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감사 신헌구(申獻求)가 원본을 베껴서 보고합니다. 이번에 지평현감(砥平縣監) 안욱상(安昱相)의 보고를 받아 보니, “동도(東徒) 수백 명이 홍천(洪川)의 팔봉(八峯)과 필곡(筆谷) 등에 접(接)을 설치하여, 겁략하고 잔학을 저지르는 폐해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지평현의 관포군(官砲軍) 20명과 사포수(私砲手) 300여 명 모두에게 그들을 막아서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상동면(上東面)에 사는 전 감역(前 監役) 맹영재(孟英在)를 부약장(副約長)으로 삼고 방편을 세워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9월 12일에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으로 이루어진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천에 도달하여 변복(變服)하고 유인하였습니다. 먼저 그들 무리인 김철원(金鐵原) 등 10명을 사로잡았는데, 7명은 타일러서 풀어주었고, 김철원 등 3명은 오히려 향도(嚮導)로 삼아 곧바로 팔봉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고석주(高錫柱)・이희일(李熙一)・신창희(申昌喜) 3명을 사로잡아서, 고석주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이와 신 두 놈은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또 총이나 돌을 맞아 죽은 자가 5명입니다. 나머지 무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들이 버린 창(鎗) 58자루는 군고(軍庫)에 수납하였습니다. 이들 비류(匪類)들이 창궐하는 시기에 방어하는 것을 배로 늘려 단속하였고, 포군(砲軍)이 사용할 군량과 반찬을 약환(藥丸)과 함께 별도로 조치하여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군량과 반찬은 경기감영에서 차례로 도와주고, 약환은 지평현의 것을 사용하되, 방략을 마련하여 토벌하여 쓸어 없애도록 엄하게 명하였습니다.
맹영재가 의로움을 따라서 그들을 찔러 죽이거나 생포한 일과 포군들이 충성을 다하여 어려운 일임에도 나아간 것에 대해서는 마땅히 포상하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묘당이 임금께 아뢰어야 할 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題) :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