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교구의 역사
대신사(大神師)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諱]은 제우(濟愚)이며 자는 성묵(性黙)이고 호는 수운재(水雲齋)이며 경주 가정리(稼亭里)에 거주하셨다. 포덕 1년[1860] 경신년 4월 5일에 하늘로부터 교(敎)를 받고 상제(上帝)와 더불어 문답하였는데, 상제께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吾心卽汝心]’라 하셨다. 포덕 2년[1861] 신유년 6월에는 사방의 어진 선비들에게 전도하시고, 다음해 1862년(임술년)에는 《동경대전(東經大全)》 4편과 가사(歌詞) 7~8편을 저술하셨다. 다음해 1863년(계해년) 8월에는 해월신사(海月神師)에게 전발(傳鉢)하시고, 또 다음해 1864(갑자년) 3월 10일에는 지목(指目)받아 대구(大邱)에서 돌아가셨다.
신사(神師)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시형(時亨)이다. 처음의 이름은 경상(慶翔)이고 호는 해월당(海月堂)이며 검곡(劍谷)에 거주하셨다. 대신사의 먼 친척으로 포덕 2년 신유년에는 대신사에게 교를 받으시고, 포덕 34년[1893] 계사년에는 대신사를 신원(伸寃)하는 일로 보은(報恩)의 장안(長安)에서 각도의 도인(道人) 수만 명을 모았는데 선무사(宣撫使) 어윤중(魚允仲)이 임금의 윤음(綸音)을 받들고 와서 타이르기를, ‘각자 돌아가 생업에 안주하라.’ 하였다. 이에 일시에 해산하였다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에 재차 경성(京城)에서 모여 복합(伏閤)하였는데, 10여일 만에 임금께 알려지거늘 신칙을 전하여 말하기를,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니 각자 돌아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 하였으므로 일시에 해산하였다. 갑오년의 난리가 일어나자 호남, 호서, 관동으로 떠돌아다니며 지내셨고, 1897년(정유년) 12월 24일에 의암성사(義菴聖師)에게 전발하셨으며, 다음해 1898년(무술년) 6월 2일에 경성에서 돌아가셨다.
성사(聖師)의 성은 손씨(孫氏)이고 성함은 병희(秉熙)이며 자는 응구(應九)이고 호는 의암(義菴)이며 청주의 대주리(大周里)에 거주하셨다. 포덕 25년[1884] 갑신년에 청주군의 서우순(徐虞淳)에게 교를 받으시고 1893년(계사년)과 1894년(갑오년) 두 해에 신사를 따르며 의무(義務)에 대해 복종하셨고, 그 후 중국 북경(北京)에 들어가 전도하였으며, 1897년(정유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신사로부터 전발을 받으시고, 그 후 동경(東京)에 들어가 학생 수십 사람을 모집하여 일을 마친 뒤에는 다시 본국으로 나와 삼전론(三戰論)을 저술하여 여러 교인을 깨우치도록 하였다. 1904년(갑진년) 봄에는 의정부와 법부에 상서(上書)하시고, 가을에는 민권회(民權會)를 설립하여 정부에 권고하고 관리를 공격함으로써 개명(開明)을 도모하셨다. 1906년(병오년) 봄에는 본국으로 돌아와 우리 도를 천하에 공포하시고, 경성에 총부(摠部)를 설치한 후에 각도와 각군에 대소 교구를 설립하여 우리 교의 목적을 드러내시고 교가서(敎家書) 수십 권을 저술하여 서울과 지방에 강습소를 설립하여 청년자제 수천 사람들을 가르치시니 우리 교가 더욱더 발전하여 사방에서 흠앙하고, 4과(科) 5관(款)을 정하여 수백만 교도로 하여금 행동을 일치하게 하였으며, 매년 3대(大) 기념일과 4대 기도일에 수천 명의 사람을 모아 성황을 이루게 하고, 또 천일기념(天日紀念) 다음날에는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에서 원유회(園遊會)를 크게 베풀어 하루 종일 가곡을 부르며 대중과 함께 즐기니 구경하는 자가 수만 인이나 되었다. 또 동대문 밖 30리 되는 지역인 우이동 상(上) 도선암(道詵菴) 아래에 봉황각(鳳凰閣) 두견대(杜鵑坮)를 건립하니 뛰어난 경치에 대해서는 이루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극 정성으로 두령(頭領)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연성 공부(煉性工夫)를 마치게 하였는데 기한이 49일이거나 혹은 105일이었다.
애석하다. 본 교구 내의 수암(洙菴) 송연호(宋年浩)씨여! 포덕 31년[1891] 신묘년에 같은 군에 사는 정영순(丁永詢)씨에게 교를 받았고 해월 문하를 수차례 왕복하였으며 1894년(갑오년)의 설상(雪霜)에서 홀로 고초를 겪었는데 의암성사가 환국하자 상경하여 얼굴을 뵈었고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서는 수암이라는 호를 받았으며,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지키다가 1908년(무신년) 8월에 명계(冥界)로 돌아갔다. 정원의 난초와 지초는 무성하고 푸르되 도를 지키지 못하고 세상과 함께 돌아갔으니 수암의 후사(後事)는 어찌 그리도 쓸쓸한가.
교훈장(敎訓長) 정영순(丁永詢) 씨는 포덕 31년[1891] 신묘년에 태인(泰仁)에 사는 유명실(劉明實)에게 교를 받고서 포덕한 것이 많아 수교자(受敎者)가 수천인이나 되었다. 1894년(갑오년)의 온갖 풍상을 겪었고, 지난 1904년(갑진년)과 1905년(을사년) 동안에는 성사를 따라 지휘하고 여러 교인으로 하여금 옛날 세상의 옛날 사람이 되는 데서 벗어나게 하였다. 다음해 1906년(병오년)부터 시작해서 교구를 설립한 후에는 구장(區長)을 맡고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사무를 보았다. 그런데 교구실이 없었기 때문에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느라 의식이 소홀하고 목적이 애매하게 되었지만 교구 내에서 교인의 가호가 100호 안팎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두 헐벗고 궁핍함으로 어떻게 정성과 노력을 쏟으면 교구실을 세울 수 있을까를 항상 근심하다가 1914년(갑인년) 가을 8월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고 협동하여 각각 보조금을 냈는데 도합 수백 환(圜)이 되었다. 이에 나무를 베고 돌을 옮겨와 초가(草家) 8칸을 건축하니, 의식이 정돈되었고 목적이 분명하게 되었다. 정성과 노력이 있는 곳에 어떤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아름답도다. 정영순씨의 지극한 마음과 정성은 하늘과 귀신을 감동시켰다고 이를 만하다. 원직(元職)은 교훈(敎訓)이고, 주직(住職)은 구장을 재차 맡았으며 또 두목과 직접 접촉해야 했으므로 해마다 3~4차례씩 상경하되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고서 부지런히 일하였고 천리 먼 길을 지척으로 여기면서 교구의 사무에 종사하였다.
-포덕 47년[1906]에는 2등 봉교(奉敎)를 맡았고, 48년에는 교령(敎領)을 맡았으며, 같은 해 5월 19일에는 구장을 맡았다.-
봉훈(奉訓) 송홍길(宋洪佶)씨는 포덕 32년[1891] 신묘년 11월 17일에 송연호(宋年浩)씨에게 교를 받았고, 1894년(갑오년)의 비바람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치성(致誠)이 한결같더니, 본 교구가 설립된 뒤로는 교무에 열심히 복무하였다. 포덕 50년 4월 17일에는 금융원(金融員)을 맡았고, 포덕 52년 3월 16일에는 구장을 맡았으며, 교구실을 자기의 집으로 빌려주면서 수 삼년 동안 근로하였는데 다른 사람은 따라올 수가 없을 정도였다. 1914년(갑인년) 가을 교구실을 새로 건축할 때에는 감독하는 일을 맡았고, 수많은 인부와 대목(大木) 여러 사람으로 교구실을 준공할 적에는 안팎으로 힘을 합쳐서 벼를 찧고 쌀을 정미하여 여러 달을 접대하였는데, 엄동설한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서 수고하였고 끝까지 게으르지 않았으니 씨의 정성과 노력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감동하도록 저 세상에 저절로 남게 될 것이다.
아, 김종문(金宗文)씨는 포덕 32년[1891]에 송연호씨에게 교를 받았고 눈 서리의 온갖 고난을 겪고 나서도 그 성심(誠心)을 바꾸지 않았다. 1906년(병오년)부터 교회가 분리되어 처음으로 교구실을 자기 집에 설치하였는데 금융원으로 부임하였고, 곤궁하고 어렵기가 매우 심하였는데도 교우(敎友)의 접대를 자신의 임무로 삼으면서 30여 사람을 포덕하기에 이르렀다. 1908년(무신년) 겨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뒤를 이을 아들이 하나도 없고 다만 부인과 딸뿐이었으므로 치성 또한 단절되었으니, 씨의 후사가 어찌 그리도 쓸쓸하단 말인가.
송주혁(宋柱爀)씨는 본군 점암면(占巖面) 봉명리(鳳鳴里) 사람이다. 포덕 32년 신묘년에 송연호씨에게 교를 받아 지극한 정성으로 도를 지키더니 포덕 52년[1910] 경술년 9월 29일에 본면의 전교사를 맡았고 1914년(갑인년) 9월에는 재차 맡았다. 같은 해 가을 8월 교구실을 건축할 때에는 남보다 더욱 부지런히 근로하였고, 다음해 1915년(을묘년)에는 금융원을 맡았으며, 1916년(병진년) 10월 14일에는 중망(衆望)을 따라 재차 맡았는데 일을 맡아 한결같게 하였다. 게다가 또 집이 교구실의 좌측에 위치하여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되었기 때문에 땔감, 양식, 반찬, 젓갈, 장류 등의 일에 이르러서도 궁핍하여 바닥나기라도 하면 떨어지지 않게 계속 대주어 교구의 생활이 자연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포덕 51년 11월 4일에는 3등 포장을 받았고, 포덕 52년 9월 29일에는 전교사를 맡았으며, 포덕 55년 10월 22일에는 전제원(典制員)을 맡았고 신앙(信仰)을 고치지 않았다.-
박성재(朴性才)씨는 박태화(朴泰和)의 조카이다. 재주와 기량이 좁지 않았고 부지런히 독서하더니 포덕 □□ 박태화씨에게 교를 받았고, 교구가 설립된 뒤에는 교사를 맡고서 강습생 수 십 사람을 교육하였다. 포덕 55년[1914] 10월 7일에 본 교구의 공선원(共宣員)을 맡고서 2년 동안 사무를 보았는데 씨의 수고하고 근면한 것에 대해서는 한 교구에서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사무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쉬어야 했기 때문에 사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김창규(金昌圭)씨 역시 고읍면(古邑面) 봉양리(鳳陽里) 사람이다. 심지(心志)가 확실하고 나무(木)를 다루는 일에 민첩하였다. 포덕 35년[1894] 갑오에 박백년(朴百年)씨에게 교를 받았고, 성실과 믿음이 더욱 돈독하였으므로 포덕 57년[1916]에 전제원을 맡았으며, 교구실을 건축할 때에는 도목(都木) 유석홍(柳錫洪) 씨와 끝까지 고생을 함께하여 교구실을 준공하였는데 씨의 임금을 의연금으로 내어 보조하도록 기재하였으니 정성과 노력이 없으면 이처럼 대단한 도량이 나올 수 있으리오. 반드시 하늘과 사람이 모두 감격했을 것이다.
장경채(張景采)씨는 고읍면(古邑面) 당두리(堂頭里)에 살던 사람이다. 가세가 빈한하였으되 분수를 지켜 재차 와서 거주하더니 포덕 35년 갑오년에 박백년 씨에게 교를 받았고, 교문(敎門)에 종사하더니 포덕 57년 10월 16일에 본교구의 전교사를 맡고서 교구와 40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일봉(鄭一鳳)씨는 도양면(道陽面) 비선동(飛仙洞)에 살던 사람이다. 지극히 가난하고 지극히 어려워 생업이 없었는데 포덕 51년[1910] 경술년에 그의 백부 정창도(鄭昌道)씨에게 교를 받았고, 포덕 56년 8월 23일에 전교사를 맡고서 50~60리쯤에서 왕래하되 멀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정창도(鄭昌道)씨는 포덕 33년[1892] 임진년 3월 2일에 김진화(金進化)씨에게 교를 받았고, 계사년[1893]에는 본군의 도인 수십 원(員)과 함께 금구(金溝) 원평(院坪) 구미산(龜尾山) 아래에 모여 연이어 10여 일을 머물다가 보은(報恩)의 장안(長安) 모임에 합쳐 진산(珍山)에 이르렀는데 선무사 어윤중(魚允仲)을 만나는 바람에 내려 왔다. 다음해 1894년(갑오년)에 풍우가 몰아칠 적에는 불 피워 밥해먹고 노숙생활을 하면서 호남과 호서의 주군(州郡)을 모두 돌아다녔고, 본군의 영주산(瀛洲山) 백운동(白雲洞)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깊은 산속에서 지내되 호랑이와 이리를 벗 삼아 지냈는데 그때 함께 고생한 사람이 서불암(西佛菴)의 두 스님이었다. 피난한 지 한 달 남짓이 지난 뒤에 집으로 돌아가 숨어 지냈는데 1896년(병신년) 겨울에 형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신석우(申錫雨)와 함께 같은 날 본군에서 체포되어 수감되니, 군수는 이순하(李舜夏)이고 관찰사는 윤웅렬(尹雄烈)이었다. 다음해 1897년(정유년) 가을 8월에 석방되어 귀가해서는 도가 밝아질 날만을 기다렸고, 1904년(갑진년)과 1905년(을사년)에는 민권회(民權會)에 들어가 송연호(宋年浩), 정영순(丁永詢), 김종문(金宗文) 제씨(諸氏)와 더불어 사무를 보았으니, 군수는 백남규(白南圭)였다. 다음해 1906년(병오년) 가을 7월에는 순창교구(淳昌敎區)의 서응원(庶應員)을 맡았고, 포덕 49년 8월 19일에는 본교구의 이문원(理文員)을 맡았으며, 포덕 50년 4월 17일에는 강사(講師)를 맡아 학생을 모집하여 수 십 명을 교육하였다. 포덕 55년 4월 10일에는 본교구의 구장을 맡았고, 같은 해 9월 11일에는 순천대교구(順天大敎區)의 전제원을 맡았으며, 포덕 57년 8월 29일에는 본교구의 구장을 재차 맡았고, 포덕 58년 3월에는 본교구의 역사를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