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附] 운봉군 교구사
본시 교는 남원의 원류가 파급된 때는 동 34년[1893] 계사 3월 9일이다. 그런데 무쌍(無雙)의 지목(地目)으로 십 여월 간 숨어 지내다가 종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동 35년[1894] 갑오에 비정(秕政)을 개혁하고자 대운동될 때에 운봉 전부는 동학반대당인 민포(民包) 중에서 고난으로 보냈다.
동 45년[1904] 갑진에 성사께서 진보회를 조직하고 단발할 때에 김성재씨가 중추의 기관을 잡아 앞서 감에 유지제현이 발기에 동정하여 동년 □월에 지부회를 창립하고 근무하다.
동년 11월에 진보회를 일진회로 전환할 때에 김성재, 황두현(黃斗顯), 김병구(金柄九) 제씨가 집무하고 김성재씨가 가산을 기울여 경리하였다. 동 47년[1906] 병오 5월에 퇴회귀교의 종령(宗令)에 의하여 교구를 설립하지 못하고 남원으로 종무(從務)하다가 운봉, 함양에 수 십호를 조직하여 동 48년[1907] 정미 12월에 교구실을 김성재씨 사제에 창립하고 시무하다.
동 50년[1909] 기유 2월에 김진택(金進澤)을 선발하여 중앙총부 교리강습소에 입학하다. 동 54년[1913] 계축 4월에 교구를 유지하기 곤란하여 남원 교구로 합병하다.
직원 경질; 포덕 48년[1907]부터 동 54년[1913] 3월까지 교구장은 김성재, 이문원은 김진택, 전제원은 김희중(金熙仲), 금융원은 이종칠(李鍾七), 공선원 임석택(林釋澤).
면직원 경질; 산내면(山內面) 전교사 김봉섭(金奉涉), 김병구, 김상정(金相鼎)이며 동면(東面) 전교사 김동휘(金東徽), 황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