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대구(大邱)의 사인(士人) 이하상(李夏祥)이 이번 의거를 듣고 도보로 고개를 넘어와서 말하기를,
“아! 저 비류들은 윤리와 강상을 무너뜨리고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잔인하게 해쳐서 스스로 하늘을 끊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오늘날 적수공권에 단심(丹心)으로 오직 ‘의(義)’ 한 글자만을 위국(衛國)과 안민(安民)의 사이에 기치로 세우셨습니다. 하상은 비록 그런 위인은 못 되나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백열(栢悅)의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당시 원근의 제현들도 누구나 갖고 있는 품성은 똑같았기 때문에 시사를 개탄하며 혹 방어책을 논의하기도 하고, 혹 적을 토벌한 일을 하례하니, 봉마(蓬麻)의 문에 수레가 잇달아 찾아와 빈 날이 없었다.
군위의 이조영(李祚永)ㆍ이두영(李斗永)ㆍ최봉실(崔鳳實)ㆍ최정로(崔貞魯)ㆍ최봉소(崔鳳韶), 본 의흥군의 박연기(朴煉基)ㆍ박태한(朴泰漢)ㆍ박원식(朴元植)ㆍ노광호(盧光昊)ㆍ노용호(盧龍昊)ㆍ금석호(琴錫瑚)ㆍ홍만하(洪晩河)ㆍ이원재(李元在)ㆍ이진재(李鎭在)ㆍ홍경흠(洪暻欽)ㆍ이재극(李在極)ㆍ박우식(朴禹植)ㆍ김홍삼(金鴻彬)ㆍ박찬조(朴瓚祚)ㆍ홍만석(洪晩錫)ㆍ박태건(朴泰健)ㆍ박재선(朴載璇)ㆍ홍종원(洪鍾遠)ㆍ홍종택(洪鍾澤)ㆍ박태전(朴泰銓)ㆍ박재관(朴在寬)ㆍ최흥종(崔興鍾)ㆍ홍재욱(洪在郁)ㆍ박현인(朴顯垔)ㆍ박응식(朴膺植)ㆍ도현룡(覩見龍)ㆍ도오룡(都五龍)ㆍ손태영(孫泰永)ㆍ손선영(孫善永)ㆍ박종하(朴鍾夏)ㆍ박성찬(朴誠瓚)ㆍ장제구(蔣濟九)ㆍ진상련(陳尙鍊)ㆍ김규준(金泰準)ㆍ이만우(李萬宇)ㆍ이상의(李祥儀)ㆍ최대려(崔大呂)ㆍ최동태(崔東泰)ㆍ문현상(文現相)ㆍ이장복(李章福)ㆍ이장춘(李章春)ㆍ박현옥(朴顯玉)ㆍ박현구(朴顯玖)ㆍ이광춘(李光春)ㆍ이유구(李裕龜)ㆍ박원식(朴元植)ㆍ박태호(朴泰鎬)ㆍ박만송(朴晩松), 칠곡의 조병위(曺秉衛)ㆍ조병구(曺秉樞)ㆍ정치환(鄭致賢), 대구의 신숙균(申琡均)ㆍ이달상(李達祥)ㆍ서정곤(徐正坤)ㆍ채윤기(蔡尹基), 신녕의 장두영(張斗永)ㆍ장두길(張斗吉)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