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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사료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미나미 고시로 문서 南小四郞文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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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 고시로 동학당정토경력서(1894.9~1895.3)

경력서

동학당정토경력서

개성 병참사령관 육군 보병 소좌 종6위 훈4등 미나미 고시로
야마구치현 요시키군 스젠지무라 제486번지 거주

    1. 1894년 9월 5일에 소집영장을 받고 동 6일 출발하였다. 동 7일에 제5사단 사령부에 출두하여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대대장에 임명되어 같은 날 히로시마를 출발하였다. 동 9일에 야마구치현 도요우라군 히코시마 주둔 수비대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본대에 부임하여, 대대장 오하라 사토마사(大原里賢)의 뒤를 이어 육군 포병 대좌 쿠로세 요시카도의 지휘를 받으며 수비 임무를 맡았다. 동 16일에 시모노세키수비대 사령관 구로세 대좌의 명에 의해 히코시마에서 보조 공사를 하였다.
    1. 동년 10월 28일에 도한(渡韓) 명령을 받아 동 훈령의 인수인계를 위하여 히코시마 수비 교대 준비를 하였다. 출두하라는 명을 받고 동일 출발하여, 동 29일에 제5사단 사령부에 출두하였다. 동일에 히로시마를 출발하여, 동 30일에 시모노세키시에 머물러 있는 대대로 돌아왔다.
    1. 동년 11월 4일에 시모노세키를 출범하였다. 동 7일에 조선국 인천에 상륙하여 곧바로 인천병참감부에 출두하여 육군 소장 후쿠하라 도요노리의 지휘하에 소속되어, 육군 포병 중좌 이토 스케요시로부터 동학당 정토대 지휘관의 명령을 받고, 이에 관한 명령 및 훈령을 받았다.(한병 대대 3개, 교도중대 1개 및 충청, 전라 양도의 토착병 전체, 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소속 중ㆍ소위 2명, 하사졸 약간 명과 약간의 순사가 부속되었다.) 동 10일에 인천을 출발하여 용산(龍山)에 도착하였다. 동 11일에 경성 주차 이노우에 공사로부터 동학당 토멸에 관한 특별훈령을 받았고, 조선 정부로부터 부속된 관리와 탄약, 군량, 한인부(韓人夫), 행리 운반 등의 협의를 마치고,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각 중대장, 철도 선로 측량 호위의 지대장(支隊長) 기사 센고쿠 미쓰기 등에게 명령 및 훈령을 포고하였다. 동 12일에 용산을 출발하여 중도에 청주(淸州)의 도로를 전진하고 신원(新院), 용인(龍仁)을 경유하여 동 14일에 양지현(陽智縣)에 도착하여 사영(舍營)하였다. 선발한 교도중대와 후비보병 독립 제18대대 약간 명 및 순사 약간 명을 본대에 합쳤다. 동 15일에 명령 및 특별훈령을 포고하여 교도중대장에게 인민을 어루만질 것과 약탈을 엄금할 것을 시유(示諭)하였다. 동 16일에 양지현을 출발하여 죽산현(竹山縣)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동 17일에 지대(중위 미즈하라 구마죠)에 교도중대 1소대를 부속시켜 보은(報恩)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인민이 피난하여 인부 결핍이 발생하였다. 동 19일에 죽산현을 출발하여 진천현(鎭川縣)을 경유하여 동 21일에 청주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토착 진남병(鎭南兵)을 본대에 합하였다. 동 22일에 정찰 척후(1등군조 가키하라 슈)를 보은현 방면으로, 1등 군조 기시다 기이치로를 연기(燕岐)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동 23일 오전 12시에 청주를 출발하여 문의현(文義縣)을 경유, 지명루(至明樓)에 이르러 적도와 조우하여 수 시간에 걸쳐 전투하여 증약(增若), 옥천(沃川) 방면으로 격퇴하고 곧바로 지대를 출발시켜 적도를 추격하게 하였다. 동일에 문의현에서 사영하였다. 가키하라 정찰 척후가 도착하였다. 인천 이토 사령관 및 경성 공사관에게 전황을 보고하였다. 동 24일에 미즈하라 지대가 도착하였다. 동 25일에 기시다 정찰 척후대가 귀착하였다. 인천 이토 사령관으로부터 동로(東路)에 있는 동학당토벌대에 경성수비대 1중대를 증가시켰다는 전보를 받았다. 서로(西路)로 나누어 진격하는 중대장 대위 모리오 마사카즈가 공주성(公州城)의 위급을 보고하고 와서 구원해 주기를 재삼 요청하였다. 지대(중위 고이토 교이치)를 회덕(懷德)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동 26일에 고이토 지대가 귀착하였다. 지대(소위 미야모토 치크타로)에게 교도중대 1소대를 부속시켜 주안(周安)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본대는 공주 방면으로 전진하기 위하여 동일에 문의현을 출발하여 용포촌(龍浦村)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미야모토 지대는 주안 부근에서 적도와 조우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도가 수만 명이라서 탄약이 부족하여 잠시 문의현으로 물러나 문의현의 위급함을 보고하였다. 따라서 본대는 동 27일에 용포촌을 출발하여 또다시 문의현에 도착하여 사영, 미야모토 지대와 합류하였다. 미즈하라 중위를 지대로 삼아 회덕 방면으로 출발시키고, 모리오 대위에게 적의 상황에 따라 진로를 옥천, 금산(錦山) 방면으로 바꿀 것을 알렸다. 동 28일에 지대(대위 이시쿠로 미쓰마사)에게 교도중대 1소대를 부속시켜 주안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동 30일에 문의현을 출발, 증약역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이시쿠로, 미즈하라 양 지대와 합세하였다. 12월 1일에 지대(중위 시라키 세타로)에게 교도중대 1소대를 부속시켜 옥천, 청산(靑山), 영동(永同), 금산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진남병을 황간(皇澗) 방면에 출발시켰다. 본대는 동일에 증약역을 출발하여 옥천군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시라키 지대는 석성촌(石城村)에서 적도와 조우하여 그들을 격퇴시켰지만, 청산현 부근에 적도가 과다(夥多)하게 집합하여 있다는 보고가 동 2일에 도착하였다. 따라서 응원으로 2분대를 1등 군조 마쓰우라 고고로에게 인솔하게 하여, 급히 가서 시라키 지대와 합류하여 그 지휘를 받게 하였다. 동일에 모리오 대위에게 탄약 및 적도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시라키 지대에 원병의 급행 및 적도 조사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3일에 동로분진중대장 대위 마쓰키 쇼호로부터 경성에서 파견한 중대와 제천현(堤川縣) 부근에서 적도를 포위한 움직임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동 대위에게 보고, 기타 적도 수색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4일에 시라키 지대로부터 연도(沿道)의 적정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동 지대에게 금산군에서 본대와 합류할 것과 수색 방법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5일에 옥천군에서 일왕폐하, 황후폐하로부터 우악(優渥)한 칙어(勅語)와 영사(令詞)를 받아 동 6일에 부하 일동에게 전달하여 성덕이 지극히 큼에 감읍(感泣)하고 삼가 봉답하였다. 마쓰키, 모리오 양대에 우악한 칙어와 영사를 받았으므로 부하 일동에게 삼가 전달하라는 뜻을 통보하였다. 동일에 옥천군을 출발하여 금산군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시라키 지대와 합하여 동 지대로부터 4일에 양산촌(梁山村)에서 적도를 야습하고, 5일에 금산군에서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7일에 모리오 대위에게 노성현(魯城縣), 논산현(論山縣) 부근에서 적도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8일에 시라키 중위에게 교도중대를 인솔하여 다음 날 9일에 고산현(高山縣) 방면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본대는 금산군을 출발하여 진산현(珍山縣)을 경유하여 동 9일에 연산현(連山縣)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현감에게 인부를 고용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인민이 피난하여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현감이 인민을 진무하는데 좋지 않을 것이라고 설유하였다. 동 10일에 연산현을 출발하여 노성현으로 향하여 전진하려고 할 때, 적도가 갑자기 사방의 산 위에서 나타나 습격하여 위급하였다. 이에 공격 부서를 이루어 수 시간에 결쳐 응전하여 그들을 격퇴하였다. 모리오 대위에게 본대가 전투하게 되면 적도를 포위할 것에 관하여 명하였다. 동일에 연산현에서 급보에 대비하며 사영하였다. 동 11일에 출발하여, 도중에 모리오 대위로부터 적도가 퇴주하여 논산 부근에 집합하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동일에 노성현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동 12일에 노성현을 출발하여 은진현(恩津縣)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동 13일에 시라키 지대에게 적정보고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근래에 인천 이토 사령관 및 경성 공사관에게 근황을 보고하였으나 중도에서 도달하지 못하였다. 모리오 대위 및 공주성 선발의 통위영병, 장위영병, 경리영병 각 대대장에게 적도를 포위하여 공격하기 위하여 은진현에 급히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14일 지대(소위 아카마쓰 고쿠호) 및 장위병영과 경리병영, 양 대대가 도착하였다. 한병 대대장 등에게 이러쿵저러쿵 인부가 부족함으로써 의견이 들끓어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많이 발생하였다. 원래 군인은 독실하게 부하를 통제하고 양민을 더욱 어루만져야 하니, 그중에서 적도라 할지라도 함부로 살해하거나 혹은 인민의 물품을 약탈하는 등의 일은 엄금함으로써, 앞뒤를 잘 주의하는 데에 노력을 기하도록 간곡하게 설유하였다. 동 15일에 미즈하라 중위를 좌측 지대로 삼아 장위영병 1소대를 부속시켜 연산을 경유하여 진산, 금산에서 무주(茂朱) 방면으로 보냈다. 동 16일에 모리오 대위가 도착하였다. 아카마쓰 소위를 우방(右方) 지대로 삼아 자위영병 100명을 부속시켜 논산, 보령(保寧) 방면으로 보냈다. 동 17일에 삼례역(參禮驛)의 적도를 포위, 공격하고 이시쿠로 대위를 지대로 삼아 고산을 경유하여 삼례 방면으로, 장위영병 2소대를 지대로 삼아 용안(龍安), 함열(咸悅)을 경유하여 삼례 방면으로 보냈다. 동 18일에 본대는 은진현을 출발하여 삼례역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이시쿠로 지대 및 시라키 지대의 장위 지대와 합류하였다. 동 20일에 삼례역을 출발하여 전주(全州)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지대(특무군조 스즈키 마사키치)를 금구현(金溝縣) 방면으로 보냈다. 동 21일에 장위영병 1소대를 미즈하라 중위의 지휘에 부속시키기 위해 무주 방면에 파견하였다. 동 22일에 통위영병이 도착하였다. 통위영병 대대장 이규태(李圭泰)에게 군인의 정심론(精心論)을 설명하고 전주감수(全州監守)에게 인민을 진무하는 방법을 설유하였다. 동 23일에 아카마쓰 지대가 귀착하였다. 동 24일에 마쓰키 대위로부터 칙어 배청(拜聽) 및 인천 이토 사령관의 명령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미즈하라 지대로부터 인민의 탄원, 일본병 잔류 건에 대한 보고를 듣고, 동 지대에게 적도 집합지 및 본대의 진로 및 일본병 잔류 건의 허가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마쓰키 대위에게 적도 집합지 및 적도 포위 공격 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모리오 대위에게 통영병 2소대를 부속시켜 장성부(長城府) 부근으로 출발시켰다. 동 25일에 아카마쓰 소위를 지대로 삼아 장위영병 1소대를 부속시켜 신동(新洞) 부근으로 출발시켰다. 경성 공사관으로부터 전보로 명령을 받았다. 동 26일에 전주를 출발하여 만마관(萬馬關), 임실현(任實縣)의 오수역(獒樹驛)을 경유하여, 동 29일에 남원부(南原府)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마쓰키 대위 및 미즈하라 지대와 합류하였다. 운봉현감(雲峯縣監)을 비롯한 남원 관리에게 차제(此際)에 병재를 근심하는 자에 대해서는 충분히 무육하여, 가령 적도라 할지라도 이전의 죄를 후회하고 선량한 백성이 되는 자 등을 생업에 복무시키라는 뜻으로 간곡히 설유하도록 시유하였다. 동 30일에 아카마쓰 지대로부터 전봉준(全琫準) 포박 및 적정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동 지대에게 포로 감수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모리오 대위에게 진로 및 보고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31일에 남원을 출발하여, 마쓰키 대위를 좌측 지대로 삼아 능주(綾州)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본대는 순창현(淳昌縣)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아카마쓰 지대와 합류하여 거괴 전봉준을 인계받아 부상을 치료하였다. 모리오 대위에게 적도 포위 공격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28년 1월 1일에 인천 이토 사령관, 경성 공사관, 조선 정부에게 거괴 전봉준을 포박했다는 전보를 발하였다. 마쓰키, 모리오 양 지대에게 전봉준의 포박, 기타 적정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특무조장 다케우치 신타로를 전주에서 포박한 김화남(金化男)의 인수인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동 2일에 순창현을 출발, 담양부(潭陽府)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장위영병 400명을 좌측 지대로 삼아 순천(順天), 낙안(樂安), 보성(寶城)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모리오 대위에게 본대의 진로 및 포로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마쓰키 대위에게 장위영병을 순천 방면으로 파견한다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동 3일에 담양부를 출발하여 광주(光州)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목사에게 적도의 봉기에 대해, 양민을 괴롭히는 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이므로 간곡히 무애하여 생업에 복무시키는 일에 진력할 것을 누누이 설유하였다. 모리오 지대에 적도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4일에 광주를 출발, 유림촌(柳林村)을 경유하여 동 5일에 나주성(羅州城)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이날 영암(靈巖), 강진(康津), 장흥(長興), 보성, 능주 각지에서 적도가 발호하여 인민을 살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는 장흥부사를 총살했다는 비보가 계속 이르러 그들을 토벌할 부서를 만들었다. 동 6일에 이시쿠로 대위에게 교도중대 1소대를 부속시켜 강진 방면으로, 시라키 중위에게 교도중대 2소대를 부속시켜 장흥 방면으로 출발시켜 적도를 초멸하게 하였다. 마쓰키 지대에게 능주를 출발하여 보성의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위영병 100명을 무안(務安) 방면으로, 통위영병 1대대를 함평(咸平), 무안, 해남(海南) 방면으로 출발시켰다. 함평에 있는 스즈키 특무지대로부터 적정 및 유진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따라서 동 지대에게 해안에 있는 적도 초멸에 착수하고 지대는 잔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7일에 다케우치 특무조장이 귀착하였다. 동 8일에 육군 보병 소위 구스노 나리도시로부터 유앵동(有鶯洞) 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마쓰키 지대에게 시라키 지대의 지정면(支亭面)으로 전진하여 시라키 지대와 연락하여 능주 방면으로 도주하는 적도를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시라키 지대로부터 장양촌(長陽村) 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지대에게 좌측 지대로부터 출발한 구스노 소대와 연락할 것과 장흥에 적도가 있는 것에 대해 명령하였다. 동 9일에 이시쿠로 지대로부터 강진현 병영의 적정 및 영암을 경유하여 강진현에서 장흥으로 전진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시쿠로 지대에게 시라키 지대는 장양촌 부근, 구스노 지대는 유앵동 부근에서 적도를 공격 중이므로 그 지대는 신속하게 움직일 것을 명령하였다. 이날부터 포로 취조를 시작하였다. 인천 이토 사령관으로부터 쓰쿠바함이 부산에 돌아갈 것과 운봉, 순천, 좌수영의 적도에 관한 전보를 받았다. 경성 공사관에게 조선 관리의 사정, 거괴(巨魁) 호송, 거괴 부상 치료의 건을 전보하였다. 인천 이토 사령관에게 쓰쿠바 함장으로부터 적도에 관한 전보 수령 및 장흥, 해남의 남은 적도 초멸을 위해 지대를 파견하여 거괴 등을 포박시킨 내용, 기타 적정 등을 전보하였다. 동 10일에 초토사에게 ‘이번에 적도 때문에 물품, 가재를 약탈당했을 뿐 아니라 혹은 처자를 살해당한 참상은 말할 수 없으므로 무엇보다 민정에 진력하여 불행한 백성을 규휼하고 양민을 어루만져 생업에 종사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설유하였다. 시라키 지대로부터 장흥부에 도착하여 구스노 지대와 함께 장흥에서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들었다. 동 11일에 이시쿠로 지대에게 해남의 적도가 도주하였으니 시라키 지대를 지휘하여 적도를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구스노 지대로부터 장흥에서 시라키 지대와 함께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12일에 이시쿠로 지대로부터 장흥에서 시라키 지대 및 구스노 지대가 합류하여 남면(南面) 부근에서 적도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스즈키 특무지대에게 영광(靈光)에 있는 장위영병과 본대 가운데 2분대를 합하여 태인(泰仁), 고부(古阜) 각지의 잔류 적도를 포박할 것과, 기타 한병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13일에 이시쿠로 지대에게 강진현 병영에서 이시화(李時化)를 포박하여 송부하는 방법 및 급양(給養) 상의 훈령을 내렸다. 마쓰키 지대에게 해남 지방의 잔적을 초멸할 것과 이시쿠로 지대, 시라키 지대, 구스노 지대에게 장흥, 남면의 잔적을 계속 초멸하는 일과 급양 건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통위영병 대대장에게 용당(龍黨)을 경유하여 해남에 이르러 각지로부터 도달하는 모든 지대와 합류하여 적도를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14일에 장위영병 대대장에게 순천, 낙안의 적정 보고 및 탄약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인천 이토 사령관에게 부산(釜山)으로부터 순천으로 출발시킨 1중대와 합류하여 적도를 계속 초멸하고 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동 15일에 시라키 지대로부터 남면 부근에서 전투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시라키 지대에게 해남에 이르러 마쓰키 지대와 합류하여 잔적을 초멸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동 16일에 후비보병 제10연대 제1대대 중대장 육군 보병 대위 스즈키 야스타미에게 6일부터 16일까지의 적정을 통보하였다. 동 18일에 인천 이토 사령관에게 연안의 적도가 진도(珍島), 제주도(濟州島)로 도주하였는데, 쓰쿠바함의 소재가 불분명하니 기선(汽船)을 원조해 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인천 이토 사령관으로부터 적도의 진정이 가까워진 것은 귀관의 지휘가 좋아서 얻은 결과라는 것과 또 청산, 영동의 적정, 전라도 남부의 정령(政令)에 대한 전보를 받았다. 인천 이토 사령관에게 적도의 진정이 가까워 진 것은 귀관의 계획이 적절했던 결과라는 것과 대구에 집합한 기타 적정에 관한 전보를 보냈다. 동 19일에 아카마쓰 지대에게 나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즈키 대위에게 적정을 진정하는 방법을 협의하기 위하여 장교 1명을 나주에 출두시킬 것을 통보하였다. 스즈키 특무지대에게 나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위영병 대대장에게 회령(會寧) 부근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성 공사관에게 한병을 각지에 배치 등 운운한 의견을 전보하였다. 쓰쿠바 함장 해군 대좌 쿠로사키 다테와키에게 연해 진도, 제주도 등의 적도 초멸 방법에 관해 통보하였다. 스즈키 지대에게 우수영 부근의 적도 초멸 명령을 내렸다. 이시쿠로 지대에게 연해 각지를 수색하여 적도를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0일에 우수영 부근에 있는 마쓰키 지대 및 아카마쓰 지대에게 적도를 수색,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1일에 통위영병 대대장에게 포로는 반드시 나주 본부에 송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2일에 이시쿠로 지대에 강진현 병영의 병사를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쓰키 지대에게 진도 부근의 잔적을 재빨리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시라키 지대에게 강진현 병영의 교사 이시화 및 초집사 백낙중(白樂中)의 포박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동 23일에 스즈키 대위로부터 적도 진정에 관한 통보를 받았다. 동 25일에 이시쿠로 지대로부터 병사를 호송시켰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산수비대 대장 육군 보병 소좌 이마바시 도모카쓰에게 스즈키 대위의 연락 및 적도 초멸 방법에 관해 통보하였다. 마쓰키 지대에게 해남 부근의 잔적을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6일에 이시쿠로 지대로부터 강진현 병영의 병사 및 병영 사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동 27일에 이시쿠로 지대에게 병사 취급 및 적도를 수색하여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8일에 마쓰키 지대에게 총위영병을 지휘하여 잔적을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천 이토 사령관 및 경성 공사관에게 적도는 완전히 진정되었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동 29일에 시라키 지대로부터 초집사 백낙중을 포박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30일에 마쓰키 지대에게 나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위영병 대대장 이규태(李圭泰)에게 영암으로 물러나 추후의 명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시쿠로 지대에게 나주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성에 있는 스즈키 대위에게 각지에 파견한 모든 지대를 귀환시키라고 통보하였다. 동 31일에 스즈키 대위로부터 보성부사에게 나주에 출두하라고 통지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1. 동년 2월 2일에 인천의 이토 병참사령관은 전직(轉職), 육군 보병 중좌 이마바시 도모카쓰가 사령관이 되어 동관의 지휘하에 소속되었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에게 전투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진달하였다. 동 3일에 스즈키 대위로부터 적도의 진정 및 불진(拂陣) 지령에 대한 조회를 통보받았다. 따라서 동 대위에게 위에 관한 통보를 하였다. 동 4일에 마쓰키 지대, 아카마쓰 지대, 스즈키 특무지대가 귀착하였다. 동 5일에 이시쿠로 지대, 시라키 지대 및 장위영병대대 등이 귀착하였다. 포로 조사가 끝났다. 동 6일에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으로부터 용산으로의 귀환 및 진로와 적도 진정 방법에 대한 전보를 받았다. 경성 공사관으로부터 한병을 각지에 배치하지 말고 함께 모아 귀환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으로부터 대구 집합의 명령은 취소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미즈하라 중위에게 나주를 출발해 연산에서 제3중대와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카마쓰 소위에게 옥구(沃溝)에 잠복한 아산(牙山) 지나(支那)의 잔병을 포박하기 위해 나주를 출발하여 공주에서 본대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에게, 전라도 서남쪽의 적도는 완전히 진정되어 각 지대가 나주에 집합하여 전봉준, 최경선(崔慶善), 손화중(孫化中), 홍낙관(洪洛寬), 백낙중 등을 호송하는 일에 관한 전보를 보냈다. 동 7일에 미즈하라, 아카마쓰의 양 지대가 출발하였다. 동 8일에 부산 병참사령관 육군 보병 소좌 이즈노 센리에게 당 19대대는 용산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있어 통보하였다. 낙동(洛東) 병참사령관 육군 보병 소좌 아스카이에게 앞과 같이 말해 두었다. 동 9일에 귀환하는데 있어 각 부대의 진로, 부서를 정하여, 제1중대에 장위영병 200명을 부속시켜 동로로, 제3중대에 장위영병 300명을 부속시켜 중로로, 본부 및 제2중대에 교도중대를 부속시켜 양쪽 길로 용산에 집합하라는 명령 및 훈령을 포고하였다. 동 10일에 제1, 제3중대가 나주를 출발하였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 경성 공사관, 히로시마 유수 제5사단 사령부에게 다음 날인 11일에 나주를 출발하여 용산을 향하여 북진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동 11일에 본부 및 제2중대는 나주를 출발하여 북창촌(北倉村)을 경유하여 동 12일에 장성부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마쓰키 대위에게 잠복한 적도를 포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13일에 장성부를 출발하여 정읍현(井邑縣)을 경유하여, 동 14일에 금구현에 사영하였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으로부터 급히 귀환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동 15일에 금구현을 출발하여 전주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이시쿠로 대위에게 대둔산(大屯山)의 적도를 초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16일에 조선 국왕 폐하로부터 칙사를 통하여 위로의 칙어 및 물품을 받았다. 남부 병참감 육군 소장 후쿠하라 도요노리로부터 남부 병참감부를 대련만(大蓮灣)으로 이전하는데 있어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이 당분간 사무를 취급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동 17일에 전주를 출발하여 여산현(礪山縣)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동 18일에 미즈하라 지대에게 제3중대의 진로, 대둔산의 적도 초멸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마쓰키, 이시쿠로 양 대위에게 조선 국왕폐하가 칙사를 통하여 칙어 및 물품을 하사받은 내용을 전하였다. 당 현과 같은 곳은 병란이 일어나자마자 인민이 도주하여 아직 귀가하지 않아 인부가 크게 부족하였다. 동 19일에 여산현을 출발하여 노성현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이시쿠로 대위로부터 미즈하라 중위와 연산에서 합류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20일에 노성현을 출발하여 공주에 도착하여 사영하였다. 아카마쓰 지대와 합류였다. 동 21일에 이시쿠로 대위로부터 대둔산의 적도를 초멸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동 22일에 공주를 출발하여 유구촌에 도착해 사영하였다. 동 23일에 이시쿠로 대위에게 지나 잔병의 포박 방법 및 용산에 도착할 예정일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 24일에 유구촌(維鳩村)을 출발하여 온양현(溫陽縣)에 도착해 사영하였다. 동 25일에 온양현을 출발하여 평택현(平澤縣)에 도착해 사영하였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 및 경성 공사관으로부터 귀관은 본대에 앞서 용산에 귀착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동 26일에 평택현을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를 경유하여 동 27일에 용산에 도착하였다. 동 28일에 각 부대가 용산에 집합하였다. 조선 국왕폐하로부터 칙사를 통하여 위로의 칙어를 받았다. 인천 이마바시 사령관 및 대련만 병참감에게 각 부대가 용산에 집합하였고, 조선 국왕으로부터 칙사를 통하여 칙어를 받았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3월 1일부터 용산 병참수비대가 되었다. 동 3일에 한성에서 국왕폐하를 알현하여 동학당을 토벌한 상태를 진상하여 술과 안주를 받았다. 동일에 이노우에 공사로부터 폐하에게 진상한 동학당 토멸 중의 지방제도 및 인민의 정황에 관한 구화(口話)를 필기로 작성하여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아 4월 9일 진달하였다.
    1. 동 3월 4일에 인천 병참사령부가 이제부터 인천 병참감부로 개칭함에 따라 이마바시 사령관은 전직(轉職)하고, 육군 보병 대좌 다카이 다카요시가 병참감이 되었다. 동관의 지휘하에 소속되었다. 동 24일에 하명에 따라 인천 병참감부에 출두하여 용산 병참사령관을 겸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동 5월 15일에 후비보병 독립 제19대대 대대장에서 면직되어 남부 병참사령관에 보임되었다. 동일에 개성 병참사령관을 명받아 동 20일에 배명하였다. 동 25일에 용산을 출발하여 동 27일에 개성 병참사령부에 도착하여 사령관의 직무에 복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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