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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계실기 蒼溪實記
일러두기

22일

장차 출발하려고 할 때 본관 사또가 군대에 소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신재선(申在濬), 신재수(申在洙), 신석철(申錫澈), 신재하(申在河), 신상철(申相哲), 신재기(申在琪), 신재기(申在祺) 등 부로(父老)들께서 나를 대접[鷄黍]하고 송별하며 말하기를,
 “늙은이들이 불행히도 죽지 않고 그대를 전장으로 보내니, 일이 중대하지만 마음이 슬프다. 그대는 평소에 효도하고 공경하던 마음을 전쟁터에서 용맹함으로 바꿔, 죽을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라. 그리하여 충성스럽고 절의가 있었던 우리 선대의 명성을 부끄럽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나는 명을 받고 재배하며 말하기를,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고서 드디어 군오를 정렬하고 길에 올랐다.
 이보다 조금 전 군병들의 아비는 죽을 때가 다된 노년에 자식을 보내며 통곡하였고, 군병들의 아내는 눈보라 치는 좁은 길에서 남편을 바라보고 울부짖으니, 깎아지른 절벽에서 원숭이가 새끼를 찾고, 가을 하늘에 기러기가 짝을 잃은 것 같아서 차마 보고 들을 수가 없었다. 군율이 정숙하여 앞에서부터 초병(哨兵), 삼포(三砲), 후대(後隊)가 줄로 물고기를 꿴 듯하였다.
 홀연 일진의 급보(急報)가 서쪽에서 왔다. 급히 알리고자 하는 것 같아서 군진을 재촉하여 출발하였더니, 찾아온 사신이 앞에 이르러 말하기를,
 “장군은 우선 정지하시오.”
라고 하고서 한 장의 공문서[封傳]를 받들어 올렸다. 살펴보니, 소모사(召募使)가 의흥 진중에 내린 감결(甘結, 상급 관아에서 하급 관아로 내리는 공문)이었다. 호남의 비류 2천 명을 영동(永同)의 산골짜기에서 격살하고 소모사의 본군(本軍)이 돌아가니, 의흥읍에서 보낸 군정(軍丁)도 일일이 진을 혁파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 내용을 제군(諸軍)에 알렸더니 제군들이 내게 하례하기를,
 “전쟁하지 않고 적진을 쳐부수셨으니 우리 장수의 복이며, 칼을 안 쓰고 모두 복종시켰으니, 우리 장수의 덕입니다.”
라고 하면서 서로 더불어 춤추고 노래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주민과 제군들이 한마음이 되어 이리 된 것이지, 내가 어찌 관여된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고서 창을 던지고 말에서 내려 크게 군(軍)을 대접하고 술로 위로하여 각기 집으로 돌려보냈다.
 며칠 후 우리 마을의 여러 사람들과 이웃 지역의 여러 우인들이 소 잡고 술잔치를 벌여 환영하였다. 한목소리로 호응하는 곳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의흥의 향약에 힘입고 있다.

하루는 홍규흠(洪奎欽)과 소용구(蘇龍九)가 대구에서 돌아와 손을 잡고 나를 위로하기를,
 “지난날 군진(軍陣)에 나아가서는 다행히 오른팔을 담당하여 수고로움을 극진히 하였는데 고락(苦樂)을 함께하지 못했으니, 비록 형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면 한스럽고 한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다.
 한번 갑오년에 동도(東徒)를 섬멸한 뒤부터는 비류가 종적을 감추고 유민(流民)이 안정되었으니, 8, 9년간은 편안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도적 떼가 또다시 일어나서, 큰 도적은 성읍을 공격하고, 작은 도적은 향리(鄕里)를 약탈하였다. 당시 집포사(戢捕使) 조병유(趙秉瑜) 씨가 바야흐로 적을 막는 계책과 토평(討平)하려는 뜻으로 근심하여 나를 불러서 질의하기를,
 “예전 세 고을의 회약(會約)은 한번 효과를 경험한 의약입니다. 바라건대 나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실제 옛일에 의거하여 일일이 아뢰니, 집포사가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라고 하고서, 이어 내게 부탁하기를,
 “경주, 청송, 의성, 영천, 신녕, 비안 등지는 왕왕 비류들이 산에 의지하여 소취(嘯聚, 휘파람으로 신호하고 패거리를 모음)하고 사납게 약탈함이 더욱 심하니 이는 작은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원컨대 한번 가서 적의 기세가 어떠한지 정탐해 주시고 민심을 단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은 멀고 위태로운 곳이라서 수고로움이 유난히 심하겠지만, 이것은 국사(國事)이고 돌아보건대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바라건대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나는 드디어 행장을 꾸려서 신녕과 영천, 경주, 의성 등지의 각 군 가운데 깊고 가파른 산골짜기, 적의 소굴 등을 순행하였다. 하나같이 집포사의 가르침대로 하고, 거의 수개월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주석
대접[鷄黍] 대접:계서(鷄黍)는 닭을 잡아 국을 끓이고 기장으로 밥을 짓는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공문서[封傳] 공문서:봉전(封傳)은 옛날 역참(驛站)을 거쳐 서울과 지방(地方)으로 오가던 공문서(公文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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