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새벽에 율리(栗里)의 장인(丈人) 박영로(朴永魯) 씨, 사우(士友) 홍희흠(洪羲欽), 본 마을의 이정좌(李庭佐), 이호(李琥)가 찾아와서 위로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번에 국사(國事)로 가게 되니, 오직 의를 따를 뿐입니다. 마땅히 힘을 다해 기치를 세우고 공을 세우면 어찌 우리 사문(斯文, 유학을 뜻함)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고 악수하고서 떠나보냈다. 그리운 마음이 그치지 않았다.
드디어 신원에 내려가 박용식(朴鏞植)에게 묻기를,
“군량은 어떠한가?”
라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읍에 구획한 것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곧바로 수리(首吏)를 불러 꾸짖기를,
“군율은 엄중한 것이니 조금이라도 지체하기 어렵다. 군량미를 아직도 마련하지 않았으니, 책임지게 하겠다.”
라고 하자, 수리(首吏)가 관에 알려 곧바로 사창미(社倉米)를 수송하여 왔다. 군중(軍中)에게 전대와 주머니에 넣어 휴대하게 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어서 출발하려고 했으나 출발하지 못하고 신원에 주둔하였다. 조두(勺斗)가 밤에 고요하고, 별들이 흩어졌다 모였다 한다.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에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데, 만사가 뒤틀려 심란하다. 승냥이와 이리 같은 자들이 눈앞에 있으니, 활과 말을 다루는 재주는 없으나, 간뇌(肝腦)를 으깨어 땅바닥에 뿌릴 뿐이로다.
이윽고 문을 지키는 병졸이 와서 고하기를,
“흰옷 입은 10여 명이 갖은 애를 써서 들어오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허락하였더니, 여러 명이 좌석 앞에 나와 말하기를,
“‘지초가 불에 타면 혜초가 탄식하고,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고 하였습니다. 초목도 그러한데, 하물며 자기의 마음을 허여한 사람이겠습니까? 지금 국난에 나아가시니,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바로 채준기(蔡駿基), 이병두(李柄斗), 이정표(李庭杓), 이류(李瑠), 이인곤(李寅坤), 이종근(李鍾根), 김재한(金在漢), 백성근(白成根) 등 여러 사람들이었다.
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전쟁이란 죽는 곳입니다. 저는 이미 국사로 불렀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지만, 여러분께서는 오래 사귄 정리로서 함께 뛰어들고자 하시니, 마음이 심히 편안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각각 스스로 진중해 주십시오.”
라고 하고서,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단속하고 길 떠날 채비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