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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12장 갑오동학당혁명과 청일전쟁[第十二章 甲午東學黨革命及日淸戰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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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음력 1894년 03월 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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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明治) 27년 갑오년(1894년) 3월 10일에 제세주(최제우)의 순도(殉道)를 〈기념하는〉 제례의식이 청산군(靑山郡) 포전리(浦田里) 김연국(金演局)의 집에서 치루어졌다. 그때에 손병희(孫秉熙)・이관영(李觀永)・권재조(權在朝)・권병덕(權秉悳)・임정재(任貞宰)・이원팔(李元八) 등이 모두 급히 달려 와서 대열에 참여하였다.
이날 밤에 여러 문도(門徒)들이 나와서 말했다. “각 군(郡)의 수령과 관리가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관아 하예(下隸)의 공갈과 협박이 날로 더욱 극심해지니 각 군의 동학도유(東學道儒)가 모두 죽어야 그칠 것입니다. 불쌍한 이 생명을 어떻게 보존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대신사가 말했다. “우리의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무극대도(無極大道)로 어찌 변명할 이치가 없겠는가? 내가 먼저 보은(報恩) 경내(境內)로 갈 것이니 너희는 바로 각 포(包)에 글로 널리 알려서 8도(八道)의 도유(道儒, 동학에 입도한 유생)로 하여금 일제히 모이게 하라”고 하였다. 그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우리 도(道)는 음양(陰陽)으로 하늘을 체득하고, 인의(仁義)로 사람을 세운다. 하늘과 사람이 덕(德)을 모아 인위적인 것이 없으나 기화(氣化, 변화)하는 것이어서, 자식은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고 신하는 목숨을 다해 임금을 섬기는 게 크나큰 인륜이다. 우리나라는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이후로 예의(禮義)의 나라로 천하에 알려졌으나 말세에 이르러 안으로는 수양(修攘)의 정치가 시행되지 못하고 밖으로는 침탈의 형세가 더욱 펼쳐졌다. 관리는 난폭하고 방자하게 제멋대로 상벌(賞罰)을 행하고, 힘세고 강한 자들은 남을 업신여기고 토색질을 하는 데 끝이 없으며 학문은 엉성하고 거칠면서도 제각기 문호(門戶)를 세우고, 민심(民心)은 움츠러들어 견딜 수가 없다. 상(床)이 〈발이〉 깎이는 재앙과 〈성(城)이〉 해자에 거꾸로 넘어지는 화(禍)의 긴박함이 바로 눈 앞에 가까이 있지만 안일해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로 뜻있는 사람이 근심을 품고 길게 탄식하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화를 입은 사문(師門)의 남은 생명이고 조종(祖宗, 임금의 조상)이 기른 유민(遺民)으로서 스승의 원한을 풀지 못하고 나라의 은혜를 저버렸으나 단지 조화(造化)가 도래하고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우리 임금이 특별히 큰 자비를 내리고 은택을 베풀어 각각 그 생업을 편안하게 하여 바라는 데에 부합하게 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을〉 기르는 관리가 임금의 은혜를 펼 생각은 없이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는 것이 전보다 심하여 모두 서로 망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드시 목숨을 희생해야 끝나게 될 것이다. 비록 안도해서 생업을 즐기려고 해도 어찌 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해도 어찌 할 수가 없어 다시 큰소리로 부르짖을 것이다. 글을 표현해서 원한을 펴는 일을 이처럼 알리니 각 포의 도유(道儒)는 이때에 이르러 함께 모여 한편으로는 도(道)를 지키고 스승을 높이는 방도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으로 삼기를 진실로 간절히 바란다.

명치(明治) 27년 갑오년(1894년) 3월 15일에 법헌(法軒) 해월(海月, 최시형) 대신사가 보은(報恩) 경내에 이르니 각 포(包)의 도유(道儒)가 마치 바람이 흔들고 조수(潮水)가 솟구치듯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모인 사람들이 수십만명이었는데, 각각 대나무 막대를 들어 깃발을 만들고 작은 돌을 모우니 성(城)이 만들어졌다. 읍(揖)하고 사양하며 나아가고 물러났으며 위엄있는 모습이 성대하였다. 또한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외우며 온화한 기운이 역력하였다. 이에 법헌(法軒)인 대신사가 각 포의 대접주(大接主)와 포의 이름을 정했다. 충경대접주(忠慶大接主) 임규호(任奎鎬),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 손천민(孫天民), 충의대접주(忠義大接主) 손병희(孫秉熙), 보은대접주(報恩大接主) 김연국(金演局), 문청대접주(文淸大接主) 임정재(任貞宰), 관서대접주(關西大接主)이용구(李容九), 옥의대접주(沃義大接主) 박석규(朴錫奎),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이원팔(李元八), 호남대접주(湖南大接主) 남계천(南啓天), 상공대접주(尙公大接主)이관영(李觀永), 서호대접주(西湖大接主) 서장옥 등이 묘당(廟堂)에 건의를 하여, 선사(先師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려고 10일 동안 해산하지 않고 모여 있었다.
이때에 충청병사 홍계훈(洪啓薰)이 병사를 인솔하여 본군(本郡, 보은)에 주둔하였고, 선유사(宣諭使) 어윤중(魚允中)이 조칙(詔勅)을 받들어 내려와서 은밀히 도유(道儒)의 동정(動靜)을 탐문하였다. 손에는 자그마한 쇠붙이도 없었고 굳은 일념(一念)으로 선사(先師)의 억울함을 풀려고 할 뿐이었다. 어윤중이 마침내 사실을 근거로 계문(啓聞, 글로 임금에게 아뢰는 것)하였고, 묘당에서 다시 어윤중을 위유사(慰諭使)로 삼았다. 4월 2일에 어윤중이 칙어(勅語)를 가지고 〈동학교도가〉 모인 곳에 와서 보은군수 이규백(李圭白)으로 하여금 임금의 명을 낭독하게 하니, 대중과 도유들이 일제히 울고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하였다. 3일 뒤에 각각 도유들이 법헌인 선생[최시형]의 명을 받들어 해산을 하고 돌아갔다.
같은 해 4월 5일에 대신사가 문암(文巖)에서 강론을 열었는데, 이 때에 고부(古阜) 접주 전봉준이 있는 호남(湖南) 고부군의 경내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이 탐학과 불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그치는 데가 없었다. 전봉준은 자신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것을 원통하게 여기고 세상 운수의 쇠퇴를 개탄하여 옛 것을 바꿔 새 것을 세우고 곤경을 구제할 방책을 힘껏 부르짖었다.
4월 16일에 전봉준은 무리를 이끌고 고부의 동쪽 10리에 있는 백산(白山)으로 옮겼다. 4월 17일에 무장(茂長)의 접주 손화중(孫華仲)이 동학교도 수천명을 거느리고 태인(泰仁)과 부안(扶安) 등지를 순회하며 뼈를 깎는 군(郡)의 폐단을 바로잡고 피부를 벗겨낸 백성의 재산을 돌려주어 가는 곳마다 모두 환영을 하였다. 그래서 전라도관찰사 김문현(金文鉉)난후통장(欄後統將) 이재한(李在漢)과 사천군수(泗川郡守) 송봉호(宋鳳浩) 등으로 하여금 포군(砲軍) 2,000명과 부상군(負商軍, 등짐장수로 구성된 군대) 1,000여명을 이끌고 전봉준과 손화중의 2개포의 도유(道儒)만 명과 황토현(黃土峴, 고부군 서쪽 20리 거리에 있다)에서 접전을 벌였다. 전투에서 관군이 패하여 죽거나 다친 자가 1,000명을 넘었고, 패배해서 물러났다.
이때에 호서대접주(湖西大接主) 전봉준, 무장접주 손화중, 부안접주(扶安接主) 김개남(金開南), 남원접주(南原接主) 김낙철(金洛喆), 청풍접주(淸風接主) 성두환(成斗煥), 홍천접주(洪川接主) 차기석(車基錫), 청산접주(靑山接主) 권병덕(權秉悳), 화포영장(火砲領將)이상진(李相瑨)・이유형(李裕馨)・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景善)・차치구(車致九)・정진구(鄭進九) 등이 도유 수십만명을 거느렸고, 그 진법(陣法)은 서너명 또는 대여섯명으로 하늘에 가득한 별들의 모습을 이루었다. 깃발은 청색(靑色)・황색(黃色)・적색(赤色)・백색(白色)・홍색(紅色) 등 5색의 기를 사용하여 하늘에 휘날렸고, 이르는 곳마다 포(砲)와 말을 거두었으며 대나무를 깎아 창을 만들었다. 또한 바랑을 찢어 각각 어깨에 둘렀다. 전봉준은 백립(白笠, 흰 베로 만든 갓)을 쓰고 흰옷을 입어 아버지의 상(喪)을 표시했는데, 그 길이가 7척(七尺)이 되지 않았다. 손에는 105개의 염주를 들고 입으로는 21자 주문을 외워 온화한 기운이 하늘을 찔렀다. 각 포의 도유로 하여금 어깨에 궁을(弓乙, 마음을 표현하는 부호) 2자를 부치게 하고 몸에는 동심의맹(同心義盟, 한마음으로 의기를 맹서하다) 4자를 두르게 하였으며, 깃발에는 오만년수운대의(五萬年受運大義)를 특별히 써서 내거니 진실로 전무후무한 변화막측의 신묘한 장수와 훌륭한 병사였다.
충북・경기 2개 도의 대접주 이하의 각 포와 청주도회(淸州都會), 관서대접주(關西大接主)이용구(李容九), 목천대접주(木川大接主) 김학수(金學水), 충주접주(忠州接主) 신재연(辛載淵), 접주 홍재길(洪在吉), 음성접주(陰城接主) 박형채(朴衡采), 용인접주(龍仁接主) 최영구(崔榮九), 죽산접주(竹山接主) 염창순(廉昌淳), 충주접주 김철제(金喆濟), 화포영장(火砲領將) 정경수(鄭璟洙)・국길현(鞠吉鉉)・김재명(金在明)・박용구(朴容九)・고재당(高在堂) 등이 도유 수십만명을 거느리고 연합했고, 공주(公州)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지난날 각 군(郡)의 수령이 탐학과 불법으로 빼앗은 백성의 재산을 돌려주게 하였고, 수령이 부민(富民)에게 곤장을 치거나 가두고 제멋대로 빼앗았으면 바로 풀어주게 하였으며, 양반이 양인(良人)을 억지로 천인으로 만든 자는 속량(贖良)을 허락해서 혼인하는데 장애가 없게 하였고, 평민을 하인으로 보던 것은 평등하게 하였다. 수백년동안 제도에 억눌려 온 악정(惡政)과 잘못된 풍속을 한꺼번에 개혁하였다. 이로부터 송사(訟事)는 관(官)에 가지 않고 반드시 동학도유회도소(東學道儒會都所)에 와서 호소하였는데, 민심은 마치 물처럼 아래로 흘러 막을 수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정계(政界)의 풍조가 크게 바뀌어 전에 있던 3상(三相, 의정부의 3정승)과 6조(六曹)의 판서를 고쳐서 10부(十部)를 만들었고, 낡고 더러운 풍속이 모두 새롭게 개혁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상하(上下)인심은 도리어 의구심을 품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아니하였다. 몰래 밀사(密使)를 보내어 선동하거나, 집에서 비관을 하며 원망을 하거나, 이단으로 지목해서 제거하려고 하는 자가 있었다. 또한 외세를 배척한다는 명목으로 탄압을 하려는 자도 있었다. 아주 큰 문제가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 해에 조선의 묘당(廟堂)은 동학당이 난리를 일으킨 것을 근심하여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총리사(總理事) 원세개(袁世凱)와 협상을 하여 천진(天津)에 머물고 있는 직례총독(直隸總督)이홍장(李鴻章)에게 전보로 요청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청나라 군대 수만명이 파송되어 아산(牙山)에 주둔하여 진(陣)을 치고 조선의 관병(官兵)과 힘을 합쳐 동학당을 토벌할 계획을 세울 때에, 일본은 천진조약(天津條約)에 위배된다고 하면서 똑같이 파병을 해 와서 청일전쟁이 시작되기에 이르렀다.
이달 29일에 죽산부사(竹山府使)이두황(李斗璜)이 경영(京營)의 병사 수 천명을 거느리고 처음으로 삼남(三南)의 공주와 전주 등지에 내려왔는데, 청주병사(淸州兵使)이장회(李章會)가 관병(官兵)과 부상군(負商軍, 등짐장수로 구성된 군대) 수천명을 파송하였다. 이 때에 이용구(李容九) 등이 먼저 도유(道儒) 수 만명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이인역(利仁驛)에 이르러 경병(京兵)과 옥녀봉(玉女峯)에서 격투를 벌였는데, 경병이 패하여 달아났다. 마침내 봉황산(鳳凰山)에 이르러 경병 및 부상(負商)과 교전을 하였다. 산에 오르는데 총을 쏘아댔으나 도유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양쪽 군대가 육박전(肉薄戰)을 벌이며 피나는 싸움을 10여차례 했고, 총소리가 하늘과 땅에 진동하며 화약연기가 일어나서 짧은 거리도 분별하지 못하였다. 도유중에 죽거나 다친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고, 피는 내를 이루었으며 시체는 산처럼 쌓여 눈으로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영장(領將)이용구는 총알에 맞아 정강이를 꿰뚫린 데다가 날이 저물고 힘이 다해서 한꺼번에 도유들이 무너져서 흩어졌다. 그 때, 수천의 나머지 〈군사를〉 인솔하여 논산포(論山浦)로 후퇴하였다. 이 때에 영장(領將) 전봉준(全琫準)과 김개남(金開南) 등 수십만명의 군사들이 전주・논산・강경에서 10여차례 혈전(血戰)을 치루었는데, 포탄과 탄환이 쏟아져서 죽거나 다친 군사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었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으며 시체는 산처럼 길에 가득찼다. 매우 위험하여 마침내 물러나 흩어져서 숨었다.
같은 해 가을과 겨울에 황해도 각 군(郡)에서 동학(東學)의 도유(道儒)가 봉기하였다. 접주(接主) 임종현(林鍾鉉)・정종혁(鄭宗赫), 접주 문학수(文學洙), 송화접주(松禾接主) 방찬두(方燦斗)・강필도(康弼道), 신천(信川) 김유영(金裕泳)・한화석(韓華錫), 해주접주(海州接主) 최유현(崔琉鉉)・오응선(吳膺善), 장연접주(長淵接主) 정양(鄭樑), 재령접주(載寧接主) 원용일(元容馹)・오영창(吳永昌)・안이정(安履貞), 문화접주(文化接主) 윤기호(尹基浩)・임주엽(林周葉)・김명준(金明璿), 봉산접주(鳳山接主) 김응종(金應鍾), 배천접주(白川接主) 변승명(邊承明), 강령접주(康領接主) 성재석(成在錫) 등이 수십만명의 도유를 선동해서 신천・재령・송화・장연에서 관군과 6~7차례 싸웠다.
같은 해 12월 3일에 해주 관병 및 외국 군대와 싸웠는데, 오전 7시에 시작해서 오후 7시에 끝났다. 혈전을 벌여 피가 바다가 되고 시신은 산처럼 많았다. 관군은 점점 강해지고 도유들은 기세가 다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하늘을 바라보고 길게 탄식할 뿐이었다.
같은 해 5월 경에 청일전쟁이 시작되어 3달동안 서로 싸워 일본 황군(皇軍)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가 패배해서 평양(平壤)에 주둔하였다. 일본의 추격군대가 출전해서 청군(淸軍)의 영장(領將)인 마대인(馬大人)과 자대인(子大人)이 모두 전사(戰死)하고 병사들은 궤멸하여 남은 병사는 자신의 나라로 도망을 갔다. 동시에 조선은 청(淸)나라의 부속국이 된지 수백년만에 벗어나서 대한독립국(大韓獨立國)을 건설하였다.
같은 해 8월에 법헌(法軒) 대신사는 도유(道儒)들이 법규를 따르지 않고 서로 모여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늘 걱정하고, 다시 글로 회유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하늘이 큰 운수를 내려 도유에게 이 법은 선(善)을 권장하고 악(惡)을 징계하며, 미혹함을 버리고 깨달음에 나아가서 더욱 정진하게 하려는 것이다. 어찌 근래에 가르침을 빙자해서 풍속을 능멸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많이 행하는데, 이것이 어찌 바름을 지키는 것인가? 심지어 말세(末世)의 폐단에 이르러 도(道)로 도를 해쳐 막을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고, 강한 포(包)의 위협에 약한 포가 견디기가 어려우며 패악한 부류의 방자함에 선한 무리는 보존하기가 어렵다. 아! 도를 아는 자의 행위가 도리어 도를 알지 못하는 자보다 못하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이 미워하는데, 더욱이 지금 사람이 서로 잡아먹으니 금수(禽獸)와 다른 바가 거의 없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이 30년동안 〈지옥의〉 도산검수(刀山劍水) 속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가 겨우 겁회(劫灰, 세상이 파멸할 때 일어난다고 하는 큰불의 재)를 벗어났으나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끝내 형제가 어긋나게 되니 어찌 경훈(經訓)에서 말한 서로 보지 못한 결과이고 다수(多數)의 이유가 아닌가? 변변치 못한 내가 대면해서 타이르고 편지로 훈계한 것을 다시 모두 하기는 어려워 맡기고 관망하였더니 폐지(廢紙)가 되었다. 차라리 말을 하고 싶지 않으나 사문(師門, 최제우)이 바리를 전한 은혜를 갚고, 영적인 교우(敎友)가 재앙을 지는 것을 차마 할 수가 없어 11조목을 정해서 특별히 각 포(包)에 알리니 변변치 못한 말이라고 버리지 말고 영원히 금석(金石)과 같은 전범(典範)으로 삼아 모두 따라 어기지 말라. 나는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하나. 각 포의 사무는 모두 해당 주사(主司)와 별임(別任)의 지시를 따를 것.
하나. 몸을 닦고 일을 실행하는 것은 반드시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삼고, 집에 머무르며 일을 집행하는 것은 단지 밭을 갈고 책을 읽는 것을 힘쓸것.
하나. 함부로 남의 무덤을 파고 돈과 재물을 빼앗는 자는 보는 대로 관(官)에 알려 처벌할 것.
하나. 각 포의 도유(道儒) 중에 무리와 위세를 의지해서 갚아야 할 재물을 변상하지 않고 도리어 부당하게 얻은 재물을 토색질한 자는 엄중히 징벌을 시행할 것.
하나. 누구를 막론하고 오래되거나 얼마되지 않은 빚장부는 일절 간섭하지 말것.
하나. 다른 포의 도유가 침탈하는 폐단이 있으면 이름을 지적해서 빨리 법소(法所, 교단을 총괄하는 중앙기관)에 보고할 것.
하나. 본포(本包)의 도유가 법소와 포덕소(布德所)의 증빙문서를 휴대하지 않고 마음대로 무리를 모으는 자는 바로 명단에서 뺄 것.
하나. 이치에 없는 말로 서로 헐뜯고 구타하는 자는 동문(同門)의 도유로 대우하지 말고, 북을 쳐서 각 포에 두루 알릴 것.
하나. 술을 먹고 노름을 하며 속여서 재물을 빼앗는 것은 결코 도유의 행실이 아니다. 만약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영원히 명단에서 뺄 것.
하나. 관아의 명령에 힘써 복종하고, 제 때에 맞춰 공세(公稅, 세금)를 내어 영(營, 감영)과 읍(邑)에 죄를 짓지 말것.
하나. 각 포의 사무는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법소와 포덕소의 지시를 따라 공경하게 받들어서 시행할 것.

같은 해 9월 18일에 법헌(法軒) 대신사가 도유(道儒)가 참담하게 죽은 소식을 듣고, 임금에게 원망을 호소하며 선사(先師,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생명을 구제하려고 각 포(包)의 도유를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청산(靑山)의 대신사에게 온 각처의 도유가 십여만명이 되었다. 그 초유문(招諭文, 불러서 타이르는 글)은 아래와 같다.

역(易, 주역)에 말하기를, “크도다! 하늘은, 만물이 이에 힘입어서 시작되니. 지극하도다! 땅은, 만물이 이에 의지해서 생겨나니”라고 하였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만물의 신령이 되었다. 아버지가 낳고 스승이 가르치며 임금이 기른다. 그것에 보답하는 의리에 있어 생삼사일(生三事一)의 도(道)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선사(先師, 최제우)가 경신년(1860년)에 〈하늘의〉 명을 받아 도(道)를 세워 퇴락한 강상(綱常, 인륜)을 드러내고, 무너져버린 생령(生靈, 백성)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위학(僞學, 사람을 속이는 학문)의 지목을 받아 재난을 겪고 하늘로 돌아갔는데, 아직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지가 지금 31년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이 도를 잃지 않아 서로 심법(心法)을 전하여 나라를 통틀어 도유가 몇십만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은(四恩)의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육적(六賊)의 욕심만을 일삼으며, 척화(斥和, 외국과의 통상교류를 배척)를 빙자하며 도리어 창궐(猖獗)하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늙은 몸을 돌아보니 나이가 70에 가깝고 숨기운이 끊어질 듯하나 멀리 바라를 전한 말의 은혜를 생각하니 눈물을 감당하지 못해 옷깃에 넘치고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다. 이에 다시 알리니 여러 도유들은 이 늙은이의 성의를 헤아려 기약한 날에 모여 정성을 다해 임금에게 크게 호소해서 선사(先師, 최제우)의 오래된 억울함을 시원스레 풀고, 종국(宗國, 조선)의 급박한 환난에 함께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때에 홍주목사(洪州牧使)이승우(李勝宇)와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대대적으로 토벌을 하여 전부 죽이려고 하였다. 고부(古阜) 전봉준(全琫準), 태인(泰仁) 김개남(金開南), 부안(扶安) 손화중(孫華仲), 양지(楊枝) 고재동(高在東), 전주(全州) 성두환(成斗煥), 차기석(車基錫)・강시원(姜時元)・박석규(朴錫奎) 형제・오성서(吳聖瑞)・강기만(姜基萬)・김연순(金演淳)・유병주(柳炳柱)・이복록(李福祿)・박태은(朴泰殷)・성재호(成在鎬)・유근호(劉根浩)・성재석(成在錫)・김윤경(金允卿) 등 두령(頭領) 19명이 살해를 당할 때에 각 포의 접주들 가운데 아내와 자식을 빼앗기고 집이 불타며 싸움터에서 죽은 자를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이 때에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맹영재(孟英在)가 800여명의 사병을 모집하여 주거지인 고수동(高水洞) 산위에 보(堡)를 쌓고 병사를 훈련시켰다. 진천군(鎭川郡) 허문숙(許文淑)과 조백희(趙白熙) 등이 500명의 사병을 모집하여 해당 군의 용수동(龍水洞) 산위에 주둔하여 동학당을 박멸하자는 성명(聲明)을 하고 원근(遠近)에 격문을 보냈다. 경기・충청・강원 3도의 도유(道儒) 중에 참혹한 화(禍)를 입은 자가 많았다. 모두 난리를 피해 충주군(忠州郡) 황산리(黃山里) 두령(頭領)이용구(李容九)의 도소(都所)로 돌아갔는데, 기약하지 않고 구름처럼 모인 도유가 수만명이었다. 이 때에 선유사(宣諭使) 정경원(鄭敬源)과 허문숙이 포군(砲軍) 500명을 인솔해서 지금 음성(陰城)에 속해있는 충주군 사창리(社倉里)로 들어가 황산리와의 거리가 대략 1리(里) 되는 곳에 머물렀다. 동학대두령편의장(東學大頭領便義長)이용구가 선유사 정경원에게 글을 보내어 만나서 담판(談判)하라고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이용구가 혼자 찾아가서 같은 신민(臣民)으로 나랏일이 위태로운 이 때를 맞아 서로 해치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는 뜻을 통쾌하게 설명을 하였다. 정경원이 그 말을 의롭게 여겨 시원스레 악수를 하고 얘기를 한 뒤에 마침내 10리 밖의 성산(星山)으로 물러나서 주둔하였다. 이용구와 도유들도 바로 해산하였다.

주석
수양(修攘) 안으로는 정교(政敎)를 닦고 외부의 침탈을 막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박(剝) 괘에 나오는 것으로 어진 사람이 해가 입거나 자신에게 해를 닥치는 것을 말한다.
『주역』의 태(泰) 괘에 나오는 것으로 임금의 도가 위태로운 것을 말한다.
박석규(朴錫奎) 동학 북접의 지도자로 1893년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여 서울에 올라가 상소를 올렸고, 2차 보은집회에 옥천의 교도 1000명 이상을 인솔해서 옥의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9월에 옥천에서 기포(起包)하였다.
홍계훈(洪啓薰) ?~1895. 본관은 남양이고 초명(初名)은 재희(在羲)이며 자는 성남(聖南)이다.
어윤중(魚允中) 1848~1896. 자는 성집(聖執)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보은 출신이다.
조병갑(趙秉甲) 본관은 양주이고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로 1892년 고부군수가 되어 탐학을 일삼다가 고부농민봉기의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하였다.
손화중(孫華仲) 1861~1895. 동학의 대접주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이다. 본관은 밀양이고 이름은 정식(正植)이며 자는 화중(華仲, 또는 化中)이다. 호는 초산(楚山)이다.
김문현(金文鉉) 1858~?. 본관은 광산이고 자는 원부(元敷)이며 1893년 보은집회 이후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94년 2월 고부농민봉기 이후 조병갑을 체포하고 다른 한편 전봉준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난후통장(欄後統將) 훈련도감에 설치되었던 특수부대의 통장을 말한다.
김개남(金開南) 1853~1895. 동학의 태인대접주로 본관은 도강(道康)이고 자는 기선(箕先)・기범(箕範)이다.
북쪽의 호(胡)나라와 남쪽의 월(越)나라가 한집안 이라는 뜻으로 온 천하가 한집안 같은 것을 말한다.
사은(四恩)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는 네가지의 은혜로 삼보(三寶)・임금・중생의 은혜이거나 부모・스승・임금・시주의 은혜를 말한다.
육적(六賊) 마음을 어지럽지는 것으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이다. 6진(六塵)・6식(六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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