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실적후서(倡義實跡後叙)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열 집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 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셨으니, 대개 충효가 마음속에 쌓이고 신의가 밖에 드러나면 반드시 갑작스런 난리로 어지러운 날을 당했을 때에 그 우뚝한 기상을 볼 수 있다. 창계 신공 석찬은 처음에는 열 집의 작은 고을의 충성스럽고 신실한 선비로서 은거하여 독서하였는데, 그 좌우명에 “마음은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되며, 의로운 일은 사지(死地)라 해도 구차히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갑오 동비의 난에 호남이 진탕되고 영남이 대부분 빠져들자, 공이 이에 세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분연히 도적을 초멸하자고 창의하여 그 괴수를 잡고 그 무리를 흩어 버리니, 교남(嶠南, 영남)이 이에 편안해졌다. 소모사가 공의 창의를 듣고 힘을 합해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공은 관군 수백 명을 얻어서 행진하여 삼십 리에 이르렀다. 호남 또한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싸우지 않고 돌아오니, 군사들이 모두 복된 장수라고 칭하였다. 공은 백면 유생으로서 일여(一旅, 5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나아가기를 그치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참으로 충의가 평소에 축적되지 않고서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자취를 임하에 감추고 다시는 세상에 대해서 듣지 않았으니, 그 지조를 더욱 알 수 있다.
우리 족숙 회와공(悔窩公)이 호남의 관찰사로서 부월(斧鉞)을 잡으시고 거괴 전봉준 등을 죽여서 모두 호남을 평정하였으니, 당일의 군공과 실적은 공과 일체가 된다. 내가 서울에 도착한 날 이 기록을 가지고 회옹(이승우(李勝宇))에게 질정하기를 청하려고 하였더니, 공은 이미 앞서 병들어 돌아가셨다. 어느 날 다시 이 기록을 읽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감동되어 대략 전말을 서술하여 글 뒤에 붙이노라.
완산(完山) 이준의(李準儀) 삼가 서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