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行狀)
공의 휘(諱)는 석찬(錫燦), 자는 경칠(敬七), 성은 신씨(申氏), 창계(蒼溪)는 그 자호이다. 대대로 평산(平山)의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다. 시조의 휘는 숭겸(崇謙)이니 고려 초에 공을 세웠는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 뒤 14세를 내려와 휘 호(浩)에 이르렀는데, 공양왕(恭讓王) 때 벼슬이 지신사(知申事)였고,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사간으로부터 6세를 내려와 참의공(參議公) 휘 빈(蘋)에 이르렀는데,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와 자손들이 그대로 거주하였으니, 바로 영남의 부림현(缶林縣)이었다. 고조의 휘는 양화(養和), 증조의 휘는 억(澺), 조의 휘는 상기(相驥), 부친의 휘는 재수(在秀)인데,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림 홍씨(缶林洪氏)이고, 사인(士人) 병기(秉基)의 딸이니, 숙덕(淑德, 부녀자의 미덕)이 있었다. 철종(哲宗) 신해년(1851) 3월 6일 공을 현창리(縣倉里)의 본집에서 낳았다.
태어나니 골상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미목이 수려하여 그림과 같았다. 겨우 말을 배울 때에도 말이 망령되지 않아서, 말하는 것이 자못 노성(老成, 숙성하여 의젓함)의 기국(器局, 도량과 재능)이 있었으니, 이웃 마을에서는 모두 신씨가 다시 명성을 다툴 것이라고 말하였다.
조금 자라자 어버이를 효도로서 섬길 줄 알았고, 독서할 때에는 애써 그 뜻을 이해하려 하였고, 뜻을 모르는 채 읽기만 잘하는 데 힘쓰지 않았다. 또 국량이 관대하여 마을 장로들이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고, 동년배들도 모두 그를 기량이 앞선 사람으로 받들었다.
관례를 치른 뒤로는 고을의 착한 사람과 사귀면서 말에 신의가 있었고, 제가(齊家)에 법도가 있어서 집안이 엄숙하였다. 성현의 교훈을 벽 위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살펴보면서 자신을 일깨우는 바탕으로 삼았다. 항상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매번 옛날 충신과 의사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갑오년에 동도(東徒)의 난을 만나 긴 뱀과 큰 돼지[封豕長蛇]와 같은 탐욕스런 도적들이 천리를 가로막아서 도로가 통하지 않았고, 굶주려 채소를 먹는 꿩이나 개[茹菜雉犬]처럼 하찮은 자들이 마음대로 약탈하여 마을이 소란하였다. 지리산 남북, 조령과 죽령의 상하에 진영들이 연이어 진을 치고, 성을 함락하여 장수를 죽이며, 움직일 때는 백만 명이라고 일컬으니, 윗사람을 범하는 뜻이 있음이 확실하였다. 이는 어찌 황지(潢池)에서 병장기를 들었던 적자(赤子)의 난리에 비하겠는가.
이때에 공은 초야의 백면서생으로서 충의를 지켜 유병(儒兵)을 모집하였다. 신원(莘院)에서 교전하여 많은 적을 베어 죽이고, 승승장구하여 잇달아 신녕과 효령의 주둔지를 격파하였다. 원근의 여러 도적들이 간담이 찢기고 도망쳐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통쾌하지 아니하였겠는가? 또한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도적 7, 8만 명이 청양, 보은, 황간, 영동 등 여러 군에 둔취하여 매우 기세를 떨쳤을 때 토포사가 위급함을 고하고 지원을 요구하자, 공은 즉시 강개한 마음으로 승낙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드디어 가묘(家廟)에 가서 절하고 하직하고는 그 동생 신석옥(申錫玉)을 불러 부탁하기를 “내가 국란(國亂)에 나아가니 살아서 돌아올지 모르겠다. 너는 나의 뜻을 받아들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되 반드시 성실하고 예를 다하며, 농사일에 힘쓰고 서적을 모아서 가업을 폐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어 말을 타고 서쪽으로 가는데 다시는 돌아보고 연연하는 뜻이 없었다. 공은 이때에 단지 나라가 있는 것만 알고 자기 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싸우다가 시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이미 십분 갖추어진 것이다.
한문공(韓文公, 한유)이 「장중승전후(張中丞傳後)」에서 서술하기를 “천백 명의 다 죽어가는 군졸로 백만 명의 날로 불어나는 도적과 싸워서 장강과 회수를 차단하여 세력을 막아내었다. 천하가 망하지 않는 것이 그 누구의 공이었던가.” 하였다. 가령 한유가 다시 오늘날 살아온다고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이 말로 공을 허여할 것이다.
오호라. 공의 그 충(忠)과 공(功)은 마땅히 아름다운 상[懋賞]을 받아야 할 것이나, 아직 일명(一命)의 포상도 내려지지 않았다. 고을에서 올린 말과 도에서 올린 장계에서 여론을 볼 수 있고, 누차 각 관사(官司)에 올렸으나 아직 임금께 청하는 일을 듣지 못하고 매번 물러나라는 부탁의 데김만 내렸으니, 공에게는 손상될 것이 없으나 세도의 높고 낮음을 알 수 있도다.
공은 실로 조금도 공을 바라거나 상을 구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로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가까이하여 깨우쳐 도움 받는 것으로서 일생 동안 힘쓸 곳을 삼았다. 만년에 부계(缶溪)의 위에 정자를 짓고서 편액하기를 “봉마(蓬麻)”라고 하고, 날마다 고을의 옛 친구들과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시와 술을 즐기면서 남은 생을 마쳤다. 그러나 지난날 도적을 평정한 일은 우연히 말하는 사이라도 입에서 꺼내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 기상이 씩씩한가. 신유 12월 20일 집에서 천수를 마치니, 나이 71세였다. 다음 해 정월 예법대로 금수동(金水洞)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 지내니, 관을 쓴 선비들이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다.
부인 장씨(張氏)는 인동(仁同)의 사인(士人) 재한(載漢)의 딸이다. 현숙하고 부덕이 있었으나, 단지 네 딸만을 낳고 생을 마쳤다. 후사가 없어서 조카 신태련(申泰鍊)으로 양자를 삼았다. 사위는 성주(星州) 이교준(李敎準), 흥양(興陽) 이용하(李龍河), 남양(南陽) 홍재일(洪在日), 김해(金海) 김한상(金漢祥)이다. 양자인 신태련 또한 창계공보다 6년 앞서 일찍 죽고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공의 후예는 가히 쓸쓸하다 할 만하다. 선한 자에게 복을 주는 하늘을 어느 곳에서 징험할 것인가.
공의 둘째 사위 이용하는 나와 같은 일족인데, 공의 실기(實記) 1통(通)을 가지고 황량한 산의 적막한 물가에 사는 나를 방문하였다. 절하고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빙부(聘父)이신 창계(蒼溪) 옹은 큰 공적과 깨끗한 행실이 있었는데도 세상에 쓰이지 못했습니다. 오직 당일의 창의록(倡義錄)과 비류(匪類)를 잡기 위한 완의(完議)와 절목(節目)은 모두 공이 스스로 쓰고 스스로 정한 것이며, 그 나머지 고을과 도의 문서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포상을 청한 것입니다. 봉마정기(蓬麻亭記)와 실적후서(實積後叙)는 모두 공을 위하여 찬미한 글입니다. 지금 합편하여 1권을 만들고 이름을 ‘창계실기(蒼溪實記)’라고 하였습니다. 원컨대 한가로이 쉬는 중에 한마디 말을 꾸며 주셔서 합편한 책의 앞머리에 붙이고, 다시 실행(實行)을 서술하여 책의 끝 부분에 붙이면, 이 창계 옹의 일생이 갖추어지고, 이 기록의 수말(首末)이 갖추어질 것입니다.”라고 하며 청하기를 마지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름도 하찮고 글도 졸렬하니 어찌 감히 후세에 전하는 훌륭한 자취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마음에 느낀 바가 있으니, 나라를 위한 공의 창의(倡義)가 세상을 감동시킬 만하고, 또 이용하가 장인을 위해 널리 드러내려는 정성이 이와 같이 지극하니, 집안에서의 행실은 묻지 않고도 알 만하다. 또 어찌 감히 굳이 거절하고 고사하여 그 바람을 저버리겠는가.”라고 하고서 외람되이 서문을 짓고, 다시 위와 같이 행랑을 짓는다.
흥양후인 이상교(李相敎)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