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칠곡의 가산(架山)은 바로 험준함에 의거한 요충지로서 다섯 읍의 진(鎭)을 관할하는 곳이다. 당시 칠곡부사 남궁억(南宮檍)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는데, 의(義)를 지켜 적을 막아냈으며, 비류 십수 명을 베어 죽였다. 해당 고을의 약장(約正) 조승화(曺華承), 이재후(李在厚), 이경용(李敬用)과 함께 방어책을 만들고서, 군기(軍器)를 관장하기 위해 가산에 머물러 있었다. 의흥에서의 조약과 연습 상황을 듣고 약중(約中)의 복색(服色)으로 청하고, 진무하면서 가산의 성에 올랐다. 가산은 바로 이 고을의 서남쪽의 웅진(雄鎭)이니, 어찌 질의하고 강무(講武)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드디어 오르내리는 고달픔을 꺼리지 않고 이어서 북을 치고 나아갔다. 칠곡부사가 맞이하여 말하기를,
“의병을 앞장서서 일으켜 이웃 지역도 힘입어 안정되었으니, 거룩한 일입니다. 또한 나라를 지킨 충량(忠良)한 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하례할 방법이 없기에 술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함께 기뻐하고 군무(軍武)에 관한 일을 질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