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기실후(倡義記實後)
한(漢)나라의 위상(魏相)이 말하기를 “난리를 구하고, 포악한 자를 죽이는 것을 의병(義兵)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의(義)로운 병사(兵士)는 고금에 다름이 없다. 의사(義士) 신석찬(申錫燦)은 옛 부계현(缶溪縣)의 세족(世族)으로, 씨는 평산(平山)에서 유래하였다. 대대로 충성과 정절을 이어 왔다.
저 갑오년에 동도(東徒)가 크게 치성하여 학(學)이라 일컫고, 도(道)로써 가탁하였으니, 그들의 이른바 학이나 도가 어찌 사문(斯文, 유학)의 적이 아니겠는가. 완악한 행동을 마음대로 저지르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약탈하며 인명을 해치는 것을 날마다 일삼아도 부족한 것이 이들이었다.
신석찬이 이에 분연히 대의를 떨치고 일어나 그들을 토벌하였으니, 그해 8월 21일이었다. 이때에 만약 조금 더 늦어져서 10일 정도 늦었더라면 영남의 여러 군이 모두 저들 무리의 소굴이 되고 사람들이 모두 서릿발 같은 칼날과 우레 같은 총소리에 물들지 않을 자가 필시 거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전라도와 충청도의 절반이 또한 이 환란이 극심했으나 신원에서 한번 북을 친 뒤 의로 창도하여 공격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따르게 되어 도둑 떼가 자취를 감추고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장하도다, 신석찬이여. 오십 년간 독서하던 선비가 몸을 떨쳐 사지(死地)로 달려갔으니, 평소에 정밀하게 익힌 공부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당일 한목소리로 상응한 여러 군자들도 각각 본래 삼강을 부지하고 의에 따르는 충정(衷情)이 있어, 열군(列郡)의 생령들이 이에 힘입어 보전되었으니, 고금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나는 신석찬과 벗이다. 예전에 청부(靑鳧, 청송의 옛 지명)에 있을 때 이 말을 듣고 장하게 여겼다. 근간에 다행히 이웃 고을에 살게 되어, 지난날의 회약(會約)한 사실의 기록과 도(道)와 군(郡)에 올린 문서를 청하여 살펴보았더니 더욱 사실이 분명하였다. 또한 그 늠름하기가 세한(歲寒)의 고송(孤松)과도 같으니 무릎을 치고 개탄하면서 몇 마디 말을 더하였다. 더욱 아름답고 가상한 것은 지금 임하(林下)에 물러나 신원의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의로운 행적을 밝게 드러내는 것은 훗날의 자운(子雲)이 다시 전말을 밝힘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1910년(경술) 8월 하순 철성(鐵城) 이옥(李玉) 삼가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