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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남원군종리원 외 南原郡宗理院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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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군동학사

동학은 대신사께서 문도와 문답하실 때에 도즉천도(道則天道)요 학즉동학(學則東學)이라 하신 별명이었다.

포덕 2년[1861] 신유 6월에 대신사가 호남으로 향하시어 산수풍토와 인심풍속을 살펴보시고 본군 남문 밖 광한루 아래 오작교 옆 서형칠 집에 와서 머물며 수일을 유숙하다가 그 집은 약방인 까닭에 번잡함으로 인하여 부근에 있는 서형칠의 조카 공창윤 집에 유숙하시며 서형칠, 공창윤,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에게 전도하실 때 전주군 신모(申某)(이름미상)가 대신사에게 와서 입도(入道)를 청하고 귀향할 즈음에 노자가 없어서 주인 공창윤과 신씨가 서로 우려할 때에 대신사께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 되어 말씀하시길 주인의 내실 의장가사(依藏架舍)(속어에 때도리) 사이에 돈 4량이 있다하신데 주인은 전혀 알지 못한바 내실에 들어가 의장을 열어본 즉 과연 그러하더라. 이 돈으로써 신씨의 노자를 주었다.

동년 가을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은적암은 본군 서쪽 10리쯤 교룡산성 덕밀암 내 대신사께서 거주하신 방호)에 돌아와서 연성으로 가을 겨울을 지내시고 신구 해를 보내고 맞이하실 때 가사를 지어 각지 문도에게 보내어 천지조화에 대한 품은 뜻[조응(照應)의 회(懷)]을 서술하시다.

동 3년[1862] 임술 봄에 대신사께서 은적암으로부터 귀향하신 후에 서형칠, 양형숙, 서공서 등이 용담정에 왕래하여 도맥을 통하다가 동 5년[1864] 갑자 봄에 대신사의 참변 후에 은둔하였다.

동 30년[1889] 기축에 김홍기씨가 도의 대원을 다시 왕래하여 포덕의 선구자가 되고 김영기, 김종우, 이기면, 이기동, 김종황, 유태홍 제씨가 포덕의 기틀을 잡고 황내문, 이규순, 최진악, 변홍두, 정동훈, 박세춘, 조동섭 제씨의 동정으로 포덕이 수 천호에 달하였다.

동 33년[1892] 임진 겨울에 대신사 신원(伸寃)의 일과 각 군 관리 토호된 성격을 개선하기 위하여 각도 교인 3만 여명이 공주관찰부에 소장을 제기하다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전주 삼례역에 다시 대회(大會)하여 서병학(徐秉學)의 문필로 소장을 진술하여 의송(義訟)하고자 할 때 관리 압박의 위엄으로 인하여 소장을 올릴 인물이 없어서 주저방황 중에 우도(右道)에 전봉준, 좌도(左道)에 유태홍씨가 자원 출두하여 관찰부에 소장을 올린 즉 관찰사가 영장 김시풍에게 명하여 화포군(일명 나오군(羅伍軍)) 3백여 명을 이끌고 전주 한천(寒川)에 와서 통지하여 말하기를, 동학 괴수가 누구인지 오너라 함에 서인주(徐仁周)(호 일해(日海))가 답하여 말하기를, 영장 김시풍이 이곳으로 와라 한 즉 시풍이 병사를 이끌고 위세를 펼치며 삼례에 즉시 와서 병졸을 좌우에 나열하여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무슨 의사로 이처럼 취당(聚黨)하여 태평성세에 민심을 현혹케 하느냐? 서인주가 답하여 말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道)로 안심수도(安心修道)하며 각자 생업에 안정하거늘 너희 관리배가 수도인을 상해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기에 억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의송을 제기한 일이지 어찌 민심을 현혹케 한 일이냐? 김시풍이 검을 뽑아 땅을 치며 말하기를, 이 칼로 목을 베리라 칼 받아라 한 즉 서인주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칼 받기야 어렵지 않다 칠 테면 처라 한 즉 김시풍이 한 시간이나 눈을 부릅뜨다가 앉으며 사과하고 말하기를, 내가 전일에 들은바 동학이 난당(亂黨)이라 하기에 나의 오촌 조카 형제가 동학에 관여하였다 하기로 절대로 금하였더니 금일에 와 본 즉 전에 말과 반대로 사실 관대한 도(道)인즉 상관에게 아뢰어 원하는 바대로 해결하여 줄 터이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각자의 도를 수행하고 자기의 생업에 안정하라고 하여 즉시 산회할 때 전라도 교인 김개남, 전봉준, 김덕명, 손화중 외 수 백인이 무장 군수에게 지목전(指目錢) 천량을 추심하기 위해 금구 원평에 도착하니 무장 좌수와 이방이 천량 돈을 보내와서 추심 산회하였더니 영문(營門)에서 원하는 바대로 해결은 고사하고 지목이 전일보다 더욱 심하거늘 아무개라 손꼽히는 도인은 풍찬노숙하면서 지난 일을 다시 일으키기로 하고 서로 연락하여 다음해 계사 정월 초에 전봉준의 문필로 창의문을 지어서 동월 10일 인시(寅時)에 각 군 아문에 게시할 때 남원은 김영기, 운봉은 김성기, 곡성은 김재홍, 구례는 유태홍 제씨가 정각 시간에 첨부한 후 대신사의 신원을 위해 경성 광화문 앞에 복합하고 또 보은 장내와 금구 원평 두 곳에 수백만 도인이 회집하여 일부는 복합, 일부는 의송을 제기할 때, 위무사 어윤중이 윤음(綸音)을 수레[輦]에 모시고 보은으로 앞서 오거늘 서병학이 성찰(省察) 천명을 대동하고 교외에 설석(設席)하고 어윤중을 회견할 때 공수백의(空數百義)를 광포하여 차일(遮日)을 하늘에 벌려서 치고 청수(淸水)를 탁상에 봉전(奉奠)하고 북쪽을 향해 4배한 후 윤음을 봉독할 때 윤음 중 부모의 말도 듣는데 군주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랴[若聞父母之言인대 不聞君主之言이랴]한 구절에 대하여 어윤중이 부채 꼭지로 손가락을 치며 말하기를, 이 구절을 자세히 보라하니 서병학이 큰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 역적 놈 부채로 어디를 두드리느냐 하니 어윤중이 안색이 변하여 식은땀을 땅에 떨어트릴 정도로 그 실수함을 논죄(論罪)하였다. 윤음의 뜻은 원하는 바대로 해결하여 줄 터이니 각자 귀가하여 안심수도(安心修道)하고 각자의 생업을 지켜라 하기로 수백만 교인이 하루 사이에 산회귀가하고 금구 원평에 회집한 교인은 일부 각자 귀가하고 아무 아무개 도인 수천 명이 보은을 향하여 가다가 진산군에 도착하여 어윤중이 원평으로 향해 오던 중 서로 상봉하여 진산군 객사에서 윤음을 봉독할 때 청수를 봉전하고 북쪽을 향해 4배하고 어윤중과 힐문(詰問)하되, 4천여 년의 국토와 4백여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한 이때에 수도자를 해치고 외적을 양성하니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어떻게 합니까 하고 수천여명이 일시에 땅에 엎드려 통곡하니 어윤중이 이끌고 온 병사 중에도 눈물을 흘리는 자가 많았다. 이 같은 참상을 끼치고 그곳에서 해산할 때 일부는 영동 관평(館坪) 황새말 송병필(宋秉弼)에게 지목전 천량과 오살인(誤殺人) 3인 추심 일로(송병필이 만경 군수로 지낼 때에 도인 1명을 잡아 무겁게 곤장을 쳐서 그 도인이 지목전 천량을 납속하고 장독으로 옥중에서 죽음에 이르니 그의 처와 두 딸이 소식을 듣고 목을 메 자살함) 간즉 송병필은 도주하고 병필의 종제와 힐문하다가 흩어져 돌아왔더니 원하는 대로의 해결은 고사하고 또 지목이 더욱 심하여 각군 각면에 향약계(鄕約稧)를 설립하고, 보은 및 원평 회집에 참례하고 돌아온 도인은 개고기[狗肉]를 절대로 먹지않고(道家不食一四足之惡肉; 도가에서 먹지 아니할 것은 한가지 네발짐승의 나쁜 고기이다) 압박이 무쌍하여 어떤 말을 하던지 언필칭(言必稱) 동학하던 놈이라 하였다.

동 35년[1894] 갑오에 고부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제씨가 비밀모사에 고부 군수 조병갑이 백성을 학대하고 그릇된 정치로 인하여 고부 인민과 말못 장시[市]에 합동 회집하여 조병갑을 축출하고 백산(白山)에 조병갑이 백성을 괴롭히고 거두어 모아 저장하여 놓은 백미 5백여 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후에 민단(民團)은 점차 흩어지게 되었고 단지 그곳에 남은 자는 불과 도인 3백여 명이었는데, 도인이 모인 집단도 의심이 점차 커져 해산할 기미가 일어나려고 할 때에 전봉준이 칼을 빼들고 공중에 휘두르며 말하기를, 만약 이때를 놓치면 우리 도인은 살아갈 길이 없으니 만약 한사람이라도 흩어지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베리라 하니 한사람도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이에 회규(會規)를 단속하고 고부로 향할 때 지나가던 길의 한 촌락 대나무밭에서 죽창을 만들어 하나씩 가지고 고부읍을 함락시키고 군기(軍器)를 얻으려 꾀하며 백포장(白布帳) 2건을 제조하여 가지고 전주로 향할 때 백산(白山)을 거쳐 원평에 이르러 영군(營軍) 3만 여명이 쫓아오거늘 백산으로 되돌아가 진을 쳤으나 영군이 점점 다가오니 고부읍 뒤 두승산(斗升山) 황토현 하봉(下峰)에 진을 치고 백포장을 치고 있었는데 영군이 황토현 상봉에 진을 치고 연이어 포를 쏘니 때인즉 황혼이라. 전봉준이 장정 30명을 가려 뽑아 신평양립(新平壤笠)에 목화송이를 달고 바랑을 지어 영군 중에 들여보내며 약속하되 무장(茂長) 부상꾼[負商軍]이라 하고 들어가 상상봉에 있다가 밤 3경(三更, 자정 전후) 접전 시에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한 후 3경에 백포장을 들고 포를 쏘며 싸움터로 나가 상봉을 향하여 올라가니 영군도 대응하여 포를 쏘며 싸움터로 나와 두 진영의 포성(砲聲)에 산천이 뒤집힐 듯 할 때에 위 장정 30명이 상상봉에 서서 영군을 포살하니 죽은 자가 추풍낙엽이라. 그럼으로 감영군이 크게 곤란하여 두승산 동쪽 여러 층으로 쌓인 바위 낭떠러지로 무너져 도망가니 사상자(자살자가 매우 많았다)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더라. 동학군이 이들 군기를 획득하였는데 사방 도인이 많이 모여 증군(增軍)되었다. 또 전주로 향하여 가다가 백산에 이르니 경군(京軍) 선봉이 온다함으로 고부로 되돌아가 나주로 간다 하고 무장을 지나서 영광 두내바지재를 넘어 장성 화룡(化龍) 장시에 이르니 경군이 장성 갈재(葛峙)로 넘어 화룡에 당도하였는지라. 하는 수없이 동 월평리(月坪里)에 진을 치고 접전할 때에 장태(竹塒) 7개를 제작(장태의 길이는 21척이고 높이는 7척인데 양끝에 십자형으로 굴대(軸)를 달고 태 안에 둥근 동(棟)을 가로질러 걸쳐 장정 5인이 동(棟)을 배에 붙이고 발을 앞으로 내 밟으며 나감)하여 앞쪽에 원형으로 배치하고[둥구리고] 그 뒤에 천보(千步) 쯤에 군사 30여 명을 나열하고 전봉준이 붓으로 부적을 그려 개인의 등 뒤에 1장씩 부쳐주며 말하기를, 탄환이 뚫지 못할 것이라 하고는 전투할 때 과연 탄환이 비 오듯 하였으나 육신에 들어오지[犯入](들어오지 못한 일은 아무개 10여인이 탄환을 공발에 싸고 가며 뒤로 던진 것) 못한지라 그럼으로 죽을 염려는 없기로 더욱 앞으로 나가니 경군이 크게 무너져 도주할 때 그 선봉장 이모(이름 미상)는 그곳에서 죽었고 사상자가 다수더라. 비천고(飛天고), 불환고(佛丸고) 2좌와 그 외 다수의 군기를 획득하여 가지고 전주로 향할 때 태인에 이르니 동학군이 5만 여명에 달하였다. 전주 용두현(龍頭峴)에 도착하니 전주성 4면에 감영군이 촘촘히 서서 성을 지키는데 용두현에서 비천고를 한 발 쏘아 서문(西門)이 파쇄되니 성에 머물던 경군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거늘 바로 성 안으로 들어가니 성 안 인민 남녀노소가 피난하려고 우왕좌왕하거늘 사대문을 지키고 타일러 안심시켜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동 4월에 경군대장 홍재기(洪在箕)가 서울병정[京兵]과 평양병정 5천여 명을 이끌고 전주 완산 칠봉(七峰)에 감영군과 합세하여 진을 치니 그 형세가 웅장한지라. 연일 접전에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져서 양쪽 진영의 사상자가 많은 가운데 한편 불을 질러 인민의 가옥을 불태워버리고 동학군의 형세가 위태로웠으나 천우신조하시어 경군대장 홍재기와 관찰사 김문현(金文鉉)(대원군의 방조로 홍재기와 김문현에게 통신하여 강화(講和)하라고 시킨 것)이 강화를 요청하거늘 즉시 서로 강화(相和)한 후 각처에 말을 거두고 포(砲)를 모으며[收馬收砲] 각군에 창의사무소를 설립할 때 매소(每所)에 집강(執綱)의 직임을 두고 김개남이 본군에 와서 5영(전영, 후영, 좌영, 우영, 중영)을 설립하고 49일 진을 칠 때 매영에 일원장, 이원장, 군수군, 영군의 직임을 두고 또 성찰, 통찰 수십 인씩을 두었다. 그럼으로 각도 각군 교인 수십만명이 본군 내에 모여 4~5개월을 경과하고 전봉준은 김개남과 같이 본군에 왔다가 그 후 각 읍을 순시할 무렵 그 때에 운봉에 박봉양(朴鳳陽, 일명 문달(文達)과 나주의 모(성명은 미상)가 민포를 수합하여 동학군과 정 반대로 서로 의지하여 성을 지키며 산재한 도인을 체포하여 혹은 죽이고 혹은 형장을 칠 때에 전봉준이 혼자 한 필의 말을 타고 수비하던 나주 성으로 들어가 민포대장과 회담[酬問酬答]한 후 잡혀 갇힌 도인을 해방시켜 데려 오고 또 수비하던 운봉 수성군에게도 혼자 한 필의 말을 타고 들어가 박봉양과 문답할 때 전봉준이 박봉양을 타일러 민포를 해산하라한 즉 박이 말하기를, 내가 민포를 취합하여 수성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김개남이 날더러 금전을 달라하기에 금전도 기백금을 주었는데 그래도 나를 죽인다고 하기에 민포를 조직한 일이라 함에 전봉준이 말하기를, 그러면 죄는 지은대로 가는 것이니 민포를 해산하고 나를 따라가던지 입산수도를 하던지 하라 하니, 박이 불응하니 전봉준이 검을 들어 박봉양을 견주며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네 목에는 칼이 아니 들어간단 말이냐 함에 박이 머리를 조아려 예를 보이고[垂首諭禮] 해산을 승낙한 후 잡아 가둔 도인 최진팔(崔鎭八) 외 5~6인을 해방시켜 데려 와서 본군에 머물러 있으며 김개남과 비밀상의를 밤낮 8일 동안에 좌우를 물리치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의논하다가 전봉준은 먼저 전주로 가고 김개남은 그 후에 행군하여 전주에 이르니 신임 남원부사 이모(이름 미상)가 탄환을 실고 온다는 것을 알고 이모를 그곳에서 타살하고 공주로 행군하였다. 그 후 본군에 남아 있는 도인은 흥양(興陽)에 유복만, 담양에 남응삼, 태인에 정창규, 김연구, 진안에 이사명, 금구에 김봉덕, 임실에 최준필(승우(承雨)) 등의 대접(大接)이며 본군 대접인 김홍기, 황내문, 이규순, 이기동, 박세춘, 유태홍, 변홍두, 최진악, 김연호(金沿鎬), 심노환, 조동섭 등이 각각 수천인씩 이끌고 동년 11월에 군 동쪽 방애재(砧峙)에서 운봉 박봉양과 접전하다가 패배하여 사상자가 수백인이었다. 그리고 다시 본군에 수성하고 지내다가 운봉 민포가 본군 민포와 서로 내응하여 동 11월 그믐 무렵 본군의 성 사대문에 불을 지르고 성을 함락하니 동학군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할 때 유태홍은 남은 병사 5백여 명을 이끌고 순천으로 향하였는데 각군 민포가 봉기하여 동 12월 6일에 순천군도 민포에게 성을 함락당하고 또 동학군은 유풍여탕[柳風餘蕩]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머물러 살 곳이 없게 되었다. 도인 김홍기, 이규순, 황내문, 이사명, 변홍두, 최진악, 심노환, 김연호 외 수백인이 갑오 12월부터 을미 봄 여름까지 남원장터 오수장터 및 각 방면 도회지에서 총칼의 원혼이 되고 그 외 생존 도인도 가산탕진하고 망명도주로 유리걸식하여 거처없이 떠도는 자가 수백 인이었다.

전봉준, 김개남은 공주에서 패배하여 김개남은 전주에서 총살을 당하고 전봉준은 순창 민포에게 잡혀서 중상을 당하고 경군 김동식(金東植)에게 잡혀서 나주로 향할 때 운봉 박봉양이 김동식의 뒤를 따라 나주에 가서 도로 김동식에게 체포되어 전봉준, 손화중과 같이 경성으로 잡혀가서 전옥(典獄)에 갇혔다. 이후 전봉준은 10여차 공판에서 의기(義氣)를 세우고 간교의 신문을 엄히 꾸짖으며 마침내 사형의 형을 받은 자리에 운봉 박봉양도 같이 사형으로 처형하려고 할 즈음에 전봉준이 말하기를 너의 의견을 알 수 없다. 너의 은인도 죽이고 원수도 죽이려고 한 일은 무엇 때문이냐 함에 경군이 이유를 반문하거늘 전봉준이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잡으려고 창의(昌義)하였다가 우리가 운봉 박봉양에게 잡혀서 너희를 찾지도 잡지도 못하였으니 우리는 너희에게 원수이거니와 박봉양은 너의 은인이 아니냐 하니 경군이 박봉양을 불러 전봉준의 말과 같이 된 이유를 물은즉 과연 그의 말과 같음으로 박봉양이 동학난에 공이 있는 사람이라 하고 보내어 집에 돌아가게 하니 박봉양이 생명을 보존한 것은 전봉준의 말 덕분이더라.

동 36년[1895] 을미 가을에 장남선, 김종황, 하영석, 유태홍, 김재홍, 박진경 제현이 구적(舊蹟)을 이어 받아 포덕을 전무(全務)하였다. 그런데 포덕을 전무하나 지목(指目)의 분노 [觸忤]에 도인끼리 서로 만나도 타인이 볼 때에는 깊고 두터운 온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서로 길에서 만난 사람 보듯이 하며 서로 눈치로써 심지(心志)를 상통하여서 과거 풍찬노숙의 여독(餘毒)에 머물러 살아갈 곳 없이 정신 잃고 있는 도인을 비밀리에 단속하고 권유하여 중심을 잡아 풍찬노숙하면서 지금까지 온 사실은 글과 말로 다 못할 것임.

동 39년[1898] 무술 6월 2일에 해월 신사 환원(環元) 후 지목과 동 41년[1900] 경자에 성사(聖師)께서 설법식을 거행하신 후, 지목과 동 45년[1904] 갑진에 일진회 설립 이후 지목 중 죽음에 들어가 살아나온[入死出生] 사실은 일반이 아는 바대로 넘기고 그만 끝을 맺습니다.

나머지 말로 한다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의 과거를 기록하면서 어찌 갑오로써 표준하리오마는 여러 해 중에 갑오년이 의미 있는 일이 많음으로써 갑오사(甲午史)라 하였다. 이 기록[記詞]이 말도 잘되지 못하고 글도 잘되지 못하였으나 말과 글로 볼 것이 아니요, 과거사를 참고하기 위하여 앞뒤 없이 기록할 때 본인의 부족한 지식으로 유태홍씨의 비단과 같은 말씀을 거두어서 이 같이 한 것입니다.

포덕 65년[1924] 10월 22일 남원군 주임 종리사 최병현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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