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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창계실기 蒼溪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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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에 올린 유생 장계[呈軍部儒狀]

경상북도(慶尙北道) 대구 유생(大邱儒生) 이정기(李正基) 등은 삼가 아룁니다.
 충효를 칭송하고 격려하는 것은 조정의 성대한 전례이며, 숨겨진 일을 들추어 널리 밝히는 것은 사림의 공의(公議)입니다. 소생 등이 거주하는 도내의 의흥 사인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으로, 대대로 충신과 열녀가 이어졌고, 몸소 효제를 닦아서 향당에서 추앙되고 있는데,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입지의 강고함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갑오년 때 어리석은 저 동도(東徒)들이 감히 성상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였고, 백성들은 화란에 빠진 사람이 많아서, 호남에서부터 영남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의 기세는 마치 거대한 고래가 그물에 걸려 창졸간에 다스리기 어려웠고, 인심은 마치 머리를 내밀고 적의 동향을 살피는 쥐처럼 머뭇거리며 앞으로 진격하지 않았으니, 모든 영남이 함락되는 것도 머지않았었습니다. 아, 저 신석찬은 이에 의흥, 군위, 칠곡 세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슬피 탄식하고서 도적을 초멸(剿滅)하자고 창의하며 말하기를 “아, 저 동학의 무리들이 그릇된 법을 전파하고 부르짖으며 하나같이 약탈을 일삼으니 과연 용서하지 못할 도적이다.”라고 하고서 이어 세 지역에 통문을 발송하여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그해 8월 21일 도적들을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에서 포위하여 27명을 잡아 죽였고, 22일에는 동쪽으로 신녕의 도적들을 격파하여 그 얼굴을 얽어 가지고 왔으며, 23일에는 서쪽으로 효령의 소굴을 격파하여 그 괴수를 사로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이 이후부터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고 인심이 올바르게 되돌아가 다시는 완악함을 부리지 못하게 되니, 갑령의 상하와 낙동강의 동서가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소모영과 토포사가 신석찬이 앞장서서 창의하였음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함께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사(直使)가 신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자, 신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들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 멀리 가는 것은 형세가 어려운데, 다만 유생들의 병력뿐입니다.”라고 하고서 이어 관군 2백 명을 청하고서 6일분의 식량을 갖고 행진하여 30리 경계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소모영이 적을 패퇴시켰다는 관문을 받고 이내 회군하여 되돌아왔는데, 제군(諸軍)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진영을 혁파하니 우리 장수의 복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쟁이란 사지(死地)인데, 백면서생으로 1여(旅, 500명의 군사)의 무리를 거느리고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 마음이 있었으니, 충의(忠義)가 마음속에 쌓이지 않고서 능히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는 몸을 거두어 공이 없는 것처럼 하여 임하(林下)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 지조를 지킨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군공에 대한 작위와 상이 비록 신석찬이 지키는 바에 대해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은 없으나, 세상에 없는 이러한 공적이 있는데도 아직도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저희들은 같은 도에 거주하면서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을미년(1895) 11월에 신석찬의 충의를 임금께 아뢰는 일로 사실대로 본도의 관찰사에게 연명하여 호소하니, 데김에 “의리를 내세워 비적을 소탕하고 충성을 다해 공을 세웠으니, 많은 선비들이 포상을 청한 것은 실로 마땅하다. 지난번 군부에서 군공을 조사할 때에 각자 공을 기록하여 보내라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영(令)을 듣지 못했는가? 전후의 공적을 기록하여 군부에 올려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관계 문서를 덧붙여서 호소하오니, 속히 임금께 아뢰어서 군공에 대해 작위와 상을 베풀어 주십시오. 삼가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군부대신 합하께
 건양 2년(1897) 2월 일

데김에,
 “유림들이 포장을 청한 것이 비록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고을에서 아뢰고 부에서 보고해야 하는데 아직도 이처럼 적막하니 지금 갑자기 천양을 논의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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