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유생이 연명하여 감영에 올린 문서[道內儒生聯名呈營狀]
안동 유학(安東幼學) 이만준(李萬俊), 의성 유학(義城幼學) 박제기(朴齊驥), 군위 유학(軍威幼學) 이경재(李慶在), 신녕 유학(新寧幼學) 권치용(權致用), 칠곡 유학(柒谷幼學) 이재후(李在厚), 인동 유학(仁同幼學) 장한상(張漢相), 대구 유학(大邱幼學) 양재휘(楊在輝), 선산 유학(善山幼學) 노선구(盧善九), 경산 유학(慶山幼學) 서재기(徐在基), 하양 유학(河陽幼學) 김상동(金尙東), 흥해 유학(興海幼學) 정승재(鄭升載), 의흥 유학(義興幼學) 이종근(李鍾根) 등은 목욕재계하고 관찰사 합하께 재배하고 상서합니다.
엎드려 말씀드립니다. 충효에는 포창ㆍ장려하는 도리가 있고, 군공(軍功)에는 작위와 상을 내리는 규정이 있습니다. 대개 이것은 고금을 통틀어 숭상한 바이고, 우리 국가를 오백 년간 지탱해 온 교화의 방도입니다. 의흥의 사인(士人)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으로, 집안 대대로 충신과 열녀들이 이어졌고, 자신은 효제(孝悌)를 닦아서 향당에서 추앙받았습니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입지의 강고함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작년 갑오년 때 어리석은 저 동도들이 감히 임금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셨고, 백성들은 화란에 빠진 사람이 많아서 호남에서부터 영남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기세는 마치 거대한 고래가 그물에 걸린 듯 창졸간에 다스리기 어려웠고, 인심은 마치 머리를 내밀고 적의 동향을 살피는 쥐처럼 머뭇거리며 앞으로 진격하지 않았으니, 모든 영남이 함락되는 것도 머지않았었습니다.
아, 저 신석찬은 의흥, 군위, 칠곡 세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탄식하고서 도적을 초멸(剿滅)하자고 창의하며 말하기를 “아, 저 동도들이 그릇된 법을 전파하고 부르짖으며 하나같이 약탈을 일삼으니 과연 용서하지 못할 도적이다.”라고 하고서 이어 세 지역에 통문을 발송하여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8월 21일에는 도적들을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에서 포위하여 27명을 잡아 죽였고, 22일에는 동쪽으로 신녕의 도적들을 격파하여 그 무리들을 잡았으며, 23일에는 서쪽으로 효령의 소굴을 격파하여 그 괴수를 사로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이 이후부터 인심이 바르게 되돌아와 오직 사학을 배척할 줄 알게 되었으며,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완악함을 부리지 못하게 되니, 갑령의 남북과 낙동강의 동서가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소모영과 토포사가 신석찬이 의로써 앞장서서 창도하였음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함께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사(直使)가 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자, 신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들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은 멀리 싸우러 가는 것이라서 형세가 어려운데, 다만 유생들의 병력뿐입니다.”라고 하고서 이어 관군 2백 명을 청하였습니다. 6일분의 식량을 갖고 30리 경계 밖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소모영이 적들을 패배시켰다는 관문을 받아 보고 이내 회군하여 되돌아오게 되었으니 제군(諸軍)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진영을 혁파하니 우리 장수의 복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쟁이란 죽는 곳인데, 백면서생으로 1여(旅, 500명의 군사)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니, 충의(忠義)가 마음속에 쌓이지 않고서 능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는 몸을 거두어 공이 없는 것처럼 하고서 임하(林下)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 지조를 지킨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군공에 대한 작위와 상이 비록 신석찬이 지키는 바에 대해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은 없으나, 세상에 없는 이러한 공적이 있는데도 오히려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는 것은, 모르긴 해도 현자를 권장하고 선비를 격려함에 흠이 되고 미진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엎드려 말씀드리옵니다. 맑고 깨끗하게 다스리는 분께서 좋은 일을 선양하고 숨어 있는 일을 들추어내는 것이 교화하고 다스리는 하나의 일입니다. 이 때문에 사실대로 연명하여 호소하오니, 통촉하신 뒤에 특별히 신석찬의 충의를 임금께 아뢰어 한편으로는 충의를 기려 권면하는 뜻을 펴시고, 한편으로는 군공에 대한 작위와 상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관찰사 합하께 아뢰오니 처분해 주소서.
1895년(개국 504) 11월 일
후(後)
안동 김제룡(金濟龍), 박상우(朴尙祐)
칠곡 이두석(李斗錫), 박제영(朴濟永)
인동 장인환(張仁煥), 황하수(黃河秀)
의성 이태룡(李泰龍), 신상익(申相翼), 유응도(柳應道),
신면류(新冕瑠), 이영환(李永煥), 이화연(李華淵),
박호양(朴鎬陽), 장의표(張義表), 조병곤(曺秉坤),
신원식(申元植), 조봉간(趙鳳幹)
신녕 권경현(權景鉉), 김재호(金在鎬), 이영춘(李永春),
권명락(權明洛)
경주 손승원(孫承遠)
대구 이복래(李福來)
군위 홍헌섭(洪憲燮), 이순영(李
이인명(李寅明)
경산 서운간(徐雲幹), 박헌하(朴憲夏), 김홍빈(金鴻彬),
장진수(蔣鎭洙), 이인환(李麟煥), 김두현(金斗鉉)
선산 최봉식(崔鳳植), 이병두(李炳斗), 홍재원(洪在遠),
허찬(許瓚), 채준기(蔡駿基)
영천 정치봉(鄭致鳳), 김도상(金道祥), 양재순(楊在淳),
유영춘(柳榮春)
청도 이영기(李榮基), 최정욱(崔廷旭)
의흥 박현학(朴顯鶴), 박민준(朴珉準), 구연응(具然應),
홍건우(洪鍵佑), 김상진(金相振), 김석룡(金錫龍),
박원묵(朴元默), 이호(李琥), 홍석규(洪錫奎),
이인곤(李寅坤), 도현룡(都見龍), 홍우섭(洪禹燮)
데김에,
“의리를 지켜 도적을 소탕하고 충성을 다해 공을 세웠으니, 많은 선비들이 포상을 청한 것은 실로 마땅하다. 지난번 군부에서 군공을 조사할 때에 각자 공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영(令)을 듣지 못했는가. 전후(前後)의 공적(功績)을 기록하여 군부(軍部)에 올려보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의흥 유생 이호(李琥), 홍석규(洪錫奎), 이종근(李鍾根) 등이 삼가 말씀드립니다.
삼가 아뢰옵니다. 신석찬이 몸을 떨쳐 난국에 나아가서 요사스러운 기운을 깨끗이 쓸어낸 것은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도내 유생들이 의로움에 격앙되어 한목소리로 우러러 감영에 호소하여 포상을 청하였더니, 제교(題敎)에 “의리를 지켜 도적을 소탕하고 충성을 다하여 공을 세웠으니, 많은 선비들이 포상을 청한 것은 실로 마땅하다. 지난번 군부에서 군공을 조사하여 각자 공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듣지 못했는가? 전후의 공적을 기록하여 군부에 올려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위의 신석찬은 겸손하게 물러나 스스로를 지켜서 본래 공을 자랑하는 마음이 없었으니, 군부에서 공을 조사하는 날 어찌 스스로 드러낼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석찬이 창의하여 적을 토벌한 것은 이미 당일 소모영과 토포사에게 알려져 힘을 합해 적을 토벌하자고 한 거사가 있기에 이르렀고 전령과 관문이 남아 있으니, 이미 도적들을 평정한 후 공을 기록한 날에 신석찬이 스스로 드러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삼가 듣건대 군공의 포상은 크고 작음이 한결같지 않습니다만, 충의에 대해서 말하면 신석찬은 백면서생으로서, 세력은 1여(旅)의 무리도 없었고, 손에는 한 자 되는 병장기도 없었지만 굶주린 호랑이의 아가리를 무릅쓰고 달려들었으니, 이는 진관(鎭管, 군사조직)을 책임지는 자가 그 직책을 수행한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공적으로 말하면 적도가 영남의 여러 군에서 창궐하였으니 의리로 나서서 그들을 막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만, 적세가 갈수록 거세지다가 신석찬이 신원에서 한번 거사한 뒤부터 갑령의 남북에서 마침내 도적들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인심이 바르게 되돌아갔고, 이리하여 적의 기세가 드디어 잠잠해졌으니, 지난날 자료를 보내서 감영에 포상을 청한 것과는 똑같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가 있고 이러한 공로가 있는데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여 말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게 되면 그 권장하는 도리로 볼 때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관련 문서를 덧붙여서 어질고 밝으신 분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글을 작성하여 대구부에 보고하고, 대구부에서 다시 임금께 아뢰어 충성스런 공적을 천양(闡揚)하시면 스스로를 지키는 자가 몸을 거두어 은퇴한 뜻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풍화와도 관계되어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간절한 사정을 아뢰오니, 겸임 성주 합하께서 처분해 주십시오.
1895년(을미) 11월 일
데김에,
“홀로 큰 나무 밑에 물러나 있었던 것은 옛사람도 아름답게 여기던 바이다. 지금 공을 자랑하거나 선전하지 않으니 또한 의리의 일단을 볼 수 있다. 관부와 부서에 차례로 보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