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록 후서(倡義錄後序)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서 듣건대, “춘추의 법에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으니 반드시 사사(士師, 법관)일 필요가 없다.”라고 하셨다. 한번 태산이 무너지고 기나라 하늘이 기울어진 뒤로 탄식하며 인경(麟經, 『춘추(春秋)』)을 보듬고 산에 들어와 두문불출하고 세상과 더불어 잊은 지가 오래되었다. 하루는 의흥에 사는 손치붕(孫致鵬) 군이 소매에서 같은 고을의 신의사(申義士) 창계 옹의 『창의록』 1권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고 그 서문을 청하며,
“옹은 평산의 대족입니다. 충절 있는 집안의 후예이며 효(孝)와 우의(友誼)로서 그 집안을 다스려 향당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옹이 일찍이 말하기를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오년에 이르러 이른바 동학이 천고에 없는 난적(亂賊)인데, 한 지아비가 사설(邪說)을 부르짖으니 백 사람이 향응하여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하였으며, 장리(長吏, 수령)를 죽이니 풍조(風潮)가 날마다 불어나 어리석은 백성들도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옹은 책을 읽고 있는 일개 서생으로서 분연히 앞장서서 말하기를, ‘완악한 저 동도들이 사학(邪學)을 부르짖어 사방에 전하고 감히 임금의 군대에 거역하니, 법으로 마땅히 죽여야 할 자들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이웃 군에 격문을 전하여 무리 수천 명을 얻었습니다. 첫 번째 거사에 신원의 도적 27명을 베어 죽이고, 두 번째 거사에 화산의 무리들을 붙잡았고, 세 번째 거사에 효령의 괴수를 사로잡았습니다. 이에 도적 떼들이 자취를 감추고 인심이 귀화되어 낙동강의 동서가 이 때문에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에 만약 세 번 이긴 옹의 거사가 없었다면 백성들은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적을 평정한 뒤에는 임천(林泉)에 자취를 감춰 그 공을 자랑하지 않고서 봉마정(蓬麻亭)을 짓고 계곡과 들을 벗 삼아 그 사이에서 시가를 읊조렸으니, 충의가 마음속에 쌓이지 않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마디 말씀을 아끼지 마시고 발휘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아, 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부질없이 높은 바위 가운데에 늙어서 변경을 막는 공로를 보지 못한 것은 운명이지만 어찌 지사의 감회(憾悔)가 없을 것인가. 옹이 일찍이 그 재종 동생 석순(錫珣)을 우리 선사 문충공(文忠公, 송병선(宋秉璿)의 시호)의 문하에 드나들게 하였으니 춘추(春秋)의 의리에 대해서 익숙히 들었을 것이다. 내가 늙고 병들어 옹의 집에 가서 얼근하게 취해 존왕양이(尊王攘夷) 한 가지 일을 강론할 수 없는 것이 한이로다. 옹의 이름은 석찬(錫燦)이고, 자호는 창계(蒼溪)라고 한다.
1924년 7월 1일 오천(烏川) 정석채(鄭奭采)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