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훈 약력(李鍾勳略歷)
약력
부친의 성함은 우재(禹載)이고, 자호(字號)는 치범(致範)이다. 어머니는 선산 김씨(善山金氏)이다. 광주군(廣州郡) 실촌면(實村面) 유여리(柳餘里)에 살았다.(현재는 삼합리(三合里)로 이사하였음)
나의 이름은 종구(鍾球)요, 자(字)는 진호(振浩)요, 도호(道號)는 정암(正菴)이다. 병진년(丙辰年, 1856) 2월 19일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나이 10세에 한문을 공부하는 사숙(私塾)에 입학하여 14세에 이르러 글은 다만 성명만 쓸 수 있으면 된다고 하여, 공부하는 것을 폐하고 7~8년간 떠돌며 나날을 보냈다.
21세에 이르러 본면(本面, 실촌면) 사동(寺洞) 능곡(陵谷)이라 부르는 어씨(魚氏) 산자락에 있는 넓은 삼림을 사들여, 상촌리(上村里) 국정포(國井浦)의 염치오(廉致五)라는 사람과 더불어 철점(鐵店)을 설립하고 영업하다가, 4년 만에 철점을 닫고 같은 면 설월리(雪月里)에 사는 안순심(安順心)이라는 사람과 동업(同業)으로 수철점(水鐵店)을 다시 설립하고, 그 사업에 종사하여 일을 하였으나, 그 사업이 또 부진하여 3년 만에 역시 폐업을 하게 되었다.
이후 경성(京城)으로 갔다. 판윤(判尹)인 이원회(李元會)의 주선으로 사용(司勇)으로 처음 벼슬에 나아가 일을 하게 되었다. 뒷날 영별군관(營別軍官)을 지냈으나, 이것 역시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아서 사임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886) 7월 어느 날에 인천(仁川)으로 내려가서 만석동(萬石洞) 북쪽 송포리(松浦里)에 선상객주(船商客主)를 비로소 설치하고 수만금의 재산을 얻게 되었고, 상업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뜻하지 않게 영업이익을 얻는 일이 실패하게 되어, 4년 만에 또 사업을 폐지하게 되었다.
이후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 함경감사(咸鏡監司)는 이돈하(李敦夏) 씨였다. 함경도 감영 영내(營內)에서 여러 달을 하는 일 없이 머물렀다. 이러는 동안에 북청(北靑), 정평(定平), 영흥(永興) 등 각 군(各郡)에서 민요(民擾)가 일어났다. 인심이 요란하고 어지러워 다시 본향(本鄕)으로 돌아왔다.
이후 몇 년간 금전을 빌려 주는 영업을 하다가, 계사년(癸巳年, 1893) 정월 17일에 동학(東學)에 입도(入道)하여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나서 사방으로 몸을 피하여 숨어 다니다가, 3월 어느 날에 충청도 보은군(報恩郡) 장내리(帳內里)가 팔도(八道)의 대도회(大都會)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의 동생인 종필(鍾珌)을 여주군(驪州郡) 이포(梨浦)에 보내 말 두 필을 사가지고 오게 하였다. 사 온 말에 상평통보(常平通寶) 200냥을 싣고 보은 장내리로 내려갔다.
말 두 필과 엽전 200냥을 의암 선생(義菴先生)께 바치고 십여 일 동안 머물게 되었다. 이때 경기편의장(京畿偏義長)의 임무로 그 직(職)을 맡아 보게 되었다. 이 임무를 보던 중에 뜻하지 않게 조정으로부터 윤훈(輪訓)을 가지고 선유사(宣諭使) 서병학(徐炳學)이 (보은에) 와서 타일러 훈계하며 말하기를 “곧바로 해산하라. 해산하여 각기 그 일하는 바에 가서 안정하면, 그 원하는 바에 의하여 하나하나 그 일들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해월신사(海月神師)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세가 부득이 하여 해산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하시며 이내 모두 해산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도인(道人)인 홍병기(洪秉箕)와 박우순(朴禹淳) 등을 대동하고 속리산(俗離山) 뒤의 산자락으로 들어가, 49일간의 기도로써 치성(致誠)하기로 했다. 치성을 드리던 중, 스님 한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각 영(營)의 교졸배(校卒輩)들이 산을 둘러싸고는 동학군들을 잡아들이고자 하니, 속히 몸을 피신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전해 주었다. 그런 까닭으로 부득이 하여 곧바로 경상도 상주(尙州) 등지로 도망을 하였다. 이곳저곳을 전전하여 경기도 지평군(砥平郡) 용문산(龍門山)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삼칠일(三七日) 기도를 마치고, 본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해 여름 동안 무사하게 화를 피하였다.
가을 9월에 보은(報恩) 장내리(帳內里)로 옮겨 갔다. 갑오년(甲午年, 1894) 6월과 7월 사이에 사방 각 군현(郡縣)에서 동학군을 일일이 체포하는 까닭으로, 각 포(包)로 통문(通文)을 돌려 한곳으로 모두 집합하여 함께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하고, 8월에 기포(起包)하였다. 청주읍(淸州邑)으로 행진할 때에 동문(東門) 밖에서 문득 알 수 없는 복병(伏兵)들로부터 엄습(掩襲)을 받아 서로 총을 쏘며 교전하였다. 이때 도인 수백 명이 피살되었다. 그러나 나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의 덕을 입어 다행히 화를 피하였고, 충주군(忠州郡) 외서촌(外西村) 광희원(廣熙院) 장(場)으로 가서 도인들 4만여 명을 소집하여 며칠을 머물렀다.
이후 무기장(無忌場)으로 옮겨 가 주둔하였다. 이곳에 주둔했다가 이내 보은(報恩)을 향해 행진할 것을 의논하여, 괴산(槐山)으로 내려가는 중로(中路)에서 관군과 충돌하여 교전하게 되었는데, 이 싸움에서 승첩(勝捷)하였다. 그리고 이내 행진할 때에 군세(軍勢)가 장장 20여 리로 이어졌다.
장내리에 도착하여서는 3일간 진을 치고 머물렀다. 해월신사께서 군용(軍容)을 정할 때에 의암 선생에게 대통령기호(大統領旗號)를 받게 하였다. 전규석(全奎錫)으로 선봉(先鋒)을 정하고, 나를 중군(中軍)으로, 이용구(李容九)를 후군(後軍)으로 정하셨다. 의암 선생의 말씀을 준칙으로 받들어 논산(論山)으로 내려가서, 전봉준(全琫準)과 군대를 합하였다. 두 군이 합진(合陣)한 지 3일 만에 의암 선생께서 해월신사를 모시고 오셔서 진중(陣中)에 주둔하고 머물러 있으셨다.
관군과의 세 차례 공주(公州) 전투에서 강약지세(强弱之勢)로 서로 밀고 밀리다가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다. 관군의 추격(追擊)으로 인하여 전라도 장성(長城)까지 내려가며, 여러 번의 교전이 있었다. 무주(茂朱), 무풍(茂豊)에서 다시 관군과 교전을 하여 크게 이기고, 진을 돌려서 돌아오고자 할 때에 청산(靑山), 용산(龍山)의 장터에 도착하니, 관군과 민보군(民保軍, 保는 堡의 오자)이 사방에서 포를 쏘며 공격하는 까닭으로, 역습으로 교전하여 관군 참령(參領) 이선재(李善在)를 죽이고 싸움에서 크게 이겼다.
그 이후 보은(報恩) 북곡(北谷, 속칭 북실. 정식 명칭은 鍾谷)에서 하룻밤 주둔하고 있을 때, 한밤중에 병정들이 사방으로 엄습하여 도인들의 사상자(死傷者)가 아주 많았다. 그때 해월신사를 모시고 화양동(華陽洞) 화양사(華陽寺)로 가서 한밤중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 이후 충주 외서촌(外西村)으로 행군할 때에 병정이 진격(進擊)해 온 까닭으로 밤이 깊도록 교전하다가 또 전세가 불리하게 된 까닭으로, 그 밤중에 각 교인들을 해산하였다. 그때가 갑오년(甲午年, 1894) 12월 29일 밤이었다.
해월신사와 의암 선생을 모시고 강원도 인제군(麟蹄郡) 남면(南面) 유목정(楡木亭) 최영수(崔永壽)의 집에 이르러 화를 피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이목(耳目)도 있고, 또 여러 사람이 한 방에 피해 있는 것이 동네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는 듯하여, 해월신사와 의암 선생만 그 댁에 머물게 하고, 나는 2월 초에 원산(元山)으로 갔다. 이곳에서 연죽(煙竹, 담배) 십이 부(部)를 한 부당 16전씩 주고 구입하여, 고원(高原)으로, 평안도 양덕(陽德), 맹산(孟山), 개천(价川) 등지로, 또 벽동(碧潼) 우면장(牛眠場) 등지로 가서 매 부당 엽전 7냥씩으로 팔았다. 그렇게 하니 이문(利文, 이익)이 적지 않았다.
길을 돌려서 나와가지고는, 돌아오는 길에 마을 마을마다 찾아 들어가 소가죽[牛皮]을 보고 이를 바꾸어 사들여 원산(元山)에 와서 파니, 곧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 역시 한울님과 스승님께서 내려 주신 횡재였다.
인제군(麟蹄郡)으로 돌아와 해월신사를 배알(拜謁)하고 얻어들인 이익금은 의암 선생께 바쳤다. 10여 일을 머문 이후 해월신사께서는 최영수(崔永壽)의 집에 계시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의암 선생을 모시고 영동(嶺東) 간성군(杆城郡) 막락리(幕樂里) 진포(津浦)에서 행상(行商)하는 이건서(李健瑞)의 집으로 가서 10여 일을 머물러 있었다. 이곳에서 해삼(海蔘)을 무역하고자 청(淸)나라로 행상하러 함경도 원산(元山), 문천(文川), 고원(高原), 정평(定平), 영흥(永興), 함흥(咸興) 등지를 지나 세 개의 큰 고개를 넘어 장진읍(長津邑)에서 며칠간 숙박을 하였다. 돌멩이들만 가득 메우고 있는 험한 고개를 지나왔기에 노독(路毒)으로 인하여 속사둔(速泗屯) 주막에서 이틀간 머물렀다가, 다시 강계읍(江界邑) 내 이우연(李禹連)의 여관에 가서 10여 일을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때는 마침 윤5월(閏五月) 보름 사이였다. (의암) 선생과 손병흠(孫秉欽)과 내가 입고 있던 무명 겨울옷을 그때에 비로소 벗고, 짧은 소매의 옷과 짧은 바지를 입었다.
그때에 주인 형제가 급하게 청하며 말하기를 “청나라로 행상하러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라며 곡진히 만류하거늘,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날 일청전쟁(日淸戰爭) 때에 조선 사람들이 일병(日兵)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청나라 병사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조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아무 까닭도 없이 참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청나라 국경에서 장사하는 것이 절대 불가합니다.”라고 만류하는 말을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부득이 길을 돌려서 인제군(麟蹄郡) 최영수(崔永壽)의 집으로 돌아가서 해월신사를 배알하고, 청나라로 가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가지 못한 사실을 세세하게 여쭈었더니 해월신사께서 잘하였다는 말씀을 하셨다.
며칠이 지난 후 해월신사와 의암 선생께서는 그 집에 머무르시고, 나는 다른 사람들의 혐의와 의심을 피하여 그곳에서 10여 리가량 떨어진 탄둔(炭屯)이라고 일컫는 깊고 깊은 산속, 궁벽한 골짜기에 있는 장화첨(張化僉)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옮겨 갔다.
주인과 인사를 마친 이후 “나는 전라도 부안군(扶安郡)에 사는 김 서방(金書房)으로 행상을 하며 살아가다가, 뜻하지 않게 중로(中路)에서 영업에 실패하고 이 산속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산속으로 온 뜻은 혹 고사리나 캐서 낭패한 자본이나마 얻을까 생각하고 이렇듯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주인장께서는 돌보아 보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말을 하니 그 주인이 한마디로 허락을 하고 매달 초하루에 밥값으로 다섯 냥(兩)씩의 돈을 내는 것으로 약정(約定)하였다. 그 집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매일같이 고사리를 채취하여 밤이면 송진으로 나무에 불을 붙여 촛불을 만들어 캐어 온 고사리의 껍질을 벗겨서 다음 날에는 햇빛에 말린 이후, 고사리나물 뭉치를 만들어 다른 곳을 왕래하며 팔았다. 고사리 판 돈으로 밥값을 보충하였으나, 이것으로서는 항상 부족한지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에 해월신사 앞에서 보고 배운 짚신 삼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을 할 때에 처음에는 짚신의 모양을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차차 짚신 삼기에 성공하여, 엽전으로 한 냥 여섯 전(錢)의 값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되어서 한 달 치 밥값을 충분히 충당할 수 있게 되었고, 돈을 쓰는 데에 있어 궁색함을 면하게 되었다.
해월신사께서 진지를 드시고 있는 곳에서 아직 내지 못한 부채금(負債金)이 한 오십 냥이나 된다는 사실을 듣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나의 집에는 논 십 두락(十斗落)을 가지고 있었다. 풍년이고 흉년이고 가리지 않고 매해마다 삼십 석(石)씩 소출이 되는 논이다. 그러나 불가불 그 논을 팔아서 쓰고자 하는 뜻을 여쭈어 말씀드리니, 의암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에게는 연세가 높은 부모님께서 모두 계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노년에 아궁이에서 불이 끊어질 지경이 될 것이니, 매우 어렵다.”라고 하셨다.
내가 다시 여쭈어 말씀드리기를 “저의 집에는 장성한 동생들과 큰 조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과연 이와 같으면 뜻하는 대로 하도록 하라.”라고 하셨다. 그날로 바로 길을 떠나려 했으나, 길 떠날 비용이 전혀 없는 까닭으로 해월신사께서 짚신 세 켤레를 주신 것과 내가 만든 짚신 두 켤레를 합하니 모두 다섯 켤레였다. 이 짚신들을 길 떠나는 비용으로 보충하여 쓰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지목(指目)이 크게 일어나고 있어,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는 김보물(金寶勿)이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죽산(竹山) 포교(捕校)로 근무하고 있는 까닭으로, 나를 잡아들이고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바라, 나의 집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하고 깊은 밤에야 가까운 동네 지음리(知音里)에 살고 있는 신자(信者) 윤기창(尹起昌)의 집으로 찾아가서 방문하여 문을 두드리고 나오기를 청하였다. 그러한즉 윤 교인(尹敎人)이 보고는 크게 놀라 말하기를 “무릇 김보물이라는 자가 밤낮으로 감시하며 수색하는 중이오니, 만약 그를 만나게 되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그 집 다락으로 들어가 긴급한 일이 있어서 온 것이라고 사실을 설명하고는, 즉시 아버지께 가서 자세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말하였다.
이내 아버지께 가서 사실을 하나하나 낱낱이 말씀드리니, 처음에는 대단히 놀라서 말하기를 “만일에 집의 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줄을 알게 되면 잡힐 것이니, 그대의 집 다락에 몰래 숨겨 주기 바란다. 그러면 사방으로 넓게 탐문하여 바로 팔아서 줄 것이다. 그러니 집으로 들어오지 말고 그곳에 있으라고 하라.”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그 말씀에 의하여 그 집에서 숨어 지내게 되었다.
다음 날 인근 가까이에 살고 있는 조천경(趙天敬)이라는 사람에게 엽전 삼백오십 냥에 팔아서, 대은전(大銀錢)으로 바꾸어서 동생 종필(鍾珌)이 삼백 냥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밤으로 곧바로 떠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부탁하여 말하기를 “두 분 선생님[해월신사와 의암 성사]께서 입으실 무명 저고리와 바지 두 벌을 짓게 하여, 가지고 강원도 모처로 와라.”라고 말을 하고는 곧바로 길을 떠났다.
이틀 만에 인제군(麟蹄郡)으로 돌아가 해월신사를 뵙고 절하고는 삼백 냥의 돈을 바쳤다. 그전에 상주(尙州) 신자(信者)인 이원팔(李元八)과의 통신(通信) 중에 사모님과 가족들이 청산(靑山) 감옥에 구금되어서 몇 달간 고초를 당하시다가, 감옥에서 풀려나시어, 청주군(淸州郡) 산동면(山東面) 산막(山幕)이라는 산곡(山谷)에 사는 신자 한영진(韓永鎭)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해월신사께서 들으셨다. 그래서 돈 오십 냥을 이원팔 편으로 사모님께 보내드렸다.
그 이후 나는 장화첨(張化僉)의 집으로 가서 머물러 있다가, 10월에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인 병신년(丙申年, 1896) 정월 초승에 경기도 음죽군(陰竹郡) 북면(北面) 계곡(桂谷)에 있는 권재천(權在天)이라는 사람의 집에 먼저 가서 오래 머물러 있던 중, 해월신사와 의암 선생께서 왕림하셨다. 해월신사를 모시고 따라왔던 의암(義菴, 손병희), 송암(松菴, 손천민), 구암(龜菴, 김연국)이라고 세 사람에게 각기 암(菴) 자가 들어가는 도호(道號)를 내렸다. 세 도호인 삼암(三菴)을 내리고는 말씀하시되, 세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함께 힘을 모아 조금의 간극(間隙)도 없이 하라 하셨다.
그 후 충주(忠州) 외서촌(外西村) 사창리(社倉里)에 임시로 주택을 정하고 지내시다가, 다시 음성군(陰城郡) 창곡리(倉谷里)로 옮겨 가서 사시게 되었다. 나는 그해 7월에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서석면(瑞石面) 명동리(明洞里)로 가서 머물러 살았다. 그러던 중에 도인(道人) 심상현(沈相鉉)과 함께 수류산(秀流山)으로 들어가 백일기도를 행하였다.
10월에 산에서 내려와 해월신사를 배알(拜謁)하고, 이후 지평군(砥平郡) 단월면(丹月面) 대왕리(大旺里) 산골짜기 후미진 곳으로 가서 몇 칸짜리 초가집을 짓고 짚신을 만들어서 간신히 생활을 보존하였다. 그러던 중에 가까운 마을 덕수리(德水里)에 사는 신자 현 가평군수(加平郡守) 정지철(鄭志喆) 씨, 부인 홍지화(洪志嬅) 씨 등의 도움과 보호를 많이 입게 되었다.
정유년(丁酉年, 1897) 11월에 해월신사께서 원주(原州) 전곡(全谷, 전거러니)으로 옮겨 가시어 그곳에서 사시게 되었다. 나는 그해 12월 29일에 설을 쇠기 위하여 음죽군(陰竹郡) 계곡(桂谷)에 있는 나의 집으로 밤을 틈타서 돌아왔다. 아버님 어머님께 배알하고는 잠이 들었는데, 잠 속에서 한밤중에 병정들이 집을 에워싸서 잡으려고 하는 것을 깨달아 알고는 마음으로 빈 연후에 담을 넘어 밖으로 탈출하여 무사히 화를 피하였다. 이러한 것은 한울님과 스승님께서 돌보아 주고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그때에 아버님께서 붙잡혀 가셨다.
나는 원주(原州) 전곡(全谷)에 있는 해월신사 댁을 향해 가는 길에 다행히 교인 손병흠(孫秉欽)을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곤란한 지경에 있었던 일을 개략적으로 설명한 이후에, 이러한 사실을 해월신사께 여쭈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는 지평(砥平)으로 돌아가서 정지철(鄭志喆) 씨를 만나고는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며, 아버님께서 붙잡혀 가신 연유를 진술하였다. 그러한즉 정씨는 현 이천부사(利川府使)의 외척(外戚)이기 때문에, 그 주선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아버님께서 무사히 방면되셨다.
뜻하지 아니하게 해월신사의 병환이 매우 위중해지셔서 와병(臥病) 치료하였다. 그러던 중 무술년(戊戌年, 1898) 정월 초에 음죽군(陰竹郡) 계곡(桂谷)에 사는 교인 권성좌(權聖佐)라는 자가 병정을 이끌고 와서 별안간에 해월신사 댁으로 침입하였으므로, 이에 의암 선생께서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떤 분의 댁으로 알고 들어오느냐!” 하며 서서 엄하게 꾸짖으니, 모두 머리를 내려뜨리고 말을 못하며 물러나 버렸다.
그 밤중에 병상에 계신 해월신사를 가마에 모시고는 지평군(砥平郡) 동면(東面) 갈현리(葛峴里) 신자인 이강수(李康洙)의 집으로 갔다. 가는 길이 매우 험하고 또 초행인 데다가 깜깜한 밤중에 칠흑같이 어두운지라 산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였는데, 그때 홀연히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앞길을 인도하여 아무 탈 없이 갈현리에 당도하였다.
10여 일을 이강수의 집에서 머물고 계시다가, 홍천군(洪川郡) 남면(南面) 제일리(諸日里)에 살고 있는 신자 오경섭(吳敬燮)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가서 한 달 동안 몸을 기탁하며 머물러 계셨다. 그러다가 2월 초승에 원주군(原州郡) 송송곡(松松谷)이라고 일컫는 마을에 몇 칸짜리 초가집을 정하시고 머무셨다.
그해 4월 5일은 대신사(大神師)께서 도(道)를 깨달으신 기념일이다. 도인(道人) 아무개 제씨(諸氏)가 해월신사 댁으로 모여들었다. 해월신사께서 여러 교인들을 모이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번의 향례(享禮)는 각기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 치성(致誠)하라.”라고 하셨다. 의암 선생께서 여쭙기를 “문도(門徒)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향례를 봉행(奉行)하는 것은 매년 행하던 전례(前例)이옵니다. 어찌하여 이와 같은 하교를 하십니까?” 하니, 해월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떠하든 간에 나의 말을 신중하게 듣도록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그 가르침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암 선생과 나는 20여 리 떨어진 둔돈리(屯頓里)에 사는 신자 강구심(姜久心)이라는 사람의 집으로 4일 한밤중에 돌아갔고, 구암(龜菴, 김연국)과 송암(松菴, 손천민), 그리고 손병흠(孫秉欽), 신응식(申應植) 등 제씨(諸氏)들은 다음 날 새벽녘에 각자 그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은 5일이다.
이른 아침 6시경에 토포사(討捕使) 송경인(宋敬仁)이란 자가 관병(官兵)을 인솔하고 갑자기 들이닥쳐 해월신사를 포박하였다. 송경인이라는 자는 어느 도인 한 명을 소개받아 그 사람을 유인하여, 해월신사 댁을 알아냈다고 하였다.
해월신사는 즉시 서울로 압상(押上)되었다. 이때 경무청(警務廳)에 수감(收監)되었다. 이곳에서 십여 일 동안을 구금(拘禁)되어 계시다가, 서소문(西小門) 감옥(監獄)으로 이감(移監)되셨다. 해월신사께서 붙잡히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손병흠(孫秉欽)과 함께 동반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기 위하여 전에 교인이었던 박우순(朴禹淳) 씨가 현재 내부주사(內部主事)의 직책으로 근무하는 까닭으로, 밤을 틈타서 방문하여 상담하였다. 말하기를 “혹시 경무청 순검(巡檢)으로 일하게 되면 해월신사의 모습을 뵙기가 용이(容易)할 것이다.”라고 하며, 박우순이 소개하여 엽전 일백 냥을 출급(出給)해 주겠다는 어음표(於音票)를 써서 주고는 같이 움직여 순검 첩지(牒紙)를 얻었다. 그러나 내근(內勤)으로 일을 보거나, 간수(看守)로 복무(服務)하는 자리가 아니고, 외무(外務)를 보게 되었다. 또 하물며 함께 해월신사께서 서대문(西大門) 감옥(監獄)으로 이감(移監)되신 까닭으로, 그 순검 첩지를 환급(還給)하고, 이른바 출급한다는 돈을 도로 무르게 되어서 대단히 곤란하게 되었다.
그 후에 하나의 묘책을 생각하고 서소문 감옥 청사(廳使) 두목(頭目)인 김준식(金俊植)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보고는 이리저리 말하기를(당시 廳使라 頭目이라고 일컫는 것은 현재 看守와 같은 것임.) “나는 본래 좌포청(左捕廳) 청사로 오랫동안 근무해 왔는데, 좌포청에서 사고로 인하여 퇴직한 이후에 지금 생활이 많이 어렵습니다. 어느 곳에 가서 구구(區區)한 사정을 모두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초록은 동색이라. 김형을 찾아온 것은 사실 혹시나 생활해 나갈 길을 지도해 주실까 해서입니다. 염치를 가리지 않고 이렇듯 왔습니다.” 하고는 예를 표한 이후에, 인하여 안팎의 주점으로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
그 술집 자리에서 형제로서 결의를 맺고는 즉시로 김준식의 집으로 가서, 내실(內室)로 들어가 그 처에게 형수(兄嫂)씨라고 부르며, 공손히 예를 올린 뒤에 밖으로 나와서 향기가 좋은 담배 네 근(斤)을 사가지고는 뜻을 표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사소하고 천한 물건이나, 형수께서 심심한 때 잡수십시오.” 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서로 가까이 사귀게 되었다. 이로부터 시작을 하여 매일 여러 번 출입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의(情誼)가 더욱 친밀하게 되었다.
하루는 김준식을 대면하고 설명하여 말하기를 “형님, 오늘 동생이 대단히 긴박하고 절박한 부탁을 듣고는 이렇게 왔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떤 일인가요?” 하고 되물었다. 대답해서 말하기를 “다른 말씀이 아니라, 먼젓번에 설명을 드린 바 있거니와, 동생이 밥상이나 팔아 가며 영업을 하는 까닭으로, 요 며칠 사이에 어느 한 노부인이 오셔서 숙박을 하던 중,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아들딸도 없고 친척도 없으며, 단지 늘그막에 내외 두 사람만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가장(家長)이 병정들에게 잡혀 서울로 압상(押上)이 되었습니다. 지금 서문 감옥에 수감(收監)되었다고 말을 하는데, 그 소식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소. 바라옵건대, 주인장께서 이 사정을 돌아보시고 그 소식을 통지하여 주십시오.’ 하니,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형님 말고는 어느 곳에서 말을 꺼내 보겠습니까. 가엾은 그 정을 동생이 듣고는 이렇듯 왔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준식이가 대답하기를 “그 죄인의 성명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대답하기를 “최법헌(崔法軒)이라고 칭하더이다.” 하니, 또 대답하기를 “최법헌이란 이름은 없고, 최법푸리는 있지요.”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최법헌을 잘못 알고 최법푸리라고 말하기 쉽지요. 그러한즉 대관절 그 모습이 어떠하던가요?” 하니, 김준식이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수염이 많고, 머리가 벗어지고, 신체가 장대한 노인이오.”라고 말했다. 내가 대답해서 말하기를 “그러한즉 과연 그 사람과 같아요.” 하니, 김준식이 또 말하기를 “그런데 요즘에 그 노인이 설사로 인하여 대단히 신고(辛苦)를 겪는 중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이로부터 해월신사께서 병환이 대단히 위중하심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다음 날에 다시 편지를 한 장 써서 김준식에게 간청하며 설명하여 말하기를 “그 부인이 부탁하여 애걸복걸하며 말하기를 ‘이 서찰을 이 모양 그대로 주선하여, 최 노인 앞에 전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언급하기를 “다른 사람의 사정이 가련하고 또 불쌍한 사정이라, 모름지기 존형(尊兄)께서는 아무쪼록 이 가여운 사정을 고려하시어 잠시 서신을 전해 주시는 것이 적선(積善)을 하는 일이니 용납해 주십시오.” 하고 수차례 간절하게 청하니, 김준식의 말 가운데에 “이 일은 과연 난처한 일이다.”라고 하였는데, 또 설명해서 말하기를 “그러나 형님께서 전해 주실 의향만 있으시면 하지 못할 이유가 만무합니다. 이것은 동생의 일로 헤아려 주시고 꼭 시행하여 주십시오.” 하며 곡진하게 간청하니, 김준식이 부득이 서신을 비밀리에 전해 주었다.
그날 즉시 답장이 와서 받아 볼 수가 있었다. 그 편지에 말하기를 “여러 도인(道人)들은 무사하오. 여러 교인(敎人)들은 내가 이리 된 것을 조금도 근심하지 말고, 교(敎)를 잘 믿으시오. 내가 비록 이와 같이 되었으나, 나의 도를 잘 펼 것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 돈 오십 냥만 들여보내 주면 긴요하게 쓰겠소.” 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서로 편지를 하였으나, 가족에 관한 말씀은 별로 없고, 도(道)의 일만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부탁하셨다.
병환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의암 선생과 협의하여 동현(銅峴) 건재약방(乾材藥房)에 가서 인삼과 녹용을 구입하여 와서는 탕약(湯藥)으로 끓여서 김준식으로 하여금 더불어 차입(差入)하게 하였다. 또 돈 오십 냥의 돈을 들여보냈다. 그 돈은 해월신사 자신에게 쓴 것이 아니라, 그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는 배가 고픈 사람들의 불쌍한 사정을 생각하고, 그 돈으로 찹쌀떡을 많이 장만하여 많은 수인(囚人)들을 배부르게 먹게 한 것이었다. 그때에는 현재의 감옥의 법처럼 엄중하지 않았으므로, 그만한 자유는 있었다.
나는 매일 김준식의 집을 왕래하므로, 해월신사께서 어느 때에 재판을 받으시는지 자세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재판을 받는 날을 당하게 되면, 그날 꼭두새벽에 조반(早飯)을 마친 이후에 감옥의 문 앞에서 미리 대기하며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10시나 11시경이면 해월신사께서 감옥에서 나오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게 된다.
해월신사께서 아무리 골격(骨格)이 장대하실지라도 연세가 72세에 이르시고, 겸하여 병환을 얻고 계시며, 또 몇 달을 옥중에 갇혀 계셨으니 그 모습은 입으로 차마 형언할 수가 없고,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모두 나무로 만든 그 무거운 가쇄를 옥졸이 가쇄머리를 들고 평리원(平理院)으로 가실 때, 그 고통스러워하시는 형상은 글로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한두 차례씩 길거리에서 쉬기 위하여 앉아 계실 때 나는 해월신사의 옆을 따르다가, 해월신사께서 묵묵히 바라보시며 대단히 비감해하는 모습이 있을 때에 제일로 고민스러운 것은 정녕 흐르는 눈물을 금(禁)할 수 없음이었다. 다른 사람의 이목(耳目)을 가리기 위해 속으로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십여 차례의 재판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창졸간(倉卒間)에 음력 6월 1일에 좌도난정율(左道亂正律)이라는 죄명 아래 사형을 선고받으시고는, 그 다음 날 오후 신시(申時)경에 사형 집행을 당하셨다. 천지(天地)가 어두컴컴하여 큰비가 쏟아져 내리며,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말았으니, 어찌 천도(天道)가 무심하리오.
무릇 속히 판결을 내리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해월신사의 병환이 날로 더해 가며 매우 위중해지므로 하루라도 속히 판결을 내려 사형을 급하게 시행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급하게 행한 것은 병사할 염려가 있어서, 이런 큰 죄인을 신병으로 스스로 죽게 하는 것은 국가의 체면이나 정부의 위신상 용서하기가 어려운 일이라 칭하고는 그와 같이 빨리 판결을 내려서 육군법원(陸軍法院)으로 이감(移監)을 시켰다가 교수형을 당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애달프고 참담한 일이 있었으니, 지난 갑오년(甲午年)에 동학군(東學軍)에게 전사한 안성군(安城郡) 관군(官軍) 참령(參領) 이선재(李善在)의 아들이 항상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던 중에, 해월신사께서 사형을 당하셨음을 탐지하고는 육군법원 교형장(絞刑場) 뒤뜰에서 이틀 동안 경과(經過)하는 틈을 타서, 그 뒷담 무너진 곳으로 넘어 들어가서는 시체의 뇌수(腦髓)를 나무 방망이로 어지러이 때려서 크게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법률에 의하면, 사형 집행 후에 24시간이 지나면 매장을 하나, 그 당시의 법률은 사형한 이후 3일을 지낸 이후에야 내버려 흙으로 묻게 하였다. 그러므로 해월신사의 시신을 초사흘이나 되어서야 광희문(光熙門) 밖 북망산(北邙山)에 매장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녘에 김준식과 상의한 후에 상두꾼(喪頭軍) 두 사람을 이끌고 광희문 바로 근경(近境)으로 향하였다. 그곳을 향해 가다가 바라다보니, 그 당시 좌포청(左捕廳) 포교 두목으로 근무하고 있는 민응호(閔應浩)라는 사람이 매장 시신을 감시하고 있으므로, 놀라고 겁이 나서 머리를 돌려 동대문 좁은 길로 돌아서 광희문 앞에 이르니, 이때가 껌껌해지는 초저녁이 되었다. 큰비까지 내려서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모든 길에는 한 사람의 발자취도 없고, 수직(守直)을 서던 민응호도 돌아갔는지라, 그 틈을 타서 준비한 초롱(燭籠) 한 건(件), 황초(黃燭) 5매(枚), 종이우산[紙雨傘] 한 자루[柄], 마포(麻布) 한 필(疋), 칠성판(七星板) 한 립(立)을 가지고 김준식과 목패(木牌)의 제명(題名)으로 ‘동학 괴수 최시형(東學魁首 崔時亨)’이라고 목패를 세운 장지(葬地)를 찾았다.
초롱과 우산은 김준식에게 주어 세우게 하고, 나는 상두꾼과 함께 시신을 파려고 할 때, 상두꾼들이 시신에 손대는 것을 꺼려 꼬챙이로 추적거리는지라, 내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아무리 다른 사람의 시신이라고 해도 너희들은 돈을 받았으니, 성실하게 해 주는 것이 옳거늘, 이와 같이 불경(不敬)한 것은 결단코 옳지 않은 일이다. 너희 두 사람이 하체를 잡으면, 나는 상체를 옮길 것이다.” 하고, 무덤 중의 시체를 지상으로 운반하였다. 운반해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다만 몸에 걸쳐진 것이라고는 다 떨어지고 누추한 한 겹뿐이 되지 않는 깃저고리[褥] 한 벌뿐이었다. 그 깃저고리를 벗겨서 파헤친 광(壙) 안에 묻어 버렸다. 시신을 칠성판(七星板)에 모시고 본즉 머리가 파손이 되어 상해 있어서, 차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파손이 된 뇌수를 마주 맞추고 마포(麻布)로 엄습(掩襲)하였다. 그리고 해월신사께서 묻혀 있던 곳은 다시 흙을 덮어 전과 같이 만들어 놓고, 목패도 역시 세워 놓은 후에 즉시 길을 떠났다.
그때에 큰비가 쏟아졌다. 비가 쏟아지는 중에 비를 무릅쓰고 밤을 새워, 광주군(廣州郡) 북면(北面)에 사는 신자 이상하(李相夏) 씨의 집으로 갔다. 의암 선생과 손병흠, 그리고 이상하 제씨(諸氏)를 만나 이상하 씨의 집 뒤에 있는 산자락에 임시로 토감(土坎)을 만들고 흙으로 덮었다.
대체로 해월신사께서 사형 집행일로부터 시작하여 토감을 만드는 일을 마치는 그날까지 큰비가 계속 내리는 장마가 졌었다. 그러한 것은 죽을 지경에 이른 창생(蒼生)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자 하며, 부패한 세상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은혜로운 비가 내린 것이다. (해월 선생께서) 38년간의 진리를 펴고 전하여 여러 중생들을 모이게 하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목적을 달성하도록 노력하신 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애통한 마음으로 임시로 무덤 조성하는 토감을 마무리하고는, 그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의암 선생을 모시고 지평군(砥平郡) 대왕리(大旺里)로 내려가서 한 달을 머물러 있었다. 이후 의암 선생께서는 충청도 당진군(唐津郡) 모곡(茅谷)이라고 부르는 동네로(띄율) 주택을 정하여 내려가셨다.
내가 지평 대왕리에 있을 때인 10월달에 병정들에게 쫓기어 홑적삼[單衫]과 홑바지[單袴]만을 몸에 걸치고는 용문산(龍門山) 상상봉(上上峰)으로 도주를 하였다. 깊은 밤중 큰 추위에 서리와 바람과 차가운 기운은 사람을 고달프게 하고, 배고픔이 뼈에까지 스며들었다. 춥고 차가움을 견뎌내지 못한 데다가, 캄캄한 한밤중에 빽빽한 수풀로 인하여 동서(東西)를 분간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무를 붙잡고, 바위를 어루만지며 좁은 길을 겨우 찾아 내려가다가, 층암절벽(層巖絶壁)과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서 추락하였으나, 마침 등나무 위에 걸려서 다행히 위험한 지경을 면하였다.
멀리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고 아래로 내려가 인가를 찾아가 마침내 다행히 감아울이라는 동네에 있는 심원일(沈元日)의 집에 당도하였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사랑 아랫목에서 누워 잠을 자던 노인은 심원일의 아버지였다. 그 노인이 깊은 밤중에 황급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는 놀라고 겁도 나서 일어나 앉아서 촉 불을 돋우고 바라보니, 의복은 다 헤어져 찢어지고 머리카락은 홉사 난마(亂麻)같이 되어서 헙수룩한 봉두(蓬頭)의 모양이 바로 미친 사람의 모양이었다. 몹시 급하고 당황해하며 물어보았는데, 내가 대답하기를, 저는 이와 같은 사람으로 뜻하지 않게 병정들에게 쫓김을 당하여 피해 온 사연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며 산중에서 어려움을 당한 세세한 실정을 진술하여 말을 하였다. 그 노인이 이를 듣고는 대단히 가련하다고 하며, 안방 너머 편에 있는 한 골방에 편안히 쉬게 하여 화를 피하게 되었다.
수일이 지난 후에 본가(本家)로 돌아갔다. 가족을 이끌고 뒷날 양근(楊根) 북면(北面)에 있는 석밧항이라는 동네로 옮겨 갔다. 몇 칸 되지 않는 초가집을 정하고는 일 년간 짚신을 파는 장사로 근근이 가계를 보존하며 지냈다.
이후 경자년(庚子年, 1900) 2월 초승으로부터 양근(楊根) 자점이라는 동네와 원주(原州), 용인(龍仁), 과천(果川), 양주(楊州) 등 각 군(各郡)을 전전하며 살아갔다. 이렇듯 살다가 갑진년(甲辰年, 1904) 1월에 서울로 올라와 일본으로 건너가서 의암 선생을 모셨고, 9월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 진보회(進步會)를 창설하였다. 다시 이를 바꾸어 일진회(一進會)로 그 명의를 변경하였다.
다시 진행(進行)하던 중에 을사년(乙巳年, 1905) 11월에 천도교 문패(門牌)를 대한문(大韓門, 韓은 漢의 오자) 앞 청(淸)나라 사람들이 사는 집에 임시 사무소(臨時事務所)를 정하였다. 그때 병정들이 담장을 에워싸고 포격하였는데, 일본 병사 수십 명이 지나가다가, 이러한 현상을 목격하고는, 이른바 병정들을 쫓아냈다. 그러므로 교인(敎人)들 중 죽은 사람은 없어도, 중경상자가 많이 났다.
병오년(丙午年, 1906) 1월 초4일에 의암 선생께서 환국(還國)하신다는 전신(電信)이 도착하였기에, 부산역(釜山驛)에 내려가서 모시고 상경하였다. 다동(茶洞)에 임시로 주택을 정하고 천도교 중앙(天道敎中央) 문패(門牌)를 달고는 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때 나는 고문(顧問)의 임무로 교무에 종사하였다.
그해 2월에 천도교 종령(宗令)을 발(發)하여, 각 도(各道) 부군(府郡)에 교구(敎區)를 설치하고, 천도교를 넓게 펴기 위하여 열세 개의 도(道)에 특파원(特派員) 스물여섯 사람을 선정하여 각 도에 두 사람씩을 파견하였다. 이들로 하여금 천도교의 종지(宗旨)와 목적(目的)의 공함(公函)을 각 부군서(府郡署)에 교섭(交涉)하며, 수십 년간 수도(修道)한 교인에게 위문도 하며, 또 교리를 방방곡곡의 교인 및 교외(敎外)의 사람까지도 설명하게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일진회를 폐지하고 천도교로만 종사하는 것이 옳다는 회의가 열렸다. 그때 일진회의 회장인 이용구(李容九) 및 송병준(宋秉畯) 양씨(兩氏)를 초청하여 일진회 폐지에 관한 일을 설명하였다. 그러한즉 이 두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지라, 재삼 권고하였으나 하나같이 듣고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러거늘 의암 선생 말씀이 “우리들의 목적은 다만 천도교라. 만일 이용구와 송병준 두 사람이 흔쾌히 따르지 아니하면, 불가불 천도교 밖의 사람으로 인증(認證)할 것이요, 출교(黜敎)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하시고, 일진회에 종사하는 사람들 62사람을 출교한 이후에 신문지(新聞紙)상으로 천하에 널리 알렸다.
그때 이용구가 나에게 간청하며 “대신(大臣)으로 천망(薦望)하였으니, 일진회에 와서 종사(從事)하자.”는 언사(言辭)로 수차례 권고(勸告)하였다. 이때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단지 우리 스승님의 심법(心法)을 받은 자라. 대신(大臣)의 직책을 어찌 요구하리오.” 하며 이와 같이 사실로 거절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907) 6월에 현기사장(玄機司長)의 임무로 근무하다가, 8월에 경무청(警務廳)에 잡혀 여러 달 동안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다행히 11월에 방면(放免)되었다. 그 당시 경무사(警務使)는 일진회 출신의 구연수(具然壽)라는 사람이었다.(宋秉畯의 食眷으로, 服從하는 者였다) 무릇 잡아들여 가두어서 곤고(困苦)를 당한 일은 지난날 수차례 일진회 조직을 거절하고 흔쾌히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음해(陰害)한 것이었다.
무신년(戊申年, 1908) 2월에 대종사장(大宗師長)의 임무로 근무하다가, 기유년(己酉年, 1909) 8월에 그 직책을 사면(辭免)하였다. 홍병기(洪秉箕) 씨가 그 후임으로 계승하고, 나는 장로(長老)의 직임을 맡게 되었다.
경술년(庚戌年, 1910) 5월 15일 동소문(東小門) 밖 화계사(華溪寺)에 딸려 있는 삼성암(三聖菴)에서 49일의 기도를 할 때에, 강시(降詩)를 쓴 것이 있다. 그 시(詩)에 말하기를,
바닷가 구름 걷혀 달빛 밝은데 / 海國雲晴月色明
공계(空界)에 머물러 있으니 하늘 역시 없구나 / 空界住在天亦無
푸른 물결 허공중에 일어 사람 과연 떨어지니 / 碧波動虛人果落
마음 달이 비로소 슬기로운 보감(寶鑑) 이루었네 / 心月始成慧寶鑑
우리나라 하늘이 다시 맑아지고 운 역시 밝아져 / 韓天更晴運亦明
성세(聖世)에 덕을 세우니 만세의 영광이로다 / 聖世樹德萬世榮
하늘 같은 큰 덕 널리 펴는 날에 / 如天大德廣布日
정성을 지키고 어짊을 믿어 함께 배부르네 / 守誠信賢共飽腹
신이 움직이니 하늘 역시 따라 / 神動天亦隨
푸른 바다 한가운데로 그림자 흘러든다 / 影流碧海中
만물은 귀신의 흔적이요 / 萬物鬼神迹
육신은 물 위에 뜬 거품이라 / 肉身水上泡
누가 말했나, 몸뚱이가 영원히 죽는다고 / 誰云身永死
사람 이후의 사람 또 있도다 / 人後人亦在
몸은 비록 죽어도 나는 여기에 있으니 / 身雖化仙我玆在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데 어찌 혐의하겠는가 / 一來一去何以嫌
오는 하늘도 가는 하늘도 모두 바로 나이고 / 來天去天都是我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과연 역시 하늘이로다 / 來人去人果亦天
환골탈태한 그 모습 / 換骨脫其形
다시 돌아와 나 알아보지 못하네 / 更還吾不知
봄이 가며 봄이 또 오고 / 春去春又來
꽃이 떨어지면 꽃이 다시 피네 / 花落花更開
대도가 하늘에서 나오니 / 大道出于天
세상 사람들은 천지의 그림자로다 / 世人天地影
봄바람 불어오는 날 / 薰風吹去日
온 세상이 일시에 아니 / 天下一時知
평생에 구하는 바가 무엇인가 / 平生何所求
그 뜻을 어진 분의 문하에 두는 것이로다 / 志在賢門下
(번역:윤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