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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계실기 蒼溪實記
일러두기

19일

관에 물어 조처하기 위해 이제 막 동헌(東軒)으로 들어가 헐청(歇廳, 휴게소)에 이르렀다. 수리(首吏) 박주목(朴周睦)이 말하기를,
 “동학란이 이처럼 창궐(猖獗)하고 있는데도, 이곳은 음우(陰雨)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 저들이 우레처럼 신속한 공세를 취하고 있으니, 어떤 계책을 써야 이 성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주목이 헐청 앞에서 (동학농민군에게) 결박을 당하였다. 우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고 산야가 모두 흰옷으로 덮였다. 내가 몸을 빼어 곧바로 동헌에 들어가니 처마의 풍경소리만 고요하고 쓸쓸하다. 오합지졸이라서 모두 흩어지고, 다만 통인(通引) 박오현(朴五鉉)만 있었다. 본관 사또가 놀라서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화가 장차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계책을 써야 할 것인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저들의 무리는 비록 숫자가 많지만 대오가 없고, 비록 강하나 의리가 없습니다. 대오가 없는 졸개들이 의리가 없는 일을 행하니 어찌 하루의 계책이 있겠습니까. 삼가 무리를 놀라게 하지 말고 동정을 살피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또가 말하기를,
 “알았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작별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왔다.
 적은 과연 침범하지 못하고 남쪽을 공략하려고 하였다. 남쪽은 우리 집이 있는 곳이다. 그날 저녁에 나귀를 채찍질하여 신령(薪嶺)에 이르렀다. 멀리 남쪽 공산(公山, 팔공산)을 바라보니, 요기가 하늘에 넘쳤다. 신원(薪院)에 당도했더니 완악한 저 도적들이 소굴을 넓게 차지하고는 사람들을 칼로 협박하고 총으로 몰아내었으며, 도당(徒黨)을 나누어 보내 촌락을 노략질하였다. 재물과 비단, 소와 말, 곡식, 그리고 총과 창을 있는 대로 빼앗고, 없으면 주민을 잔인하게 해쳤다. 이 때문에 노약자들은 도망가다가 도리어 타상(打傷)을 입기도 하고, 부녀자들도 피신하다가 끝내 넘어지고 자빠졌다. 기강과 윤리가 무너진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어느 누가 몸속의 피가 흐르지 않으리오마는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탄식이 이에 극도에 달했다.
 해 질 녘에 집에 이르니 부로(父老)들은 길로 달아나고, 어린이와 병약한 사람들은 계곡에 숨어서, 마을에는 사람이 없었다. 막 밤이 다시 깊어지자 점점 사람들이 나와서 각각 듣고 보았던 것을 알려 왔다. 남쪽의 대율(大栗)과 서쪽의 거수(巨首), 칠곡의 동북(東北), 군위의 효령(孝令)은 가히 하늘과 땅을 그물질하였다고 할 만해서, 우리 마을에서 당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당사자들이 갈팡질팡 어찌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남쪽에서 온 손님이 있었는데, 곧 대구의 사인(士人) 이병두(李柄斗)였다. 평소 알고 지낸 사람이었는데, 적을 방어하는 대책의 장단점을 따지며 밤을 새웠다.

주석
음우(陰雨)에 대한 대비책 음우(陰雨)에 대한 대비책:미리 위험한 것을 방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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