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군부에 올린 때의 유장[再呈軍部時儒狀]
경상북도 유생 이정기 등이 삼가 아룁니다. 의흥(義興) 사인 신석찬의 충의(忠義)로운 실적은 이미 지난번 문서에서 다 통촉하셨을 것이니, 다시 감히 장황하게 아뢰어 번거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데김에 “유장(儒狀, 유생들의 진정서)에서 포상과 장려를 청한 것이 비록 공의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나, 고을에서 아뢰고 부에서 보고해야 하는데 아직도 이처럼 적막하니 지금 갑자기 천양을 논의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흥군수가 질품서(質稟書)로 대구부(大邱府)에 아뢰고 부의 관찰사(觀察使)가 제교(題敎)로서 군부(軍部)에 올렸으니, 부(府)에 아뢰고 군부에 아뢴 것이 이와 같고, 명확한 순서를 두어 읍에 고하고 부에 아뢰었는데, 어찌 적막하다고 하십니까? 본 군수의 질품서의 초안과 관찰사가 군부에 올려보낸 제교를 이에 감히 점련(粘聯)하여 우러러 공정하신 대신께 드리오니, 다시 살펴 주시고 속히 임금께 계달하시어 특별히 신석찬의 뛰어나고 장한 공적을 포장해 주셔서 후손된 사람들이 다투어 사모하고 충의를 다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천만 바라옵니다.
군부대신 합하
건양 2년(1897) 3월 일
데김에,
“재차 이처럼 호소하니 대개 그 사람이 장부에 누락된 것이 실로 흠이 되는 일임이 증험된다. 공론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날이 있을 것이니, 물러나서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