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관이 질품한 초안[兼官質稟草] 이달 초3일 의흥군 유생 이호(李琥), 홍석규(洪錫奎), 이종근(李鍾根) 등이 제출한 고을 문서를 접수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 가을 어리석은 저 동도들이 감히 임금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였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들이 화란에 빠져 호남에서부터 영남에 이르기까지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본 고을의 사인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으로, 집안 대대로 충신과 열녀가 이어졌고, 자신도 효제를 닦았습니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도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적의 기세가 크게 성함에 의흥, 군위, 칠곡 세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맹세하고 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부르짖어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그해 8월 21일에는 도적들을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 땅에서 포위하여 27놈을 잡아 죽였고, 22일에는 동쪽으로 화산의 무리를 격파하였으며, 23일에는 서쪽으로 효령의 소굴을 격파하였습니다. 이에 도둑 떼들이 도망가 숨으니, 갑령의 위아래와 낙동강의 동서가 이 때문에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소모영과 토포사가 신석찬이 적을 막아낸 계책이 있음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함께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12월 18일 직사(直使)가 신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자, 신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을 포획한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 멀리 길을 떠나 싸우러 가는 것은, 유생들의 병력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여, 관군 2백 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함께 징발하여 의흥 지역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진영을 혁파하라는 소모영의 명령을 받고 군대를 되돌려 각각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사스러운 기운을 쓸어내자 신석찬은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공적을 자랑하지 않아서, 아직도 포상하여 장려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대저 이 사람은 백면서생으로서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소처럼 힘차고 우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을 토벌하였고 마지막에는 국난에 나아갔으니, 이는 군수도 실로 목격한 것이고 귀로 들은 것이어서 다시 위로 알리는 일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데김[題辭]을 내려 주었습니다. 지금 또 도내의 유생들이 신석찬의 뛰어난 공적을 모두 알고서 잇달아 포상, 장려해 주기를 일제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신석찬은 공을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 과시하지 않았으나, 과연 은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는 법이기에 이처럼 추앙하는 바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포상하여 장려하지 않으면 적을 무찌르는 의리를 권장하기 어렵고, 많은 선비들의 희망도 부응하여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사실에 의거하여 질품(質稟)하고 조사하여 다시 보고하니, 군부에서 포상하고 장려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