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내 유생의 장초[縣內儒生狀草]
품보(稟報)하는 일입니다. 삼가 아룁니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내리고 훌륭한 일을 하였으면 반드시 포상하는 것은 사기를 격려하고 풍습의 교화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옛적에 다스리는 법도에 능한 자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요행히 녹을 바라는 일이 없었고, 재야에서는 현인이 등용되지 않는 탄식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 평소에 강구하신 바이고, 저희들도 이것을 합하께 바라옵나니, 열 집 되는 작은 고을의 충신의 선비가 성대한 포상의 은전을 받을 수 있도록 살펴 주시고 전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현내면 사람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입니다. 대대로 충렬가의 명성을 세습해 온 것이 역사책에 실려 있고, 수신과 효제, 행의(行誼)로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명심보감 한 편(篇)을 두고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도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입지의 강고함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에 시운(時運)이 이롭지 않아서 저 어리석은 동비(東匪)들이 감히 임금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였고, 아래로는 화란에 빠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호남에서 영남까지 제압하지 못하여 우리 강역까지 침범하여 강제로 약탈하고 빼앗아 가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해 8월 18일 신석찬은 이웃 마을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적을 초멸(剿滅)하는 의리를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아, 저 동도(東徒)들은 감히 왕사(王師)에 대항하니 교화할 수 없는 역적이며, 그릇된 법을 전하고 주장하니 사문(斯文, 유학)의 난적이며, 하나같이 약탈을 일삼으니 화적(火賊)의 괴수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범한 게 있으면 만번 죽이더라도 가벼운데, 하물며 세 가지 죄를 범한 자가 어찌 천지간에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이에 세 지역에 통문을 보내어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8월 21일에는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에서 도적들을 포위하여 27명을 사로잡고, 그대로 군사들의 용맹한 기세를 타고서 동쪽으로 화산의 도적을 쳐 그 무리를 사로잡고, 서쪽으로 효령의 소굴을 격파하여 그 괴수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에 원근에서 한목소리로 호응하여 인심이 바르게 되었으며,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낙동강의 동쪽과 서쪽 지역이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소모영 및 토포사도 신석찬이 적을 토벌한 의리와 적을 막아낸 대책이 있음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더불어 힘을 합해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12월 18일에 직사(直使)가 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니, 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들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 멀리 싸우러 가는 것은 유생들의 병력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여 관군 2백 명을 얻었습니다. 박용식(朴鏞植), 이양욱(李亮郁)으로 좌우를 삼아 함께 병사를 징발하니, 항오(行伍)가 매우 엄정하였습니다. 신원에 이르자 소모영에서 보낸 진영을 혁파하라는 관문을 받고 회군하여 집에 각각 돌아오게 되었으니, 제군(諸軍)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진영을 혁파하니 우리 장수의 복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쟁이란 사지(死地)인데, 백면서생으로 두려움 없이 싸우러 나아갔고, 이겼다는 말을 듣고 돌아올 때도 자신의 요행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평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넉넉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도적을 평정한 후 공을 자랑하지 않고,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아서 산림에 자취를 감추니 그 지조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숨어 지내거나 현양하는 것이 신석찬이 지키는 바에 이익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은 없으나, 세상에 없는 이러한 공적이 있는데도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성대(聖代)에 흠이 되는 일이 아니며, 공론이 억울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군(州郡)에서 수재(秀才)를 천거하거나 벼슬에 나아가게 하는 것은 옛날의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먼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궁중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위로 아뢸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일제히 성주 합하께 우러러 진술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실상에 의거하여 감영에 보고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임금께 아뢰어 포상의 은전을 입어 풍화(風化)를 장려할 수 있게 되기를 천만 바라고 바랍니다.
데김[題音]에,
“난리를 당하여 마음을 변치 않고, 사악한 무리를 없애 새롭게 하였으니, 대저 이런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선비이다. 공의(公議)로 함께해야 할 바이니, 자연히 천양(闡揚)함이 있어야 할 일이다.”
라고 하였다.
유생(儒生)
이호(李琥), 홍석규(洪錫圭), 이인곤(李寅坤), 이정표(李庭杓),
이종근(李鍾根), 도성기(都聖基), 이류(李瑠), 이종익(李鍾益),
홍계흠(洪桂欽), 신재하(申在河), 이영(李瓔), 이병하(李秉河),
이기영(李基榮), 박제규(朴濟奎), 이규후(李圭厚), 곽대곤(郭大坤),
이영춘(李永春), 홍기표(洪祺杓), 이정명(李庭明), 손태호(孫泰昊),
홍기진(洪祺鎭), 우규석(禹珪碩), 박혜식(朴蕙植), 김취성(金就成),
박문석(朴文錫), 박화식(朴和植), 이정진(李貞震), 고윤문(高允文),
고인승(高麟升), 이승곤(李昇坤), 이인상(李仁祥), 홍즙수(洪檝修),
이교흥(李敎興), 박영기(朴永基), 신석대(申錫岱), 신석래(申錫來),
박만조(朴晩祚), 이규백(李圭白), 신석영(申錫永) 등
1895년(을미) 11월 향중(鄕中)에서 연명하여 겸부(兼府, 수령이 군사 직책을 겸임)에 올린 장초(狀草)[同年十一月 鄕中聯名呈兼府狀草]
의흥 유생 이호(李琥), 홍석규(洪錫圭), 이종근(李鍾根) 등이 겸임 성주 합하께 상서(上書)합니다. 삼가 아룁니다. 선비가 세상에 처하여 말 한마디나 행실 한 가지라도 풍화(風化)에 가르침이 있었으면 주군에서는 반드시 그를 선발하였고, 장리(長吏)들은 반드시 그를 벽서(辟署)하였으니, 이리하여 사기가 격려되고 풍화가 권장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난리를 당해 변치 않는 의리와 사악한 무리를 없애 새롭게 한 공로가 언행 사이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간 자취에서도 환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포상을 입지 못한 것은 실로 성대(聖代)의 흠이고 사론(士論)에서도 개탄하는 바이기에, 이에 감히 한목소리로 어질고 밝으신 분께 우러러 호소하오니, 삼가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고을 사인(士人)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으로서 대대로 충렬(忠烈)을 이어 왔고, 집에서는 효제(孝悌)를 전해 와서 향당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입지의 강고함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 갑오년 때 저 어리석은 동비들이 감히 임금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였고, 아래로는 화란에 빠진 사람이 많아서, 호남에서부터 영남에 이르기까지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기세는 마치 거대한 고래가 그물에 걸린 듯 창졸간에 다스리기 어려웠고, 인심은 마치 머리를 내밀고 적의 동향을 살피는 쥐처럼 머뭇거리며 앞으로 진격하지 않았으니, 모든 영남이 함락되는 것도 머지않았었습니다. 신석찬은 의흥, 군위, 칠곡 세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크게 탄식하고서 도적을 초멸(剿滅)하자고 창의하며 말하기를 “아, 저 동도는 감히 왕사(王師)에 거역하였으니 교화를 벗어난 도적들이며, 그릇된 법을 전파하고 부르짖으니 사문난적(斯文亂賊)이며, 하나같이 약탈하고 다니니 화적(火賊)에서도 으뜸가는 자들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범한 게 있으면 만번 죽이더라도 가볍거늘, 하물며 세 가지 죄를 범한 자이겠는가.”라고 하고서 세 지역에 통문을 발하여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8월 21일에는 도적들을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에서 포위하여 27명을 잡아 죽였고, 22일에는 동쪽으로 신녕의 도적들을 격파하여 그 무리들을 잡았으며, 23일에는 서쪽으로 효령의 소굴을 격파하여 그 괴수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에 인심이 바르게 되돌아와 사학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으며,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어 다시는 갑령(甲嶺)의 남북과 낙동강의 동서를 범하지 않게 되어 온전하게 쉴 수 있게 되었으니, 누가 ‘혼탁한 물에서 굳게 지키고[渾河之守膠], 강물 가운데의 지주이다.[中流之砥柱]’라고 아니하겠습니까?
당시 소모영과 토포사가 신석찬이 앞장서서 창의하였음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함께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사(直使)가 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자 신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을 포획한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 멀리 싸우러 가는 것은 유생들의 병력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관군 2백 명과 6일분의 식량을 갖고 행진하였는데, 신원에서 진영을 혁파하라는 소모영의 관문을 받고 드디어 회군하여 되돌아오게 되었으니, 제군(諸軍)들이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진영을 혁파하니 우리 장수의 복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쟁이란 사지(死地)인데, 백면서생으로 1여(旅, 500명의 군사)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니, 충의(忠義)가 마음속에 뿌리박지 않고서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는 또한 자신의 요행으로 여기지 않았고, 적도(賊徒)가 이미 평정되자 몸을 거두어 공이 없는 것처럼 임하(林下)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가 지조를 굳게 지킨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군공(軍功)에 대한 작위와 상이 비록 신석찬이 지키는 바에 이익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은 없으나, 세상에 없는 이러한 공적이 있는데도 오히려 포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실로 성대(聖代)에 흠이 되는 일이며, 사론이 억울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보고서를 전하고 임금께 아뢸 수 있도록 본관 성주께 아뢰었더니, 데김[題音]에 “난국을 당하여 마음을 변치 않고, 사악한 무리를 없애 새롭게 하였으니, 대저 이런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선비이다. 공의(公議)로 함께해야 할 바이니, 자연히 천양(闡揚)함이 있어야 할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먼 지방의 백성들은 궁중과 아주 멀어 위로 아뢸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문서를 덧붙이고 일제히 겸임 성주 합하께 우러러 호소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사실대로 감영에 보고하고 임금께 아뢰어, 포상의 은전을 받게 하여 사기(士紀)를 격려해 주시기를 천만 바라옵니다.
데김[題音]에,
“몸을 떨쳐 적진에 나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바인데, 맨 먼저 창의하여 요망하고 간사한 기운을 깨끗이 쓸어버렸으니,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의를 실로 겸하였다. 마땅히 대구부(大邱府)에 보고하여 포창을 기다리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후(後)
박현학(朴顯鶴), 홍건우(洪鍵佑), 김임준(金琳準), 박태형(朴泰瀅),
박태덕(朴泰德), 최호문(崔浩文), 박원묵(朴元默), 이병재(李炳在),
박심묵(朴心默), 박태두(朴泰斗), 김재방(金在邦), 박현모(朴顯模),
박태헌(朴泰巘), 장태섭(張台燮), 최형문(崔亨汶), 이인곤(李寅坤),
이만우(李万宇) 외 50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