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이 실기는 우리 족숙 창계(蒼溪)공의 『갑오창의록(甲午倡義錄)』 일부 및 전후(前後)로 고을과 도에서 포상을 청한 장초(狀草, 문서 초본)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오래도록 건연(巾衍, 책상자) 속에 있어서 수습하지 못하였다. 근자에 공의 재종숙 석순(錫珣) 씨가 큰 족적이 민멸될 것을 걱정하여 앞서 이미 붓 잡은 군자들에게 교감을 받았고, 이제 또 판각에 들어가게 되니 심히 성대한 일이다. 감히 즐겨 듣고 공경함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대저 인재는 다른 시대에 빌리지 않는 법이다. 자고로 충신과 지사는 초야와 암혈(巖穴)에 많았으니, 나랏일이 위급할 때는 이들이 분연히 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적을 베어 공을 세웠던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혹 공을 세워도 상을 받지 못하고 충성을 다해도 포상을 받지 못하고서 늙어 죽어가서 없어져 버렸던 자도 있으니 또한 애통하도다.
공은 천품이 영특하고 재주와 국량이 탁 트여서 막힘이 없었으며, 기운은 강직하고 절개는 강개하였다. 다른 사람의 환난을 급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곤궁함을 구제하였으며, 재산을 기울여 가며 베풀기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를 널리 구제하였다.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다하고, 향당에서는 충성되고 신실한 행동을 돈독히 하였다. 시문 공부를 일삼지 않고 경서와 사서(史書)를 섭렵하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지 않았지만 주략(籌略, 병법)에 밝게 통달하였다. 의리를 확실히 강론하고 경륜을 크게 갖추고 있어서 얽히고설켜 처리하기 힘든 일을 만나도 분별해 낼 수 있었고 끓는 물과 불에 나아가도 두려워하지 않았음은 참으로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지난 갑오년에 동비가 창궐하여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부터 폭풍이 불어닥치고 번개가 치듯 영외(嶺外, 영남 밖)에까지 만연되니, 기세가 하늘을 집어삼킬 만하여 제어할 수 없었다. 공은 백면서생으로 몸을 떨쳐 분연히 의(義)로 동지를 규합하고 세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민병 수천 명을 얻어서 베어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원근을 소탕하니, 갑령(甲嶺) 이하와 낙동강의 좌우가 이 때문에 편안하였다.
이때에 소모영 및 토포사가 바야흐로 호남의 도적을 토벌하려 하였는데, 의흥(義興)의 의병장으로 지명하여 격식을 갖추어 부르니, 공은 의흥군의 포병(砲兵)을 이끌고 주야로 원정에 올랐다. 그러나 진을 파하라는 소모영의 관문(關文)을 받고 중도에 회군하였다. 이 이후부터는 비류들이 자취를 감추고 민심이 안정되었다. 일대의 사람들은 공(公)을 장성(長城)처럼 믿고 막부(幕府)와 구중궁궐에 공적을 올렸으나 공로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고을과 도의 선비들의 공의(公議)가 세차게 일어나 일제히 감영과 군부(軍部)에 호소하였으나 포상의 조치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국가의 흠이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아, 공만 홀로 대수(大樹) 밑에 물러나 공(功)을 사양하였고, 동지나 각건(角巾)들에게도 임천(林泉)에서 당시의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과연 어질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어찌 이것을 가지고 공의 능력의 만분의 일이라도 시험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좋은 때를 만나서 간성(干城, 나라를 지키는 군대나 인물)을 맡아서 품은바 포부를 펼쳤다면 강회(江淮)를 보장하고,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그려지는 정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서 크게 펼치지도 못하고, 임하(林下)에서 일개 포의(布衣)의 선비로 그치니, 공의 평소 뜻에는 비록 손상이 없더라도, 어찌 식자들이 개탄해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공에 대한 평소의 교분이 족친으로서의 정의뿐만이 아니다. 공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의당 나만 한 사람이 없으니, 또한 결코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공은 이미 구천에 가 계시니, 지난날을 추념함에 책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침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제 석순(錫珣) 씨의 청으로 비록 글로 추모하나 어찌 권말(卷末)에 한마디 말이 없겠는가. 혹시 뒷날 보는 자가 이 실록(實錄)을 통해 공의 평소의 대강이라도 알게 된다면 족히 썩지 않는 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족질 신태경(申泰慶)이 삼가 발문을 쓴다.
내가 일찍이 봉마정에서 창계공의 안부를 물었다. 한가한 가운데에 어느 날 책상 위에 갑오년 창의일기의 전말을 읽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하였다. 끓는 물과 불속에 뛰어들고 시퍼런 칼날을 밟았으니, 참으로 충의(忠義)가 그 집안에 대대로 이어 오고 평소 마음속에 쌓아 온 바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아, 저 동도의 난은 이조(李朝) 오백 년의 일대 괴변(乖變)이다. 윤리와 강상이 멸절되는 화가 실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로다. 공은 임하에서 독서하는 선비로서 졸지에 위난을 당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던 때에 위로는 국가의 위급함에 나아가고 아래로는 동포들이 빠져드는 것을 구제하였다. 이는 애당초 명예와 이익을 바라는 뜻이 아니었으니 비록 군공을 포상하는 명단 가운데에 누락되었으나 공은 유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을과 도의 여러 군자들은 누차 포상을 청하여 글을 올렸으니, 의리상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이미 10년이 더 지났는데, 공의 재종제 신석순(申錫珣) 씨가 실적(實跡)이 아주 없어질까 걱정하여 공의 사위 이용하(李龍河)와 더불어 힘과 정성을 다해 후세에 전해짐을 도모하였다. 장차 인쇄에 들어가려 할 때 또한 제현들이 찬양한 기(記)와 서(序)가 모두 갖추어져서 실로 충의가 해와 별처럼 빛나니, 사람들이 이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충과 의는 실로 인과 효에서 나오니, 다른 날 신혜균(申惠均)이 능히 돌아가신 조부의 뜻을 이어 부끄럼이 없으면 다행이겠노라.
함양(咸陽) 박창순(朴昌淳)이 손을 씻고 삼가 권말에 글을 씀.
(번역:김봉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