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초7일 순영(巡營)에 보낸 이문
상고할 일. 곧 조방장 김산군수의 이문을 접한 즉 “곧 도착한 전라도 무주(茂朱) 겸임인 제원찰방(濟源察訪)의 이문 내에 ‘같은 부(府) 이안면(二安面) 존위(尊位)의 보고 내에 「동도(東徒) 5, 6천 명이 이달 초4일 해시(亥時) 무렵 본면(本面)에 당도하여 장차 읍내로 향하려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각 면(面)의 의소(義所)에 연달아 통문(通文)을 보내서 일제히 군대를 출동하려고 할 즈음에, 일본 사람 9명이 풍동(豊東) 금척리(金尺里)에 이르렀다. 곧 이향(吏鄕)을 보내서 급한 사정을 알려 구원을 청하였더니, 동 통문의 사언(辭言) 내에 「일본 사람이 이때 귀군(貴郡)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문으로 10사람만 청해 왔기 때문에 이에 공문을 보내니, 모름지기 우리 고을의 정상을 헤아려서 권해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무주에서 김산에 이르는 거리는 100리에 불과하니, 미리 방수(防守)하는 일을 조금도 느슨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이문을 보내니, 귀영(貴營)의 병정(兵丁) 1초(哨)에게 명령을 내려 보내서 방어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