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내부에 올림[呈宮內府]
경상북도 대구군 유생 이정기 등이 삼가 청원합니다. 의흥군 사인 신석찬의 충의의 공로의 사실은 이미 이전 문서에서 다 말씀드렸기 때문에 장황하게 다시 아뢰지 않고, 군부의 지령(指令) 및 장례원(掌禮院)의 데김을 갖춥니다. 저희들은 물러나서 한 달 넘게 포상하는 성대한 뜻을 기다렸으나 다시 어떠한 처분도 없으니, 사론의 억울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전후 문서의 글을 첩련(帖聯)하여 다시 아뢰오니, 이 사람의 노고와 공적을 세세히 살피시고 속히 임금께 계달하여 충성을 다한 공적을 표창하여 의를 떨칠 수 있도록 장려해 주시기를 천만 엎드려 바랍니다.
1907년(광무11) 6월 일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합하
후(後)
안동 김제룡(金濟龍)
현풍 곽대곤(郭大坤)
의흥 김종기(金鍾箕), 이영춘(李永春)
청송 김도준(金道俊)
영천 정치봉(鄭致鳳)
경산 서운간(徐雲幹), 유영춘(柳榮春)
선산 최봉식(崔鳳植)
청도 이영기(李榮基)
신녕 최명락(崔明洛), 박민준(朴珉準)
경주 손승원(孫承遠)
의성 이태룡(李泰龍)
군위 이석영(李錫永), 신상익(申相益), 김두현(金斗鉉)
데김에,
“서생이 의기를 떨쳐 비류를 잡아들여서 경상 좌도 지역이 이처럼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의 노고와 공적이 더욱 가상하다. 포상해 드러내는 은전이 비록 군부에 달려 있다 하더라도 일개 도의 사론이 이와 같이 우울해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즉시 계문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선 기다리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27일
유학(幼學) 이호(李琥), 이이곤(李理坤), 홍석규(洪錫奎) 등은 성주 합하께 상서(上書)합니다.[幼學李琥李理坤洪錫奎等上書于城主閤下]
삼가 아룁니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내리고 훌륭한 일을 하였으면 반드시 포상하는 것은 사기를 격려하고 풍습의 교화를 권장하는 바입니다. 옛적에 다스리는 법도에 능한 자는 이 방법을 쓰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음이 없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요행히 녹을 바라는 일이 없었고, 재야에서는 현인이 등용되지 않는 탄식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 평소에 강구하신 바이고, 저희들도 이것을 합하께 바라옵나니, 열 집[十室] 되는 작은 고을의 충신의 선비가 성대한 포상의 은전을 받을 수 있도록 살펴 주시고 전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군 현내면 사람 신석찬은 본관이 평산입니다. 대대로 충렬가의 명성을 세습해 온 것이 역사서에 실려 있고, 수신과 효제, 행의(行誼)로 고을에서 칭송을 받았습니다. 책상 위에는 다만 『명심보감』 한 편(篇)을 두고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도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입지의 강고함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지난 갑오년(1894)에 시운(時運)이 이롭지 않아서 저 어리석은 동비들이 감히 임금의 교화를 거역하여 위로는 임금께서 밤낮없이 근심하였고, 백성들은 화란에 빠진 사람이 많았습니다. 호남에서 영남까지 제압하지 못하여 우리 강역에까지 침범하여 크게 창궐하였던바, 이해 8월 18일 신석찬은 이웃 마을의 여러 선비들과 함께 적을 섬멸하는 의리를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아, 저 동도들은 감히 왕사(王師)에 대항하니 교화할 수 없는 역적이며, 그릇된 법을 전하고 주장하니 사문의 난적이며, 하나같이 약탈을 일삼으니 화적(火賊)의 괴수이다. 이 중에 하나라도 범한 게 있으면 만번 죽이더라도 가벼운데, 하물며 세 가지 죄를 범하였는데도 천지간에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이치인가.”라고 하고서 이에 세 지역에 통문을 보내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8월 21일에는 고을 남쪽 30리 떨어진 신원에서 도적들을 포위하여 27명을 사로잡아 죽였고, 22일에는 동쪽으로 신녕의 도적을 쳐 그 무리를 사로잡았고, 23일에는 서쪽으로 군위의 소굴을 격파하여 그 괴수를 사로잡아 모두 죽였습니다. 이에 원근에서 한목소리로 사학을 배척하였고, 인심이 바르게 되돌아와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었으니, 갑령의 남북과 낙동강의 동서가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소모영과 토포사가 신석찬이 도적을 토벌한 의리와 적을 막아낸 계책을 알고서, 바야흐로 호남을 근심으로 삼아 함께 힘을 합쳐 토벌하고자 하였습니다. 직사(直使)가 신석찬에게 원군(援軍)을 청하니, 신석찬이 말하기를 “국사로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내가 지난날 도적들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 여러 사람들의 힘에 의지해서였습니다. 지금 멀리 싸우러 가는 것은 유생들의 병력으로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여, 관군 2백 명을 얻게 되자 즉시 징발하니 항오(行伍)가 엄정하여 과감하게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30리쯤에 있는 경계상에 도착하여 소모영의 진영을 혁파하라는 관문을 받고 회군하여 귀가하니, 제군(諸軍)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싸우지 않고 진영을 혁파하니 우리 장수의 복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쟁이란 사지(死地)인데, 백면서생으로 두려움 없이 싸우러 나아갔고, 이겼다는 말을 듣고 돌아올 때도 자신의 요행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평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너그럽고 넉넉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임금을 위하여서는 충에 죽고, 아비를 위해서는 효에 죽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 위대한 공적과 탁월한 의는 실로 세상에 현달하여야 하는데, 이미 도적을 평정하고서는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고, 임하(林下)에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 지조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대저 감추어진 것을 현양하는 것이 신석찬이 지키는 바에 이익이 되거나 손해가 될 것은 없으나, 세상에 없는 이러한 공적이 있는데도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한 일은 어찌 공론(公論)이 개탄하고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주군(州郡)에서 수재를 천거하여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또한 옛적의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궁중과 멀리 떨어진 고장에 사는 백성들은 위로 아뢸 길이 없어서, 누차 도(道)와 군에서 함께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지금은 도적들이 또다시 창궐하여 주군(州郡)을 노략질하여 민심의 소요가 지난날 동비(東匪) 때보다 심합니다. 신석찬이 다시 유병(儒兵)을 모집하여 장차 토벌하려고 하니, 전후(前後)로 의병을 일으킨 것이 세월이 가도 더욱 한결같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기에 감히 일제히 한목소리로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사실에 의거하여 군부에 보고하여 임금께 아뢰어서 포상의 은전을 받아서 풍화를 장려해 주시기를 천만 간절히 기원합니다.
성주께서 처분하소서.
갑진 11일 일
후(後)
이인곤(李寅坤) 홍기표(洪祺杓) 이정표(李庭杓), 이종근(李鍾根) 외 20여 명
데김에,
“갑오년 동학란은 천하 만고에 없는 대 변란이다. 열군(列郡)이 줄지어 함락되고 만백성이 혼란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러한 사람이 없었다면 경상 좌도 지역이 거의 적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포의(布衣)로서 큰 공을 세웠기에 마땅히 조정의 특별한 포창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홀로 큰 나무 밑에 물러나 자랑하거나 떠벌이지 않았기에 지금까지도 쓸쓸히 알려지지 않았으니, 고을의 사론이 억울해하여 이러한 연명 상소가 있는 것도 당연하도다. 지금 또 여러 백성들을 단속하여 적을 잡는 것에 뜻을 두고 있으니, 심히 가상하다. 마땅히 부(府)에 보고하여 포상을 청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