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議案
道主制가 敎主制로 變更되는 그때에 敎主는 春庵으로 하고 春庵敎主는 終身職으로 하라
하신 것은 貳 先聖師께서 敎會에 對한 最后의 遺言이시였다. 春庵上師께서 不得已한 事情
(當時 中央幹部의 辭職勸告理由는 先生任이 辭任을 하시여야 敎會의 紛糾가 終息되고 또 敎會
의 將來가 잘 되겠다는 것 그리하여 先生께서는 敎會가 잘된다면 生命이라고 不惜하거든
辭職이야 問題가 아니라 하시고 곧 辭任하였던 것으로 敎主를 辭任하신 后 二十年間 敎會는
紛糾紛裂을 거듭하여 我等의 微力으로서는 統整할 수 없는 今日의 現狀에 이르렀다. 我等은
이제 先聖師의 遺訓을 다시금 느끼지 않이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敎主制를 復活하
는 同時에 上師께서 老齡이심을 不顧하시고다 敎主를 復位하여 주심을 懇하는 所以이다.
이에 委員 崔俊模 韓賢泰 二人으로 하여금 此意를 上師께 稟告하였든 바 上師께서 한참 黙
黙히 생각하시다가 曰 敎主職에 있어서는 참으로 不勝其任이나 그러나 여러분이 先聖師
의 遺訓에 基하여 이렇게 大會에서 決議까지 하였다하니 여러 말을 않겠다고 하시다.
이때에 上師께서 吳榮昌 金★(日+承)雨를 命召하사 曰 내가 多年間 君等의 覺悟만 기다리고 一言
의 勸告가 없었으나 今日에 在하여는 天意의 所任에 特히 一言을 付하나니 沙理院機
關을 解體하고 中央에 上來하여 八十老齡인 나를 輔佐하라 하시니 答 當場에는 여러 가지 事情으
로 할 수 없으니 來人日紀念 時는 斷然 上來하겠다고 하다.
同 十二月 二十二日에 天道敎靑年同盟이 設立되다.
同 十二月 二十三日에 天道敎臨時大會를 開하고 敎憲 及 儀節을 通過하고 中央宗理院을
中央敎會로 敎會의 原住職의 名稱을 一切 變更하다.
同日 午后 五時에 敎主就任式을 中央敎堂에서 奉行하다.
布德 七十四年 二月 二十一日 四十九日間 特別祈禱式을 敎主命敎에 依하여 施行하다. 呪文
神師靈氣 祝文 二十四神師靈氣速速降臨 五回心苦는 安心歌 中 一部
同年 一月에 崔麟派의 離脫로 因하여 中央敎會의 職員이 左와 如 任命되다.
長老 權東鎭 吳世昌 奉敎 韓順會 布德院長 崔俊模 常務道師 李世憲 大宗司
權東鎭 宗理院 孫在基 玄機觀長 李鍾麟 宗務員 朴完 共宣觀長 朴承龍 宗務員 朴漢桂
典制觀長 金庚咸 宗務員 李仁根 金融觀長 全在桂 宗務員 韓龍淳 李炳憲 審計院長
權秉悳 審計員 金淳五
布德 七十四年 癸酉 十月에 上師께서 다시 吳榮昌 金承周 二人을 命召하시고 曰 翁의 餘
日이 不多한에 尙此 君等과 各離하여 있는 것은 君我間 私情으로 보아서 不忍할 뿐 아니라
敎會로서도 損失이라. 그럼으로 今番에는 君에게 敎會일은 맡기려 하니 君은 사양치
말고 翁의 老昏을 輔佐하라고 하시였다. 卽席에서는 아무 對答없이 外出하여 電報로
서 李起草를 招來하더니 李起草 入京 翌日에 上師께 面香漳庵에게 교회사를 맏긴다
하시니 무엇을 맏긴다는 말씀입니까. 上師 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現 中央敎會에 布德院
長이나 大宗司長을 말한 것이라 하시였다.
布德 七十五年 甲戌 三月 一日 二十一日間 特別祈禱를 上師命敎에 依하여 呪文 神師靈氣 呪文 二十一
回神師靈氣速速降臨 五回心告 安心歌中節에서 施行하였다.
布德 七十五年 四月 四日에 上師께서 李鍾麟 李雷錫으로 誠道師를 金在桂 韓順會 朴
昌烈 金北淵 車洛俊 吉達源 玄聖材 金明鎭 李義道 李龍口 金相烈 朴永昌
尹玟玉 信寶 金昌道 金秉佑 柳泰洪 金興培 裵世昌 金錫泰 李强雨 金洛興
申明熙로 敎道師를 朴承龍 金庚咸 趙完星으로 信道師를 羅天綱 洪淳熙 崔宗植
金昌河 金淳決 朴勝道를 法道師로 任命하시다.
布德 七十六年 乙亥 四月에 上師主의 命敎에 依하여 金承周 金明善 二人 沙理院機關을
떠나 中央敎會에 敎務從事를 하게 되니 右 兩人에게 常務道師로 任命하다.
布德 七十七年 丙子 十一月 十五日에 上師께서 大憲에 依한 中央職員을 任命하다.
大宗司長 權東鎭 宗理院 孫在基 玄機觀長 李鍾麟 宗務員 朴浣 共宣觀長 朴承龍
宗務員 朴漢桂 典制觀長 金庚咸 宗務員 李炳憲 金融觀長 金在桂 宗務員 李仁
根 監査院長 權秉悳 宗務員 金淳五 長老 權東鎭 吳世昌 崔俊模 奉敎 韓順會
布德 七十七年 丙子 拾月 十三日에 宗訓 第二號로써 特別祈禱를 行하게 되다. 期間은 三十一日
本呪及神師靈氣呪各二一回 心苦 輔國安民布德天下廣濟의 大願安心歌 中 一節
布德 七十八年 丁丑 二月에 淵源制에 依한 淵源錄을 更 修整하다.
同年 十二月 八日에 大宗司長 崔俊模氏 辭任에 對하여 李鍾麟氏로 大宗司長을 補選하였는데
李鍾麟氏로부터 上師主께서 病患이 完快되시기까지의 敎會에 對한 一切의 權限을 三長老에
게 委囑하면 大宗司長에 就任하겠다는 것을 書面으로 上師主께 提出하였다. 그리하여 上師主
께서 此를 許諾하시여 李鍾麟氏 大宗司長에 就任하고 三長老는 敎主格이 되였다.
布德 七十八年 四月 二十一日 宗訓 第三號로써 新任中央職員을 左와 如히 發佈하시다. 大宗
司長 崔俊模 宗理員 孫在基 玄機觀長兼典制觀長 李鍾麟 宗務員 朴浣 共宣觀長兼金融
觀長 金在桂 宗務員 朴漢珪 監査院長 金庚咸 奉道 韓順會 長老 權東鎭 吳世昌
布德 七十九年 戊寅 二月 二十三日에 黃海道에서 心告事件의 發覺으로 因하여 中央에서
金在桂 崔俊模 韓順會 金庚咸 四氏가 海主檢査局에 被檢되다.
同年 四月에 海州事件이 擴大되어 全鮮的으로 檢擧가 始作되어 多數의 犧牲을 내였는데 其中
主犯으로 金在桂 李强雨氏 殉道하시였다.
布德 七十九年 四月에 當局의 指示로 敎主 以下 中央職員이 治安維持法違反에 依하여 解任되
고 敎憲이 廢止되였으며 敎則 發布되여 敎則에 依하여 中央職員을 改選하다. 大宗司長 李鍾
麟 宗務員 朴浣 玄機觀長 吳相俊 宗務員 朴來源 共宣觀長 朴漢珪 宗務員 朴錫信 金融觀長
李在憲 宗務員 鄭用增 監査員 孫在基 長老 權東鎭 吳世昌 幹部 朴浣
布德 八十年 己卯 二月에 天道敎 八十年 記念會가 組織되다.
委員長 權東鎭 委員은 中央幹部가 兼任하게 되다.
同年 二月 十七日에 金融觀長 李在憲氏 還元으로 代에 孫在基氏가 被選되다. 監査員 孫在基
氏 辭免한 代에 朴來源氏가 被選되고 宗務員 朴浣氏 依免되다.
同年 三月 一日에 八十年 紀念事業으로 八十歲 信者와 八十度 出生 敎家子女에게 紀念品을 贈
典하기로 되다.
同年 三月 十二日에 天德頌 中 龍潭歌 一二節이 當局의 忌諱에 觸하여 削除되다.
布德 八十一年 庚辰 一月 三日에 新派의 李敦化가 大宗司에 來訪하고 時局이 時局인만치 敎會
를 合同하자는 提議가 있었다.
同年 一月 四日에 權東進氏宅에서 權·吳 兩氏와 李鍾麟 吳尙俊氏의 會談이 있었다.
同年 一月 五日에 朝會席上에서 李鍾麟氏로부터 再作日 李敦化氏로부터 合同交涉에 對한 報告
가 有하다. 李敦化氏 말을 들으면 自己는 今般 吳知泳氏의 合同幹旋에 對한 衝動으로서가
아니라 前부터 所感이 있었고 또는 時局이 時局인 關係上 無條件 合同의 意思가 있다고 進言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昨日 兩 長老에게도 말씀하였거니와 歲前에 李敦化 鄭廣朝 兩氏가
永登浦 崔俊模氏를 二三次 尋訪하고 合同에 對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全面的으로 讚成을 하였다
하며 兩 長老께서도 亦是 合同을 찬성하고 曰 敎會財産問題를 春庵先生 還元 後 規定하려고 하면
現時 敎會 以上의 紛糾가 있을 것이며 또는 앞으로 經濟的으로 舊派는 維持할 수 없으니
이번 合同은 內外的으로 最 適當한 期會라고 말씀하시였다.
同年 三月 六日에 江界로부터 金在勳外 崔側 二人이 連署로 兩側 中央에 陳情書가 왔다.(內容
은 合同에 對한 것)
同 三月 九日에 三長老로부터 曰 彼側에서는 必히 陳情書에 對하여 好意로써 回答을 할 터인데
우리는 침묵을 지키면 損이 우리에게만 있으니 好意的으로 回答을 하라는 付託이라고 大宗
司長이 報告가 있었으나 前例로 보아서 이것이 分明이 그들의 陰謀이니까 回答이 必要치
않고 또는 利害를 따질 問題가 아니라는 多數意見이 있어 回答을 保留하기로 決定하였다.
布德 八十年 三月 十一日 李敦化氏가 大宗司長을 訪問하고 李 나는 昨日 入京하였는데 그동안
어떻게 進展이 되였는야고 한데 對하여 李鍾麟氏 答이 各各 個人의 의를 청취하였을 뿐
아직 具體的 議論이 없었으며 中央에 있는 몇 사람으로서 重大한 일을 速斷할 수 없으니
오는 天日紀念 時에 地方頭目들과 協議한 後가 아니면 아니되겠다. 李敦化氏 만일 合同을 한
다고 하면 하루라도 速히 實現시키는 것이 좋지 않이한가.
萬一 天日紀念 時에 가서야 決定이 된다고 하면 時日關係로 手續이 困難하니까 不得已 兩
派機關을 解體하고 委員會를 組織하여 모든 것을 委員會에서 하든지 그렇지 않이하면 오
는 地日紀念때 가서야 成立될 것이 않이냐고 말하였다 하며 合同에 對한 이야기는 우리 두 사
람뿐이 아는 바인데 이렇게 되여서 總督府에서 말하는지 數日前에 三輪이가 如庵丈을 訪問
하고 貴 敎會가 合同한다는 말이 있으니 事實이나고 물으며 如庵말이 그런 事實이 있다
고 하였는데 三輪이 말이 그러면 이번에 沙理院側과도 合할 것인가 如庵 그것은 過去로
보아서 잘 않이 될 것이라고 答하였더니 三輪의 말이 그렇다고 하면은 當局에서 勸告하
겠다. 만일 권고해서 않이 듣는다고 하면 解散을 命令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天道敎는 않이 믿을 수 없을 것이요 믿은다 하면은 합해질 것이 않인가. 以
上의 말을 大宗司長의 報告에 依하여 中央職員은 聽取하였다.
同年 三月 十二日에 司會를 열고 司長으로부터 昨日 李敦化氏의 來訪을 正式 報告한 後 우리
中央으로서도 앞으로 時日이 不遠하였으니 速히 合同에 對한 요案을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發言이 있었다. 그리고 吳相俊氏의 小節細目까지라도 協定하는 것이 좋타는 贊成이
있었는데 朴漢珪로부터 大宗司長과 李敦化 兩 二次會談에서 大宗司長으로부터 일이
重大하니만치 中央에 있는 우리들만으로는 決定할 수 없으니 來 天日紀念때에 地方頭目들
과 圓滿 協議한 後가 않이면 아니되겠다고 明言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런데도 不拘
하고 저 便의 交涉을 왜 맡았으며 일단 귀정된 問題를 다시 上程 付議할 理由가 무엇
인가. 李敦化氏 言內에 當局云云의 말은 우리가 한 參考로 들을 뿐이요 그렇타고 해서
一단 言明하여 놓은 問題를 다시 재연식힌다는 것은 大宗司長의 위신으로 보나 우리 中央의 체면
으로 보나 또한 重大한 일인 것만치 地方頭目들과 원만 협의하여 되도록 善處하려는 中央의
愼重性을 보아서 不爲의 事이니까 우리들은 예민한 神經을 가지고 저 側을 對하여야 할 것
이다. 吳相俊氏로부터 오는 天日紀念에 이 問題를 上程 討議하더라도 中央으로서
合同에 對한 交涉을 받았으니까 中央으로서는 어떠한 案이 있어야할 것이 않인가. 그럼
으로 一體를 地方頭目에게 맏기여서 成案을 얻게 하든지 中央에서 어떤 提案을 作成하
여서 頭目會議에 提出하든지 兩者間에 決定을 지어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朴漢珪氏
로부터 中央에 있는 우리들은 一般敎人의 意思를 代表하는 地方代表大會에서 決定된 範圍
內에서 敎會運營 上 事務執行을 委任을 맡을 뿐임으로 大會에 맡기는 것이 原則이며 더욱히 合
同문제로 말하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前番의 經驗이 自在하니만치 眞僞를 判斷할 수 없
는 以上 急速度的으로 나아가는 것은 禁할 必要가 있다고 力設하였다. 그러나 此際 中
央職員의 意見이 不統되였든 것은 事實이였다.
同年 三月 十三日 李敦化氏가 司長을 尋訪하고 李敦化氏 曰 前에 三輪이 崔麟氏를 만난 席上에
서 崔氏로부터 當局으로서는 天道敎에 對한 態度를 앞으로 鮮明하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萬一 宗敎類似團體라고 해서 鮮明히 對하지 않이하면 차라리 解散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朝鮮에서 宗敎的 素質이 있다고 보면은 좀더 鮮明하게 對할 것이 아닌가. 此를 當局
에 一次 進言하려 하였는데 마침 그대를 만났으니 言及하노라고 하였다 한다. 以上의 要旨를 大
宗司長이 報告하였으며 李敦化氏로부터 日前에 말한 바와 같이 兩側이 正式 會合이 있어야
할 터인데 玄庵인 病으로 누웠으니 今日 午后 一時에 貴側에서 두 분이 玄庵집으로 와달라는 付託
에 依하여 李鍾麟 孫在基 兩氏가 玄庵집으로 往談하였다.
同 三月 九日에 司會를 열고 司長으로부터 지난 十一月에 彼則 鄭廣朝 李敦化 兩氏와 相談結果를
報告하다 兩側代表會合席上에서 孫在基氏로부터 間接으로는 들었으나 直接으로 좀 듣고 십다
고 合同提議에 對한 그 動機를 問하매 李敦化氏 그 前에는 當局의 態度가 分裂을 오히려 無
妨하게 생각하였는바 至今에 와서는 合同을 好感視하니 이것이 곧 合同에 對한 最適의 時期인
것 둘째 앞으로 大陸布德이 急先務인데 合同을 아니하면 自體의 힘 크지 못한 만치 進出上 無力
할 것이다는 点을 明示하였다. 이에 兩側代表 四人이 各히 意見交換이 있은 后 合同을 急速 實
現하기로 決定하였다.
그리하여 四人의 會談에서 多數人이 會同하면은 甲論乙駁으로 或 會에 支障이 生起할는지 알 수
없으니 天日紀念 안으로 모든 準備를 다하여 紀念 時 大會에서는 形式만을 밟게 하는 것이 첩경
이라고 意見이 一致되니 小節細目까지 붓을 들어 記錄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各自機關의 同
意를 얻어 再會合 時에 具體安을 討議하기로 하고 散會하였다 한다. 以上의 報告가 끝난 后
大宗司長으로부터 同意與否을 問하매 共宣觀長으로부터 일이 重大한만치 地方頭目會議에
서 원만 討議한 后가 안이면은 合同에 對한 兩側幹部만의 議論을 容許할 수 없다고 言明한
大宗司長이 不過 二三日 以內에 多數人의 會合에서 이 문제를 討議하면은 或 支障이 生起할
는지 알 수 없으니 急速히 實現하자는 彼側의 動議에 再請한 內容理由를 알려주시요. 이것
은 地方頭目 及 一般敎人을 無視한 것일 뿐 아니라 中央職員의 意思까지 無視한 單獨的인
것이 아니요. 솔직히 말하면 合同分裂 이러한 前例가 自在하고 또 그들의 近日의 횡설수
설의 言論으로부터 强制合同의 氣運이 濃厚함에도 不拘하고 多數敎人에게 알리지 않
고 急速實現을 꾀하는 大宗司長의 意思가 邦邊에 在한가를 疑心하지 아니할 수 없소.
나는 이러한 同意할 수 없고 地方敎人에게 罪過를 지이지 않이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前鑑이 昭昭하거니와 眞意가 아닌 合同임을 沒覺하여서는 안됩니다. 三百萬敎人을 指導
하는 地位에 있어서 誘惑이나 或은 私的 觀念에 붙잡혀서는 안됩니다.
끝으로 나는 이러한 不順한 動機에서 發足된 合同을 反對하고 退場합니다.
同年 三月 三日에 沙理院側 合同勸告責任을 지워 李敦化 吳相俊 兩氏를 沙理院中央總
部에 派遣하였다. 歸報에 依하면은 合同提案을 拒絶 當하였다 한다.
同年 三月 五日 彼側委員 李敦化 鄭廣朝의 편에서 李鍾麟 孫在基氏의 會合에서 小節細
目까지 討議되고 天日紀念 時 合同大會에서는 形式만을 밟기로 決定되였다.
同年 四月 三日 午后 三時 十五分 上師께서 還元하시니 憂愁思慮에 쌓여있는 우리 앞에
는 强制合同이라는 이 무서운 事實이 가로 놓여있다.
同 四月 三日 先生의 尸體를 모시고 痛哭聲이 들이는 이날 敎堂에서는 合同大會에 對한 準備
가 있었고 다음날 四日 午后 一時에는 合同大會가 열리였다.
同年 四月 九日에 高陽郡 思平面 葛峴里 墓地에 安葬하시다.
布德 八十一年 四月 三日 先生主 還元하시고 敎會는 新派天道敎와 强制合同을 當한 채 八十一
年으로 八十六까지의 六年間은 倭賊의 戰爭遂行에 協力하는 以外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
었다.
然이나 舊派側에 各自 地方自治制로 實施 八一五 倭賊이 降伏하는 날까지 背日運動을 繼續
하였다.
布德 八十六年 乙酉 拾月 二十七日에 六年前 親日派 新派의 謀略으로 强制合同되여 不運에 빠
졌던 天道敎는 八一五 朝鮮의 解放됨과 同時에 原狀대로 新日派는 分裂되였다.
同年 拾月 二十七日 天道臨時大會에서 天道敎의 過去 革命鬪爭史에서 春庵上師의 歷史一部
인 黃海道心告事件을 故意로 抹殺한 것과 解放朝鮮의 政治的途上에 놓여있는 親日派民族返
運▣肅情에 對한 敎內肅請문제가 上程되였으나 一部反對로 議事進行이 混亂되여 甲論乙駁
▣▣ 論爭으로 宗敎團體에서는 보지 못할 混亂이 일어났다. 이때 布德 八十一年에 强
制合同을 當하였던 舊派敎人들 原狀대로 分裂한다는 聲明書를 發布하고 合同前의 天道敎中
央敎會의 名稱을 살리어 中央機關을 臨時로 任實敎會에 存置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