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寅排日運動의 槪要
己未三一運動 以後 日帝는 우리나라 民族을 永遠히 植民地化하기 爲하여 言語 文字며 姓
도 氏로 變更하여 우리말이며 우리 國文을 없애버리고 姓까지 없이기로 結定
하여 實行途中 天道敎 四世敎主(朴寅浩) 春庵上師께서 首弟 金在桂를 命하사 排日
鬪爭委員會를 組織케 하다. 任實에서는 朴永昌 崔宗箕 金漢京 鄭相悅 朴成言
氏等 指導下에 全敎員들은 百五日 特別祈禱를 奉行하고 心苦에 日州같은 倭敵놈들
하늘님께 造化받어 一夜中에 消滅하고 다보단에 盟誓하고 한이 원수갚아보세. 또 特別
喜捨金을 二, 三次 募集하여 金在桂氏를 通하여 上海臨時政府에 軍資金으로 贈하다.
其后 五年間을 秘密히 通常心苦로 實行하여 나오던 中 布德 七十九年 二月 二十三日 단기
四二七一 서기 一九三八에 黃海道 海州에 이 心苦事件의 發覺으로 因하여 中央에서 同 三月
五日에 金在桂 崔俊模 韓順會 金庚成 四氏가 海州檢査局에 被檢되다.
布德 七十九年 四月에 海州事件이 擴大되어 全鮮的으로 檢擧가 始作되여 多數數人의 犧牲
을 내였는데 其中 主犯으로 金在桂 李强雨氏 殉道하시였다
任實에서도 崔宗箕 金漢京 朴成言 三氏가 被檢되여 無數한 訊問을 當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