 유적인간소(遺蹟印刊所)를 인제군 갑둔리(甲遁里)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설치하라고 명하여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기 시작하여 6월 14일에 그 일을 마쳤다. 대신사는 스스로 발문(跋文)을 지어 편질(篇帙)의 끝에 실었고 이튿날에 따로 치제(致祭)를 설행하여 고하였다. 그 인간소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소장(所長)은 대신사(大神師), 감인(監印)은 강시원(姜時元)・전시황(全時晄), 교감(校勘)은 전시봉(全時奉)・심시정(沈時貞)・유헌(劉憲), 사접(司接)은 황맹춘(黃孟春)・조시철(趙時哲)・신시영(辛時永), 사재(司財)는 한봉진(韓鳳辰)・홍시래(洪時來)・신시일(辛時一)・김진해(金鎭海)・이정봉(李廷鳳), 사직(司直)은 장형도(張享道)・김문수(金文洙)・장병규(張炳奎)・이진경(李晉慶), 사판(司板)은 김관호(金寬浩), 사인(司印)은 심원우(沈遠友)・최석하(崔錫夏)・전윤권(全允權), 사서(司書)는 전세인(全世仁), 사향(司餉)은 장흥길(張興吉)・김인상(金寅相)・김효흥(金孝興)・이천길(李千吉), 사공(司供)은 이귀록(李貴祿)・강기영(姜基永) 등이다.
신사년(1881년) 6월에 대신사는 단양군(丹陽郡) 남면(南面) 천동(泉洞)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강석(講席)을 베풀고 비로소 『용담유사(龍潭遺詞)』 수백 부를 간행하여 각포(各包)에 널리 보내 알렸다. 그 때 인쇄 비용은 인제군(麟蹄郡) 접소(接所)가 의연금을 내어 전담하였고 일을 주간(主幹)한 사람들은 김연호(金演鎬)・장춘보(張春甫)・김치운(金致雲)・이은보(李殷甫)・김현경(金顯卿)・장세원(張世遠) 등이고 그 나머지 임원들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같은 해 10월에 대신사는 정선(旌善)의 무은담(霧隱潭)에 있는 유시헌(劉時憲)의 집으로 가서 유도(儒道)・선도(仙道)・불도(佛道)를 하나로 통합한다는 뜻을 써서 별도로 정성을 올리어 하늘에 고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사방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예식이 끝나자 대신사가 말했다. “우리 동학도에서 어육(魚肉)을 금지해온 지가 햇수로 벌써 7년이 되었다. 비록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받들어서 그렇게 하였지만 또한 요즈음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꺼리는 바가 없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일체 해금(解禁)한다”라고 하였다.
임오년(1882년) 3월 10일에 대신사는 제세주의 조난기념식(遭難記念式)을 거행하였는데 각포(各包)의 도유(道儒)로서 기념식에 참석한 자가 매우 많았다. 유시헌 등이 대신사에게 물었다. “올해의 운이 과연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대답했다. “내가 뭘 알겠는가. 다만 나라에 머잖아 내홍(內訌, 內紛)이 일어날 낌새가 있으니 그대들은 오로지 성심으로 수도(修道)하고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天理)에 순응하고 외물(外物)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훈국(訓局) 군졸들의 소요(騷擾)가 크게 일어나 한 달을 넘겨서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이 해 6월에 대신사는 송고동(松皐洞)에서 정선군(旌善郡) 갈래면(葛來面) 장정리(長亭里)로 짐을 옮겨 우거(寓居)하였다. 이때 각포의 도유로서 따라온 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문을 메웠다.
계미년(1883년) 2월에 충청도 목천군(木川郡) 구내리(區內里) 김은경(金殷卿)의 집에 인간소(印刊所)를 다시 설치하였다. 또 『동경대전(東經大全)』 1,000여 부(部)를 인쇄하여 각포에 나누어 주었다. 대신사는 이때에도 편(篇)의 끝에 자신이 지은 발문(跋文)을 실었다. 이 무렵에 소문을 듣고 입도(入道)한 자들 가운데에는 충주(忠州)・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豐)・목천(木川)・진천(鎭川)・청주(淸州)・공주(公州)・연기(燕岐) 등의 군(郡)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손성열(孫星烈)・안교선(安敎善)・김상호(金相浩)・김은경(金殷卿)・안익명(安益明)・윤상오(尹相五)・이일원(李一元)・여규덕(呂圭德)・여규신(呂圭信)・유경순(劉敬順)・이성모(李聖模) 등은 여러 고을에서 사람들이 동학도에 투신(投身)하게 된 효시(嚆矢, 端初)가 되었다.
어느 날 대신사가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동학도의 운세가 바야흐로 그동안 침체 상태에 있다가 다시 융성해지고 어둠에서 벗어나 환하게 드러나서 청구팔역(靑丘八域, 우리 나라)에만 널리 퍼질 뿐 아니라 점차 동양과 서양에까지 건너가 그곳을 교화할 것이다. 그대들은 단지 성(誠)・경(敬)・신(信)을 위주로 하고 앞으로의 운명은 하늘에 맡기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고, 이에 대신사는 각포에 글로 유시하였다. 군상(君上, 임금)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장(師長)을 존숭하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부간에 구별하고 붕우를 믿고 이웃을 보살펴주는 등 수신제가(修身齊家)와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것으로 모두 11조목(條目)이었다.
갑신년(1884년) 3월에 대신사는 특별히 제세주의 조난(遭難) 기념 예식을 설행하였다. 이 때 문도 중에 와서 참석한 자가 매우 많았다. 맨 먼저 찾아온 자는 청주(淸州)에 사는 서인주
같은 해 10월 24일에 대신사는 우연히 천령(天靈)을 느끼어 계서(乩書, 占書) 3편(編)을 얻었다. 그 중 하나는 당시 사람들이 지목하는 것을 피하려고 명을 받들어 주문(呪文)을 개작(改作)하여 임시 방편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일편단심으로 상제를 받들어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만사를 알게 되네[奉事上帝一片心 造化定 萬事知]”라고 하였다. 이들 3편 계서의 전문(全文)은 대신사의 연보(年譜)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대신사는 또 강화(降話)의 교시(敎示)를 받들어 별도로 동학교(東學敎) 안에 여섯 종류의 소임(所任)여섯 종류 소임(所任)을 정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질박 성실하고 인망이 두터운 사람을 골라서 교장(敎長)으로 삼고, 성심으로 수도하여 도를 전수(傳授)할 만한 사람을 교수(敎授)로 삼고, 풍채와 힘이 있고 기강(紀綱)에 밝고 경계(境界)를 아는 사람을 도집(都執)으로 삼고, 시비(是非)가 분명하여 기강을 지킬 만한 사람을 집강(執綱)으로 삼고 공평(公平)함을 유지하고 근후(勤厚)한 사람을 대정(大正)으로 삼고 직언(直言)을 잘하고 강직(剛直)한 사람을 중정(中正)으로 삼았다.
이달 28일에 대신사는 제세주의 강생(降生) 기념 예식을 별도로 설행하였다. 각포의 두목(頭目)가운데 참석한 자들이 82인이었고 그 나머지 해당하는 도유(道儒) 중에 와서 모인 자들도 많았다. 이에 새로 제사 의식(儀式)를 정하였는데, 삼색(三色) 채단(彩緞)을 각각 3자(尺) 3치(寸)씩 갖추고, 그 밥과 떡과 단술과 쌀은 모두 일곱 번 방아를 정밀하게 찧어 나쁜 쌀을 골라내고, 과일과 채소를 아울러 쓰되 각각 1두(斗) 용량의 그릇을 사용하고, 삶거나 익힐 때에는 저절로 말라죽거나 썩은 나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참배하는 사람은 모두 정결하게 목욕재계하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고, 각자 법관(法冠)과 법복(法服)을 착용하여, 마치 처음 입도(入道)하던 때의 의식처럼 한 뒤에 마침내 세 차례 「초학주(初學呪)」초학주(初學呪) 및 「강령주(降靈呪)」강령주(降靈呪)와 「본주문(本呪文)」 본주문(本呪文)을 송독(誦讀)하도록 하였으며, 겸하여 축사(祝詞)를 두어 고하게 하였다. 그 축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유년(1885년) 3월에 제세주의 조난예식(遭難禮式)을 설행할 때 대신사는 문도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에 거처를 정한 지가 어느덧 12년이나 되었다. 다행이 천사(天師)께서 보살펴준 큰 덕을 입어 분수에 편안하게 여기고 살아왔는데 이제 자취를 감추라는 명을 받들었다. 머잖아 앙화(殃禍)와 기회가 있을 것이니 제군(諸君)들은 부디 조심하고 삼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해 5월에 대신사는 보은군(報恩郡)의 장내(帳內)로 옮겨 우거(寓居)하였다. 6월에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심상훈(沈相薰)과 단양군수(丹陽郡守) 최희진(崔喜鎭)이 오모
같은 해 7월에 대신사는 다시 보은으로 돌아가서 김연국과 장한주를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서 경상도 영천군(永川郡) 화계동(花溪洞)으로 가서 초막(草幕)을 엮고 몰래 숨어서 살았다. 8월에 대신사는 강시원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9월에 다시 상주군(尙州郡) 화령면(化寧面) 앞 성촌(城村)으로 옮겨 우거(寓居)하였다. 이에 앞서 대신사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며 숨어 지낼 때에 약간의 살림도구를 모조리 단양군수 최희진에게 빼앗겼으므로 어찌할 도리가 없이 그대로 고생을 겪을 뿐 스스로 힘을 써볼 수가 없었다. 이때 문도 서인주(徐仁周)와 황하일(黃河一) 등이 정성을 다해 주선해주어 가까스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11월에 문도 이치흥(李致興)이 대신사가 추운 겨울을 당해서도 입은 옷이 얇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어 면포(綿布) 7단(段)을 드려 솜을 넣어 겨울을 나게 해주었다.
같은 달 19일에 하늘이 글을 내렸다. 강서(降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만고(萬古)의 조화여, 무극하고 무궁하도다. 아, 이 세상의 우리 동학도여, 어두울 때도 있고 밝을 때도 있도다. 경신년에 덕을 편 일이여, 어찌 운이 아니며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갑자년에 당한 일이여, 이 또한 운이요 이 또한 명이로다. 주인의 한 마음이여, 처음부터 끝까지 잘 지키는 것이로다. 두 글자[天主]를 보고 지목함이여, 어찌 서양 사람이 먼저 행한 것이겠는가. 큰 운이 장차 형통함이여, 새 명을 받들어 다시 이루리로다. 아! 우리 주인은 공경히 이 글을 받으라.
슬프도다! 이 세상 사람의 무지함이여, 장차 새와 짐승을 돌아보고 그것을 논하리라. 닭이 울면 밤이 나누이고 개가 짖으면 사람들이 돌아가도다. 산의 멧돼지가 칡을 다투고 창고의 쥐가 새둥지를 얻도다. 제(齊)나라 소가 연(燕)나라로 내달리고
밝은 것은 어둠이 변한 것이니, 해가 밝은 것은 사람마다 볼 수 있으되 도의 밝은 것은 나 홀로 아네. 덕이란 정성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여 나의 도리를 다함이니, 사람이 돌아오는 곳은 덕이 있는 곳이니라. 명이란 것은 운의 짝이니, 한울의 명은 다 알지 못하고 사람의 명은 어기기 어렵도다. 도란 것은 갓난애를 보호하듯 대자대비(大慈大悲)하여 수련하고 성도하여 일이관지(一以貫之) 함이니라. 정성이란 마음의 주인이요 일의 몸이 되나니, 마음을 닦고 일을 행함에 정성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느니라. 공경이란 도의 주인이요 몸의 연장이니, 도를 닦고 몸으로 행함에 오직 공경으로 종사하라. 두려움이란 사람들이 경계하는 바이니, 한울의 위엄과 신의 눈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도다. 마음이란 허령(虛靈)의 그릇이요 화복의 근원이니, 공(公)과 사(私)의 사이에 득실이 되는 도이니라.
그 해 4월에 대신사가 말했다. “올해에 이상한 돌림병이 크게 돌아 생명이 많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각포(各包)에 글로 유시(諭示)하여 더욱 치성(致誠)을 올리고 수심정기(守心正氣)에 힘쓸 것을 당부하였고 매일 밤마다 손을 씻은 물을 나누어 받들어서 정결하고 경건하게 하늘에 기도하게 하였다.
그 해 6월에 돌림병이 과연 크게 일어나서 전염되는 곳마다 죽는 자들이 쌓여갔는데 오직 지성으로 축사(祝詞)를 올린 여러 도가(道家)와 유가(儒家)들은 모두 편안하게 재앙을 소멸시켰다. 또 대신사가 살고 있던 인근의 40여 호(戶)는 모두 함께 편안하게 살면서 복을 얻었다. 8월에 이르러 바람이 높이 불고 날씨가 시원해지자 돌림병이 점차 사라졌다. 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와 경상도와 경기 등지의 인사(人士)들 가운데 대신사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축원하는 것을 미리 징험하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앞다투어 찾아와서 옷깃을 바로잡고 배우기를 청하는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느 날 홍수(洪水)가 하늘까지 치솟아 끝없이 가득 차서 온 세상의 생령들이 거의 모두 죽어가는 때에 나는 언덕 위의 나무가 늘어선 사이에 의지하였다. 더구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무리들 속에 번갯불이 번쩍번쩍 치고 있어서 목숨이 당장 죽을 처지에 있었으므로 속으로 몹시 괴이하고 의아하게 여기었고 담기(膽氣)가 흔들렸다. 이에 급히 심력(心力)을 일으켜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늘이 만민을 내어 생생(生生)을 덕(德)으로 삼는데 이처럼 재앙을 내리다니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라고 여기어 이에 급히 번개에게 외쳤다. “만일 생민(生民)을 죽이려거든 어서 나를 때리어 중생의 목숨을 대신 살려 달라”고 하고는 번개 덩어리를 한번 때리자 번개는 손에 즉시 흩어졌고 단지 하나의 연기(煙氣)일 뿐이었다. 이 때 거의 죽어가던 생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다급히 소리치기를, “당신이 하늘처럼 큰 용맹함을 발휘하여 거의 죽어가던 우리 창생(蒼生)을 구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가마 위에 태우고 높은 산의 뾰족한 봉우리에 올라가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분명히 고하였는데, 10여 글자를 써서 중생에게 주어 소리 내어 읽게 하였다. 조금 지나자 온갖 냇물이 순조롭게 흐르고 평야(平野)가 육지로 되었으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곤도(坤道)는 조화(造化)하여 그 정(情)이 상승하는데 백태(百態)를 구비하여 도를 활발하게 드러내 형통하게 하네.
정해년(1887년) 새해 아침에 대신사는 점괘를 뽑아 1구(句)의 시를 얻었는데, 그 시에 “무극대도가 마음과 성의가 되니 원통봉 아래가 또 통통하도다[無極大道作心誠 圓通峰下又通通]”라고 하였다.
2월에 대신사의 측실(側室)인 김씨(金氏)가 병이 들어 누워 지냈다. 대신사가 영부(靈符)를 쓰니 곧장 병이 나았다가 사나흘 지나자 병이 다시 발작하였다. 대신사는 부인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잘 알고는 더 이상 영부를 쓰지 않았다. 24일쯤이 되자 마침내 세상을 떠났고 예법대로 함염(含殮)하여 원통봉(圓通峰) 아래 손좌(巽坐) 묘역에 장사지냈다.
3월 21일은 곧 대신사의 61세 생신이었다. 각포(各包)의 도유(道儒)들이 때가 되자 일제히 모여 생신을 축하하는 술잔을 올렸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대신사는 서인주(徐仁周)・손천민(孫天民)과 함께 정선군에 있는 유시헌(劉時憲)의 집으로 가서 장차 칠칠지과(七七之課, 七七齋)를 거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유시헌이 말했다. “갈래산(葛來山)은 일찍이 대신사께서 개단(開壇)하여 도(道)를 강연한 곳이니 이곳에 나아가 수련(修煉)하면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가 등에 메어 나를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사는 기뻐하고 승낙하여 즉시 갈래산으로 들어갔다. 입산(入山)한 날부터 대신사는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아서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어깨를 자리에 붙이지 않은 채로 49일의 기한을 마쳤다. 기한을 채운 뒤에 대신사는 한 점괘의 시를 얻었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월이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월이 왔으니 금사 옥사에 또 옥사로다. 오늘 내일 지나면 또 내일이니 무엇을 알겠으며 또 무엇을 알리오. 달이 가고 달이 오면 새 날이 오니 천지의 정신이 나를 깨우치노라. 다시 갑신년이 되기도 전에 궁을이 문명을 회복하리라. 소성(蘇星)의 기(氣)는 새 기운이 사람들을 구제할 것이고 도를 공경하여 별이 성기어지고 지극한 기운이 반달이로다. 추위와 더위가 가고 오고 바람과 우레는 음양일세. 명을 받아 장생하니 덕이 사해를 진정시키리[不意四月四月來 金士玉士又玉士 今日明日又明日 何何知知又何知 日去月來新日來 天地精神令我曉 不再甲申歲 弓乙回文明 蘇星之氣 新運濟人 道敬䟽星 至氣半月 寒熱往來 風雷陰陽 受命長生 德鎭四海]”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