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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南原郡宗理院 남원군종리원
일러두기

南原郡東學史

東學은 大神師께서 門徒問答하실 際에 道則天道오
學則東學이라 하신 別名이엇다

布德二年 辛酉 六月에 大神師 湖南으로 向하사 山水風土와人
心風俗을 翫하시고 本郡 南門外 廣寒樓下 烏鵲橋过徐亨七
家에 來臨하사 數日 留宿타가 該家는 藥房인 故로 煩巨함
을 因하야 隔隣에 在한 徐亨七의 甥侄 孔昌允 家에 留宿하시
며 徐亨七 孔昌允 梁國三 徐公瑞 李敬九 梁得三 等에게 傳道
하사새 全州郡 申某(名未詳)가 大神師 來謁入道하고 還鄕
의 際에 路贐이업셔서 主人 孔昌允과 申氏 서로 憂慮할 際에 大神師默念良久에 曰主人의 內室衣藏架合內에
四兩錢이 잇다하신대 主人은 全然不知인바 內室에 入하야 衣藏
開觀한즉 果驗이라 此金으로써 申氏의 路贐을 給하다

仝年秋에 大神師ㅣ 隱跡庵(隱跡庵은 本郡 西十里 許蛟 龍山
城德密內大神師 居留하신 房號)에 㱕하사 煉性으로 秋冬을
過하시고 新舊歲를 迎送하실새 歌詞를 作하야 各地 門徒
에게 送하야 照應의★(忄+衣)를 叙하시다

仝三年 壬戌春에 大神師 隱跡庵으로붙어 還鄕하신 後
徐亨七 梁亨淑 徐公瑞 等이 龍潭亭에 來往하야 道脉을 通하
다가 仝五年 甲子 春에 大神師 慘變 後에 隱伏되다

仝三十年 己丑에 金洪箕 氏가 道의 大源을 更注來하야 布德
의 先驅가 되고 金榮基 金鍾友 李起冕 李起東 金鍾黃 柳泰
洪 諸氏가 布德의 機軸을 잡고 黃乃文 李圭淳 崔鎭岳 邊洪斗
鄭東勳 朴世春 趙東燮 諸氏의 同情으로 布德이 數千戶에 達
하다

仝三十三年 壬辰 冬에 大神師 伸寃의 件과 各部 官吏 土胡된 性
格을 改善키 爲하야 各道 敎人 三萬餘名이 公州觀察府狀을
提起타가 未果하고 全州 參禮驛에 又大會하야 徐秉學의 文筆
로 訢狀을 陳述하야 義訟코저할새 官吏壓迫의 威嚴으로 因하
야 訢狀을 告呈할 人이 업셔서 躕躇彷徨中에 右道에 全準琫 左 道에 柳泰洪 氏가 自願出頭하야 觀察府에 訢狀을 提呈한즉 觀
察使가 營將 金始豊을 命하야 火鉋軍(一名羅伍軍)三百餘名
을 率하고 全州 寒川에 來하야 通知曰東學魁首가 誰인지 來하
라함애 徐仁周(號日海) 答曰 營將 金始豊이가 此處로 來하라한
즉 始豊이 率兵施威하고 參禮에 卽來하야 兵卒을 左右에 羅
立하고 裂目視之曰爾等이 如何意思로 如此聚黨하야 太平聖
世에 民心을 眩惑케하느냐 徐仁周 答曰 忠君上孝父母의 道로 安
心修道하며 各安其業하거늘 爾官吏輩가 修道人을 陽害하야
掠財殺人하기에 御屈의 心을 不勝하야 義頌訟을 提呈한 일이
지엇지 民心을 眩惑케한 일이냐 金始豊이 拔釰★(壹+皮)地曰이 칼로 斬之하리라 칼바다라 한대 徐仁周 莞然이 笑曰 칼밧긔야 어렵
거안타칠내면 처라한대 金始豊이가 一時間이나 裂視하다가 正
坐하며 謝曰 내가 前日에 드른바 東學이 亂 黨이라 하기에 내의
堂侄兄弟가 東學에 犯하엿다 하긔로 絶對로 禁하엿더니 今日
에 와본즉 危言과 反對로 事宲寬大한 道인즉 上官에 先達
하야 依願觧結하여 줄터이니 各㱕其家하야 各修其道하고 各安
其業하라 하기로 卽時 散會할새 全羅道 敎人 金開南 全琫準
金德明 孫化仲 外 數百人이 茂長郡守에게 指目千兩을 推尋
次로 金溝 院坪에 到着하니 茂長座首와 吏房이 千兩錢을 輸
來하엿기로 推尋散會하엿더니 營門에서 依願觧結은 姑舍하고 指目이 前日보다 尤甚하거늘 誰某라 掘指한 道人은 風燦露宿
하면서 往事를 更起하기로 互相聯絡하야 翊年 癸巳 正月 初에
全琫準의 文筆로 昌義文을 著作하야 仝月 十日 寅時에 各郡
衙門에 揭示할새 南原은 金榮基 雲峰은 金聖基 谷城은 金
在弘 求禮는 柳泰洪 諸氏가 正刻時間에 粘付한 后 大神師 伸
寃次로 京城 光化門 前에 伏閤하고  報恩帳內와 金溝 院坪
兩處에 數百萬 道人이 會集하야 一过은 伏閤一过은 義訟을 提起
할새 慰撫使 魚允仲이 綸音을 輦에다 모시고恩으로 先來어늘 徐
秉學이 省察 千名을 帶同하고 郊外에 設席하고 魚允仲을 會
見할새 空數百葉을 廣佈하며 遮日을 空天에 列遮하고 淸水를 卓上에 奉奠하고 北向四拝한 後 綸音을 奉讀할새 綸音中
若聞父母之言인댄 不聞君王之言이랴 한 自節에 對하야 魚允仲
이가 扇子지로 打指曰 此句節을 仔細히 보라 함애 徐秉學이
高聲大責曰 이 逆賊놈 부채로 어대를 뚜리느냐 한대 魚允仲이
가 變色하며 發汗落地하고 失手함을 論罪하엿다 綸音事意
는 依願觧結하여줄터이니 各㱕其家하야 安心修道하고 各守
其業하라 함이기로 數百萬 敎人이 一日間에 散會㱕家하고 金溝
院坪에 會集 敎人은 一过各㱕其家케하고 誰某誰某한 道人 數千名
이 報恩을 向頭하야가다가 珍山郡에 到着하니 魚允仲이 院坪으
로 向來次에 彼此相逢하야 珍山郡 客舍에서 綸音을 奉讀할새 奉淸水北向四拝하고 魚允仲과 詰問하고 四千年의 國土와 四百餘年
의 宗社가 危汰한 此際에 修道者를 害之하고 外賊을 養成하니
保國安民을 엇터케함니까 하고 數千餘名이 一時에 伏地痛哭
하니 魚允仲의 所率故兵隊中에도 落淚者가만하엿다 이갓튼 慘
象을 끼치고 卽地 觧散할새 一过은 永同舘坪 황새말 宋秉
弼에세 指目錢千兩과 誤殺人三人推尋次로(宋秉弼이가 前項
郡守로 지낼 時에 道人 一名을 捉致重杖함에 其道人이 指目
金千兩을 納贖하고 杖毒으로 獄中에서 致死하니 其妻其女 二人이 聞
報하고 結項自死)한즉 宋秉弼 逃走하고 秉弼의 徒弟와 詰問
하다가 散㱕하엿더니 依願觧結은 捨置하고  指目이 太甚하 야 各郡 各面에 鄕約稧를 設立하고 報恩 及 院坪會에 參禮하고
來한 道人은 狗肉을 強飼(道家不食一四足之惡肉)하고 壓迫
이 無雙하야 如何言에든지 言必稱 東學하든 놈이라 하엿다

仝三十五年 甲午에 古阜에서 全琫準 金開南 孫化仲 金德明 諸
氏가 秕密謀事에 古阜郡守 趙秉甲이 虐民誤政함을 因하야
古阜 人民과 말못市에 合同會集하야 趙秉甲을 逐出하고 白山에
趙秉甲이가 虐民取利하야 儲藏하여 노흔 白米五百餘石을 흣
터 窮民을 救濟하고 其後에 民團은 漏散되고 但所餘者는 道人不
過三百餘名인대 道人의 會集團도 疑雲이 滿疊에 敎會의 機
味가 發生하러할 時에 全琫準이 拔釰揮空曰 若失此時면 吾道 人은 生去無路이니 若一人이리도 散去者가 잇시면 이 칼모베히
리라 함에 一人도 散者가 업심으로 會規를 團束하고 古阜
向頭할새 過路过一村落竹田에서 竹戟을 만드러 各히 一個式
가지고 古阜邑을 陷城하고 軍器를 圖得하며 白布帳二件을
製造하야 가지고 全州로 向頭할새 白山으로 院坪에 至하니 營
軍 三萬餘名이 追來하거늘 白山으로 還㱕하야 留陣타가 營
軍이 益益追進키로 古阜邑後 斗升山 黃土峴 下峰에 留陣하
고 白布帳을 치고 잇더니 營軍이 黃土峴 上峰에 留陣하고 放
鉋不絶하니 時인즉 黃昏이라 全琫準이 壯丁 三十名을 擇
選하야 新平壤笠에 木花슁이를 달고 바랑을 지이여 營軍 中에 드리보내며 約束하되 茂長負商軍이라하고 드래가 上上
峰에 잇다가 夜三更接戰時에 若此若此하라 한 後 三更에 白布
帳을 들고 放鉋出戰할새 上峰을 向하야 올나가니 營軍이 應
鉋出陣하야 兩陣鉋聲에 山川이 뒤넘는듯할 時에 右壯丁 三十
名이 上上峰에 立하야 營軍을 鉋殺하니 死者가 秋風落葉이다 그
럼으로 營軍이 大毁하야 斗升山 東便 層岩折壁으로 崩轉하야 死
傷者(自兵自殺者가尤多)가 不計其數이더라 東學軍이 該軍
器를 獲得하엿는대 四方道人이 多集하야 增軍되엿다 全
州로 向頭하야 白山에 至하니 京軍先鋒이 追來함으로 古阜
로 還㱕하야 羅州로 去한다 한다하고 茂長을 지내야 靈光 두내바#### 지재를 넘여 長城 化龍市에 至하니 京軍이 長城갈재(葛峙)로
넘어 化龍에 當하엿는지라 하는 數업시 仝月 坪里에 留陣하고 接戰
할새 장태(竹塒)七介를 製作※竹塒의 長은 卄一 尺이오 高는 七尺인대
兩頭에 十字形으로 轉軸을 하고 塒內에 궁굴 棟을 橫架하고 壯丁
五人이 右棟에다가 附腹하고 足을 前으로내발부면 善轉)하야
압에 둥구리고 其後에 千步대든 軍士 三十餘名을 羅立하고 全
琫準의 軍畵로 符작을 긔래 個人의 背後에 一丈式 부처 주
며 曰彈丸이 不犯이라 하고 늠戰할새 果然 彈丸이 비오듯 하되
肉身犯入(犯入치 못한 事는 誰某 十餘人이 彈丸을 공발에 싸고 가며
後로 던진 것)치 못한지라 그럼으로 死의 念慮는 업끼로 乘乘逐 進하니 京軍이 大毁逃走할새 該先鋒將李某(名未詳)는 其地에서
死하고 死傷者가 多數더라 飛天고、拂丸고 二座와 此外多數의
軍器를 獲得하야 가지고 全州로 向할새 泰仁에 至하니 東
學軍이 五萬有餘名에 達한지라 全州 龍頭峴에 卽至
하니 全州城 四面에 營軍이 密立守城하는대 龍頭峴에서
飛天고를 一發함에 西門이 破碎하니 滿城京軍이 一時毁
散하거늘 바로 城內에 入하니 城內 人民 男女老少가 避亂次
로 發動하거늘 四大門을 守直하고 曉喩하야 安心시키여 各
㱕其家케하얏다 仝 四月에 京軍大將 洪在箕가 京兵
과 平壤兵丁五千餘名을 率하고 全州 完山 七峰에 營軍과 合勢留陣하니 그 形勢雄壯한지라 連日接戰에 或勝或
敗하야 兩陣 死傷者가 多數한 中 一过放火하야 人民의 家
屋을 盡燒하고 東學軍의 形勢危急이러니 天慰神助하
사 京軍 大將 洪在箕와 觀察使 金文鉉(大院君의 暗助로 洪
在箕와 金文鉉에게 通信하야 請和시긘 것)이가 請和하거늘
卽時相和한 後 各處에 收馬收鉋하고 各郡에 昌義事務所
를 設立할새 每所에 執綱의 任을 두고 金開南이 本郡에 來
하야 五營(前營後營左營右營中營)을 設立하고 四十九
日留陣할새 每營에 一元將、二元將、軍守軍、營軍의 任을
置하고  省察、統察 數十人式을 置하여다 그럼으로 各道 各郡敎人 數十萬名이 本郡內에 聚集하야 四五朔을 經過
하고 全琫準은 金開南과 갗이 本郡에 왓다가 其後 各邑을
巡視할새朴鳳陽(一名文達)과 羅州에 某(姓名은未詳)가 民
包를 取合하야 東學軍과 極反對로 相支守城하며 散在 道
人을 捉致하야 或殺或刑할 時에 全琫準이 匹馬單騎로
羅州 守城中에 入하야 民包 大將과 酬問酬答後 捉囚 道人을
觧放시키여 該來하고  雲峰 守城中에도 匹馬單騎로 完
入하야 朴鳳陽과 問答할새 全琫準이 朴鳳陽을 曉喩하야
民包를 觧散하라 한 즉 朴曰 내가 民包를 聚合하야 守城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 金開南이가 날다래 金錢을 달나하기예 金錢도 幾百金을 주엿시되 그래도 나을 쥐긴다 하기에 民包을 組織한 일
이라함애 全琫準曰 그래면 罪는 지은대로 가는 것이니 民包를 觧
散하고 나를 따라가던지 入山修道를 하던지 하라하되 朴이 不應
하니 全琫準이 釰을 드러 朴鳳陽을 전주며 大責曰 네 목에는 칼
이 아니 드래간단 말이냐 함애 朴이 垂首論禮할고 觧散을 承諾한
後捉囚한 道人 崔鎭八外 五六人을 觧放식키여 該來하야 本部
에 在留하며 金開南 秕密相議에 晝夜八日間에 左右를 群出하
고 或爭或議하다가 全琫準은 先去 全州하고 金開南은 其後에 行
軍하야 全州에 이르니 新任 南原府使 李某(名未詳)가 彈丸을 실
고옴을 알고 李某를 卽地打殺하고 公州로 行軍하여다 其 後本郡에 남아잇는 道人은 興陽에 劉福滿、潭陽에 南應三、泰
仁에 鄭昌奎、金煉九、鎭安에 李士明、金溝에 金鳳德、任實에 崔
準弼(承雨)等大接이며 本郡大接金洪基、黃乃文、李圭淳、李
起東、朴世春、柳泰洪、邊洪斗、崔鎭※、金沼鎬、沈魯煥、趙東
等이 各히 數千人式率하고 仝年 十一月에 郡東 방애재(砧峙)에
서 雲峰 朴鳳陽과 接戰하다가 敗陣하야 死傷者가 數百人이엿다
그러고 다시 本部에 守城하고 기내다가 雲峰民包가 本郡民包와
서로 內應하야 仝十一月 晦項에 本郡城 四大門을 放火陷城하니 東
學軍은 散走四方할새 柳泰洪이 餘兵五百餘名을 率하고 順天
으로 向하얏는대 各郡民包가 蜂起하야 仝十二月 六日에 順天郡도 民包에게 陷城을 當하고  東學軍은 柳風餘蕩으로 散走 四
方하야 奠接無處되엿다 道人 金洪基、李圭淳、黃乃文、李
士明、邊洪斗、崔鎭岳、沈魯煥、金沼鎬 外 數百人이 甲午 十二
月로 乙未春夏까지 南原市、獒樹市 及 各方面 都會地에서 釰
銃의 寃魂이 되고 此外 生存 道人도 蕩敗家産에 亡命逃走로
流離丐乞하야 轉到 無處者 數百人이엿다

全琫準 金開南은 公州에서 敗陣하야 金開南은 全州에서 銃殺
을 當하고 全琫準은 淳昌民包에게 잡히여 重傷을 當하고 京軍
金東植에게 捉囚되야 羅州로 向할새 雲峰 朴鳳陽이가 金東
植의 後를 따라 羅州에 가서 도로 金東植에 捕捉되야 全琫準 孫 化仲과 갗이 京城으로 잡혀가서 典獄에 갗이여섯다과 後 全琫準은
十餘次 公判에 義氣를 杖立하고 奸巧의 訊問을 準責하며 終末
受刑 終命의 塲에 雲峰 朴鳳陽도 갗이 處刑 終命하래할 際
에 全琫準曰 내의 意見을 알수업다 네의 恩人도 쥐긔고 寃讎
도 쥐긔러 한 일은 何故이냐 함애 京軍이 理由를 反問하거늘 全曰
우리가 네의를 잡우랴고 昌義하얏다가 우리가 雲峰 朴鳳陽에게
잡이여서 너의를 잡지 모집지 못하엿시니 우리는 네의게 寃讎어
니와 朴鳳陽은 네의 恩이 아니냐한대 京軍이 朴鳳陽을 불너
全琫準의 발과 갗이된 理由를 무른즉 果若其言으로 朴鳳
陽이가 東學亂에 成功한 人이라 하고 善送歸家하니 朴鳳陽의 身命保存은 全琫準의 言德이더라

仝三十六年 乙未秋에 張南善、金鍾黃、河榮錫、柳泰洪、金在
泓、朴進暻 諸賢이 舊蹟을 引續하야 布德을 全務하엿다 그런
대 布德을 全務하나 指目의 觸忤에 道人끼리 서로 만나도 他人所
視에는 深厚한 溫情을 表見치 못하고 서로 路人視하듯 하며 서로
눈(目)치로써 心志 相通하야서 過去風★(少/土)餘毒에 奠接無處
로 精神일코 잇는 道人 秕密히 團束勸喩하야서 機軸을 잡아 風
燦露宿하면서 由來한 事實은 筆言으로 다 못할 것

仝三十九年 戊戌 六月 二日에 海月神師 還元後 指目과 仝四十一年
庚子에聖師꺼서設法式을擧行하신後指目과仝四十五年 甲 辰에 一進會 設立 以後 指目中入死出生의 事般은 一般所知에 讓
하고 반을 맷심니라

餘言으로 한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數十間 過去를 記錄
하면서 엇지 甲午로써 標準하리오 마는 多年中에 甲午年이
有理味多事함으로써 甲午史라 하엿다 이 記詞가 말
도 잘되지 못하고 글도 잘되지 못하여 시나 말과 글로 볼
것이 아니오 過去事를 參考하기 爲하야 先後업시 記錄할
제 本人의 微知로써 柳泰洪氏의 如縷說을 거두어서 이갗
이 한 것입니다

布德六五、一〇、二二、南原郡 主任 宗理師 崔炳鉉 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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