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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 기사명
    제14장 송암의 경자년 설법[第十四章 松菴庚子設法]

    원문보기 원문/국역

  • 날짜
    음력 1899년 02월 00일
일러두기

명치(明治) 32년 기해년(1899년) 2월 각 포(包)에 용담전수교훈유서(龍潭傳授敎訓遺書)를 다음과 같이 발포(發布)하였다.

마음은 하늘이고, 하늘은 마음이다. 마음 밖에 하늘이 없고, 하늘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이란 본디 비어 있어, 사물에 응해도 자취가 없다. 천지(天地)의 도(道)는 하나의 기(氣)일 뿐이니, 만물을 변화시켜 생기게 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기에 있다. 아이를 좋은 기로 기른 다음에야 도의 맛을 알 수 있으니, 날마다 하는 일은 도가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은 한결같이 물[水]을 생기게 한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모든 근원의 기는 물이 아닌 것이 없다. 물은 기를 생기게 하고, 기는 물을 생기게 한다. 하나의 기가 모양을 이루면, 천지의 수(數)가 변화하여 만물의 이(理)가 생긴다. 이와 기는 그 근본까지 통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알 수 있다. 명덕명도(明德命道)와 성경외심(誠敬畏心)과 천리능행(踐履能行)한 뒤에 비로소 성(聖)의 경지에 들어 갈 수 있다. 종신토록 노력해도 나란히 할 수 없고 쓸 수 없는 것이 천지의 조화이다. 성(聖)의 경지에 들어간 뒤에 천지의 모든 근원인 하나의 기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
군자(君子)는 두루 사귀면서 한 쪽에만 편당하는 일이 없고, 소인(小人)은 한 쪽에만 편당하고 두루 사귀지 못한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 일이 있으면 이(理)로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 마음을 보존한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은 것이 가장 심술(心術)에 해롭다. 분노하면 천지와 부모도 편안한 곳이 없다. 청명(淸明)이 몸에 있으면 앎이 신(神)과 같이 된다. 청명이 몸에 있는 본래의 마음은 내도(內道)가 지극하고 다하게 된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삼간다. 몸을 망가뜨리고 삶을 손상하는 것을 군자는 불효(不孝)라고 한다.
다른 이의 장단(長短)을 논하는 것은 크게 도덕(道德)에 해롭다. 마음을 지키고 기(氣)를 바르게 하면 도(道)는 그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도(道)가 이루어지면 덕(德)이 이루어지고, 스스로가 성실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함이 있다. 나쁨을 덜어내고 마음을 착하게 하면 비로소 덕(德)을 이룰 수가 있다.

경심법[警心法]

내 마음이 불경(不敬)하면 천지(天地)가 불경하고, 내 마음이 불안(不安)하면 천지가 불안하다. 내 마음이 불경하고 불안하면 천지와 부모(父母)는 오랫동안 불순(不順)한다. 이것은 불효(不孝)하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그 생존(生存)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불효보다 큰 것이 없으니 누가 이것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경계하고 삼가라. 천지와 부모는 길이 모시고 잊지 않으니 깊은 연못가에 있는 듯, 얇은 얼음을 밟은 듯해야 한다. 지극한 효도와 지극한 정성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도리를 다 하는 것이다. 삼가 축원하고 삼가 축원할 뿐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치고, 나로 나를 친다. 내 마음이 서로 싸우니, 이 무슨 까닭인가. 착한 마음 나쁜 마음이 동시에 발하니, 나쁜 마음이 착한 행동을 책임지지 못하고 억지로 일어나니, 이것을 장차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착함이 나쁨을 제어할 수 있으면 좋다. 나쁨이 착함을 제어한다면 마음이 상하고 기(氣)가 상하게 된다. 기혈(氣血)이 마구 흔들려 어지럽게 섞이면 한 조각 마음과 한 자[尺]의 몸을 장차 부지할 계책이 없다. 만약 이 지경에 이르면 이는 몽둥이로 내 몸을 때려 크게 상하는 지경보다 심한 것이다. 어찌 크게 두려워하고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군자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니, 몸을 공경하는 것이 크고 지극한 것이다. 마음을 닦고 기(氣)를 바르게 하여 몸을 공경하기를 삼가 축원하고 삼가 축원한다.
마음이 착하고 즐겁지 않으면 하늘이 감응하지 않는다. 마음이 늘 착하고 즐거우면 하늘은 늘 감응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조화로우면 몸이 조화롭고, 몸이 조화로우면 집이 조화롭고, 집이 조화로우면 천하의 모든 일이 저절로 그 가운데서 조화롭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모두 수신(修身)으로 근본을 삼는 것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기쁘게 하고 하늘을 즐겁게 하여 함께 대도(大道)를 이루기를 삼가 축원한다. 사람이 생기고 도(道)가 생김에 은혜보다 큰 것이 없다. 사람에게 이 법(法)을 가르침에 은혜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늘의 덕(德)과 스승의 은혜는 잠시라도 그리워하여 사모함을 늦출 수가 없다. 마음을 지키고 (氣)를 바르게 하는 것이 가까이는 천지보다 가까운 것이 없고, 마음을 흩뜨리고 기(氣)를 상하게 하는 것이 멀리는 천지보다 먼 것이 없다.

수심편[守心篇]

사람이 자식이 자연스레 이기(理氣)의 가운데서 생기는 것을 보면, 누가 천주(天主)를 공경하지 않겠으며, 또한 누가 천인(天人)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배고픔과 목마름이 심해도 만약 한 그릇의 밥을 먹는다면 변화가 자연(自然) 속에서 나오니, 누가 하늘의 덕을 생각하지 않겠으며, 또한 때때로 고하지 않겠는가. 크게는 무릇 천지가 개벽한 후에 선성(先聖)과 후성(后聖)이 날마다 끊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모신다[侍]’는 글자의 밝음이 저절로 바로 잡히지 않아서, 우리 큰 성인께서 비로소 ‘모시어[侍] 지킨다[守]’는 것을 밝게 분별하여 창건하셨으니, 두 글자로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생기니, 사람은 각각 본성과 마음이 있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하니, 스스로 알고 스스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있어도 하늘은 없다. 밭을 갈아 씨뿌리고 노력하여 먹기 때문에 공(功)은 있어도 은혜는 없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람에게서 생기면 이는 어떻게 사람이 되겠으며, 먹기에 씨를 뿌리면 이는 어떻게 씨앗이 되겠는가. 우리 대성인은 무극(无極)에서 처음 화생(化生)하여 신령을 접하여 이야기가 내려온 근본이기 때문에, 개벽(開闢)의 처음에 천황씨(天皇氏)가 처음 만든 운(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며 믿어라. 사계절이 질서가 있고, 만물이 생기고, 밤낮이 바뀌고, 해와 달이 분명하고, 옛날과 지금이 길고도 멀고, 이기(理氣)가 변하지 않는 것은 천지(天地)가 지극히 성실하여 쉼이 없는 도리이다. 임금이 법(法)을 만들면 만민은 조화롭고 즐거워한다. 대부(大夫)가 법을 다스리면 조정(朝廷)은 정숙(正肅)해진다. 인민(人民)이 집을 다스리면 집안의 도가 화순(和順)해진다. 선비가 직분[工]에 힘쓰면 국운(國運)이 일어난다. 농부가 농사에 힘쓰면 의식(衣食)이 풍족해진다. 상인이 애써 수고하면 재용(財用)이 풍족하게 갖추어진다. 기술자[工人]가 부지런하면 기계(器械)가 다 갖추어진다. 이것이 사람의 성(誠)이다.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는 도리를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자(天子)가 공경하면 제후(諸侯)는 기꺼이 복종하고, 백성들이 귀의한다. 대부(大夫)가 공경하면 국가는 오래 흥한다. 서민들이 공경하면 집안의 도가 화목한 데로 돌아온다. 마음으로 공경하면 기혈(氣血)이 크게 조화롭고, 사람을 공경하면 만인이 귀의하고, 사물을 공경하면 만물이 와서 자리를 잡으니, 공경하고 공경해야 한다.
이기(理氣)가 바뀌지 않고, 사계절이 변하지 않고, 옛날과 지금이 일정하게 있는 것이 천지의 믿음이다. 요순(堯舜)이 나라를 세워 지금까지 이어지고, 옛 성인이 법을 만들어 지금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 사람의 믿음이다. 천자가 믿음을 잃으면 제후가 떠나간다. 제후가 믿음을 잃으면 백성이 흩어진다. 대부가 믿음을 잃으면 국기가 위태롭다. 백성이 믿음을 잃으면 가산(家産)이 무너진다. 선비가 믿음을 잃으면 성인의 도가 멀어진다. 농민이 믿음을 잃으면 배고픔과 목마름이 심해진다. 상인이 믿음을 잃으면 재앙을 면할 수 없다. 기술자가 믿음을 잃으면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이 있은 뒤에 성실해야 하니, 성(誠)과 경(敬)과 신(信) 세 가지 단서를 잃지 않아야 한다.
도(道)는 저절로 시작되는데 하늘에서 나온다. 그 움직임과 고요함을 살펴보면 신통하고 밝고 밝은 덕(德)이다. 그 아래로 감응하면 만물을 변화시켜 기른다. 조화(造化)의 정녕한 도가 그 사이에 있어 날마다 사용하는 틀이다. 법이란 참으로 왕장(王章)의 앞에서 말미암으니, 단지 궁궐의 담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습속을 내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의 도는 다만 임금이 법을 다스림에 있지, 아래 백성들의 위협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임금된 자는 천명(天命)을 듣고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것이다. 안타깝다. 요순(堯舜)의 큰 덕이 아니면 누가 할 일을 알겠는가. 이 어리석고 생각많은 말학(末學)은 감히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의지할 때에 고한다. 하늘은 위에 있어 해와 달이 걸려 있다. 땅은 아래에 있어 만물이 실려 있다. 사람은 그 사이에서 생겨나 변화가 무궁하다. 하늘의 도가 불순하면 만물이 조화롭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이기(理氣)가 꼬이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는 오래가고 완전하니 비가 제 때에 오고 바람이 순조롭게 불지만, 성인의 말이 오래가면 세상이 성글고 속되게 여긴다. 어찌 오래 간다는 탄식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근래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하늘 위에는 세계(世界)가 있다 하고, 땅 밑에는 지부(地府)가 있다고 하니 이치에 가당하겠는가. 거북이와 용이 아주 영험해도 지혜는 구름과 물 사이에 지나지 않고, 물고기의 눈이 잘 보여도 정미함이 바다 밖 육지를 뚫지 못한다. 성인의 도가 하늘을 꿰뚫어도 지혜는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 사이에 지나지 않고, 앵무새가 말을 할 수 있어도 뜻은 새와 짐승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의 이치가 밝음은 여기에서 다하고, 천명이 있어 각각 옮기지 않음을 아는 것도 이것에서 다하는 것이다.

창운[唱韻]

천지를 한 손바닥 가운데 그려오니
대도가 두 글자의 나뉨에서 다 행해진다
사람이 하늘을 모시지 않고 하늘이 사람을 거느린다
입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입을 가르치고
귀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소리는 귀에 이어지고
혀는 맛을 알지 못해도 맛은 혀를 가르친다

계해년계해년(癸亥年), 중춘(仲春) 보름에 송암(松菴) 손천민(孫天民)

수수명실록[授受明實錄]

하늘은 만물을 변화시켜 생기게 하고, 뜻은 형체에 귀속하니, 뜻에 맡겨 사용한다. 사람은 아들을 낳고 딸을 낳아 사랑하며 기르고, 임종할 때는 내 뜻을 자손에게 전해 만년까지 집안을 전한다. 무릇 성현은 천성(天性)을 통솔하여 공경으로 정성스럽게 한다.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무릇 하늘이 뜻으로 형체에 귀속하니 뜻에 맡겨 사용한다.
밝구나! ‘시(侍)’ 자(字)여. 어찌 믿지 않겠으며, 어찌 공경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생령(生靈)의 전경(前敬)으로 성(誠)에 이르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사물에 미혹됨을 타파하여 각각 천주(天主)를 모시는 근본이 있다. 천지의 무궁함과 변화의 적실(的實)함을 얻는다면 만사를 빨리 도달하여 하늘을 받들고 덕에 합치되는 실상(實常)을 안다. 근본이 적실하니, 벽(壁)에 의지하면 좋겠는가. 내게 향하면 좋겠는가. 사람이 아들을 낳아 살아서 집을 전해 주니 눈앞의 황홀함이고, 죽은 뒤 제사를 받드니 미혹으로 남은 정성이다.
그러나 전래풍속으로 죽은 뒤 제사를 받듬이 살아 있을 때보다 배나 더하니 어찌해서인가. 살아서 집을 전해 줌은 내게 있어 눈앞이니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이처럼 끝[末]을 취한다. 또 하물며 죽은 뒤에 마음을 미루는 것은 기묘한데 있는 것이니 어찌 감히 그 실상(實常)을 분석하여 논하겠는가. 살아서 집을 전하고 죽어서 마음을 미루니, 내가 마음을 미루게 하는가. 벽(壁)과 더불어 마음을 미루는가. 여섯 성인의 덕은 교화가 초목에까지 미쳐 간섭하지 않음이 없다. 마음을 주면 사람마다 도를 이루니 주고받는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 성인의 가르침과 성인의 덕은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으면 성심(聖心)과 신명(神明)이 내 마음을 비춘다. 주고받음을 논하면 벽(壁)에 의지하여 주겠는가. 사람에게 의지하여 주겠는가. 사람과 더불어 주고받음은 황홀하여 의심이 없다. 이로써 살펴보면 나를 향하여 자리를 설치함이 어찌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 ‘념(念)’자(字)를 논하면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생각하면 두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하늘의 덕과 스승의 은혜는 생각하면 있게 되고 잊으면 없게 된다. 하늘의 덕과 스승의 은혜는 생각하고 생각하여 잊지 않으면 지극한 교화와 지극한 기(氣)로 지성(至聖)에 이른다.
성훈(聖訓)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하늘이니 사람이 도이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큰 선생님의 끝이 없는 큰 도[무극대도]이다. 어찌해서인가. ‘사람은 하늘이다’에서 사람이란 하늘이 만물을 변화시켜 생기게 하고 뜻으로 형체에 귀속시켜 뜻에 맡겨 사용하는 것이다. 도는 큰 선생님이니 도란 시(侍) 자・정(定) 자・지(知) 자 세 글자로 천지를 밝히니 무궁의 근본이다. 천하에 포고하여 사람마다 덕에 합하고 도를 이루어 영세토록 잊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논하면 그 분석은 어렵다. 우매한 마음으로 헤아리면 처음 배워 덕을 세우고 ‘시천주(侍天主)’ 세 글자로 덕에 합하고, 다시 선생의 포덕(布德)으로 ‘만사지(萬事知)’ 세 글자로 받으면 대도견성(大道見聖)한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하는가. 화공(畵工)이 그림을 그리려면 천만가지로 헤아리지만, 붓을 대고 그림을 완성하려면, 마음으로 헤아리고 모양을 비추는 것이, 비유하면 벽(壁)에 의지하여 자리를 설치하는 것과 같다. 사람으로 도를 이루려는 자는 매번 성훈(聖訓)을 생각하고, 덕행(德行)을 체득하여 사용하고, 마음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으면 어찌 틈이 있겠는가. 간혹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묵묵히 바르게 앉아 공경히 주고받을 때를 생각하면 신명(神明)과 성도(聖道)가 황홀하게 내려오니 지극한 교화와 지극한 기(氣)가 때때로 밝지 않음이 없고, 때때로 가르치지 않음이 없다. 밝은 지혜를 합하여 사용하니 스스로 헤아려야 한다.

경통[敬通]

용담(龍潭)의 흐르는 물은 사해(四海)의 근원이고, 하늘은 한결같이 물을 만드는 근원이고,
검악(劍岳)에 있는 사람 한 조각 마음은, 끝이 없는 화생(化生)과 화육(化育)의 대덕(大德)이고,
훈도(薰陶)를 입음은 오직 의발을 전수하는데 있으니, 이것이 인성의 벼리[綱]이다.
도가 그 가운데 있으니 궁천을인(弓天乙人)이다. 운(運)이 높고 대(代)가 없으니 천황(天皇)과 지황(地皇)이다. 사람은 본체(本體)가 있으니 스스로 모시고 모심을 안다. 운(運)은 태고부터 돌고 도니 정(定)으로 정(定)을 안다. 때에는 사계절이 있으니 저절로 그러함을 안다. 자리를 펴고 법을 설하면 허령지각(虛靈知覺)하다. 벼리를 세우고 배우면 만사가 달통한다. 한갓 마음이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잘못 배우는 것을 이름이다. 오직 바른 마음에 있으니 순리(順理)가 이것으로, 참으로 이 법칙과 같다.

용담(龍潭)의 흐르는 물은 사해(四海)의 근원이다[龍潭水流四海源]
수운(水雲, 崔濟遇) 큰 선생님은 천황씨(天皇氏)로 고명(高明)의 근원이다
검악(劍岳)에 있는 사람 한 조각 마음[劍岳人在一片心]
해월(海月, 崔時亨) 선생님은 지황씨(地皇氏)로 박후(博厚)의 은덕(恩德)이다
훈도(薰陶)를 입음은 의발을 전수받는 은혜에 있다[荷蒙薰陶 傳鉢之恩]

개벽(開闢)이후 차차로 전수하여 성심(聖心) 5백 명이 도통한 연원이다. 이 어찌 도통(道統)이 아니면서 설법이 맥을 이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가르침을 받들어 다시 두 선생님에게로 들어가는 것이다. 차례로 사람을 고르는데, 우선은 5백 명 중에 좋은 인재 5십 명을 먼저 고른다는 뜻이다. 천지가 쪼개진 후에, 다시 포태(胞胎)의 수(數)를 정하여, 특별히 인황씨의 도를 펴니 강령(綱領)의 법이다. 삼가 무리 중에서 잘 뽑기를 바라나이다. 여러 군자들은 성실을 다하고 공경을 다하고, 보호하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고, 대자대비(大慈大悲)하고, 수련하여 도를 이루고, 하나로 그것을 꿰뚫어, 함께 대운(大運)에 참가하기를 천만 번 바라나이다.

하나. 그 전에는 다만 천주(天主)에게 입도(入道)하였고, 두 선생에게 입도하지 않았으니, 사문의 도통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은 하늘이고, 사람의 도는 큰 선생님의 도이니, 또한 어디에 있는가. 이와 같이 바로 잡지 않고 만들어 간다면 5백 대(代)가 지난 다음에 5백 인이 나와 당장 용담(龍潭)과 검악(劍岳) 두 분 선생의 훈도 아래에 상중하의 인재 5백 명이 나오지 않았다는 가르침이 헛되게 되니 옳겠는가. 선각(先覺)이 깨달은 뒤에 천리(天理)가 저절로 그러함을 알게 된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멍하니 벼리가 없는 벼리로 참[眞]으로 돌아가고 하나[一]로 돌아가는 길이 없게 된다. 이로써 각각 모두 법에 의하여 삼가 따르고 빨리 대도(大道)를 통할 일이다.
하나. 이번 설법은 비록 방금 두목(頭目)이 되었거나 혹은 상재(上材)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이다. 비록 아래에 있어 우선은 맡은 일이 없는 사람은 장차 뽑혀서 입도(入道)하게 될 것이다. 어찌 유독 두목만이겠는가. 이로써 헤아리고 두목을 믿지 말며, 스스로를 높이지 말며, 각각 모름지기 마음을 지키고 기(氣)를 바르게 하여, 선생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하나. 비록 각 도(道)에 의장(義長)이 있으나 각 도의 대접주(大接主)는 이 설법으로부터 두 선생의 법석(法席)에서 골고루 입도(入道)하기를 이로써 알릴 일이다.
하나. 비록 선각(先覺)과 후각(后覺)의 분별이 있고, 또한 상중하로 인재를 품평하였지만, 모두 용담(龍潭)의 연원에 있고, 검악(劍岳)의 도통 아래에 있으므로, 5백 명은 동열(同列)과 동품(同品)으로 형제와 같이 행동하고 설법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분명히 알려 줄 일이다.
하나. 이번 설법의 입규(立規)는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님의 유훈과 가르침을 받들어 이어서 행하는 것으로, 참으로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삼가 바라건대 여러 군자들은 이로써 각각 경명(敬命)과 순리(順理)를 다 알아서 큰 선생님의 대도(大道)와 대의(大義)를 밝힐 일이다.

경자년(1900년, 광무4) 가을 7월 7일 송암(松菴) 손천민(孫天民)

주석
계해년(癸亥年) 기해년(己亥年, 1899년)의 오기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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