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實東學史
東學이 任實에 들어온 것은 只今으로부터 百壹年前 布德 十四年 癸酉 三月에 崔鳳成
字 贊國氏가 海月神師에게 入敎하사 秘密히 敎道를 入敎식히여 隱道로서 實行 數
百戶에 達하였으며 布德 三十三年 단기 四二二五 서기 一八九二 壬辰建 壬子 十一月 三日
丁亥에 忠淸 全羅 兩道에서 萬餘名 敎人 參禮에 모여서 忠淸道와 全羅道의 兩道
監査에게 大神師 伸寃과 東學敎道에 對한 탄압금지를 요청하였다. 양 감사는 敎祖
伸寃은 監査의 權限이 않이라고 하여 거절되였으나 하급 官史들의 탄압에 대하여는
금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었다. 우리 東學의 社會的 運動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다
음해인 布德 三四年 단기 四二二六 서기 一八九三 癸巳 三月에는 다수 敎人들이 上京하
여 박광호를 疎頭로 하여 伏閤上疏를 벌였다. 이 복합상소는 국왕의 曉諭로서
해산되였으나 우리 敎人들의 계속적인 상경으로 인하여 한때 서울의 人心은 흉
흉하였고 서울에 남은 우리 東學교인들은 외국공관과 기독교 교회당들에 척쇄척
양의 쾌서를 붙였다. 日本영사관 문전에 붙인 쾌서문 중에는 日本은 임진란이후 우
리의 불망의 원수국임을 논하고 모든 日本人이 급히 환국을 주장하였다. 우리 동학
에서 표면화한 척왜운동의 시작이였다. 各國 公事官이 다같이 이같은 사실에 모두 긴
장하였는데 특히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을 섯던 일본영사는 이때 가장 예민한 반응
을 이르키여 일본거루민에게 東學道들의 기염이 과연 치성하게 되면은 우리 거루민에
대하여 여하한 위험을 늦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하고 철수준비 명령을 버리
기까지 하였다 한다. 복합상소에서 大神師 伸寃의 目的을 達成치 못한 우리 東學교인들
은 곧 충청도 報恩에 聚會하였다. 여기에 모여든 우리 교인의 수는 자그만치 貳萬
餘名에 達하였는데 石堞을 쌓고 斥倭斥洋倡義라는 旗幟를 세웠다. 이로부터 우리 東
學의 運動은 대신사 신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의를 외세 특히 일본의 제국주
의적 侵略을 排斥하는 抗日運動으로 또한 除暴救民을 主張하는 貪官汚吏의 배격
運動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해산 권유에 대한 東學교인들의 금번의 창의
는 결탄문 딴 연고가 아니오 오로지 척왜척양에 義를 위한 것이니 中止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를 당황하여 魚元仲을 宣撫使로 파견하여 王命을 傳하
고 解散을 종용하였으나 잘 듯지 않았다. 그러나 식량에 곤핍을 느낀 우리 동학교
인들은 군대동원의 시기를 앞두고 일단 해산하고 말았다. 우리 동학교인들은 이 보
은취회를 기회로 그 힘을 이같이 內外에 과시하게까지 이르렀다. 이에 따라 동학교세는 보
다 발전하게 되였고 정부의 동학금지령은 사실상 공문화되고 말았다.
한편 동학세력의 이같은 신장은 국내외에서 정치적의로 주의를 끌게 되여 우리나라를
노리는 日淸兩國의 크게 注目하는 바가 되였다. 이런 중에 布德 三五年 단기 四二二七 서기
一八九四 甲午 二月에 古阜민란을 게기로 동학혁명이 발생되여 동 三月 二十一日에 전봉준이
고부백산을 점거했다.(이때 임실의 경우)
제이세 교조 해월신사께서는 제一차 봉기시는 어디까지나 政敎分離의 立場을 고수하
여 무력항장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海月神師를 中心의로 하는 北接과
全奉準의 南接과는 미묘한 분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거병 시는 그같
은 입장을 초월하여 救國抗日이라는 旗懺下에 南北接이 혼연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페게 된 것
이다. 布德 三三年 단기 四二二五 서기 一八九二 壬辰 十一月 三日 參禮 聚合 모음에 任實서
崔承雨 李炳春 金신종 金永遠 김병옥 崔由河 허선 趙錫烋 황히영 朴敬武
李鍾根 김학원 등이었다.
布德 三四年 단기 四二二六 서기 一八九三 癸巳 三月 서울복합상소문자리에 任實 崔承雨 김신종
김영원 이병춘 조석휴 김영원 허선 한영태 등이 임실지방대표로 참석하였다.
布德 三五年 단기 四二二七 서기 一八九四 甲午 建戊辰 三月 二十五日 壬寅 최찬국으로 위시하여 都接
主 崔承雨 接主 김신종 이병춘 김학원 김영원 최유하 허선 조석휴 박경무 등이
기표, 동 七月 七日에 임덕필 양경보 엄종성 문길현 이만화 이용거 이병용 곽
사회 한군정 한영태 등이 기포, 접사 박성근 김교필 이종현 이용수 박정환 김
병환 등이다.
이들 각 접주 접사는 봉기하는 農民軍과 규합하여 집강소를 임실읍에 설치 십이게
명의로 민정까지 하고 壹萬여軍의로 同 八月에 東徒大將 全奉準과 南原을 석권한 南原
都接主 金洪基 柳泰洪 泰仁 金開南軍과 合流하여 參禮를 거쳐 北上하여 公州에서 日本
軍과 合勢한 官軍과 對戰하다 勢不利하여 一敗塗地分散되여 각기 行動 崔承雨 崔由河
김학원 한영태 金永遠은 淳昌 回文山까지 敗走 이곳에서 蟄居 隱遁 六年餘生活을 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