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에서 임금께 아뢰기를, “지금 충청 감사 박제순의 등보를 보니, 병사(兵使) 이장회(李長會)의 보고를 낱낱이 열거하면서 ‘이달 24일에 비류 수만 명이 성 아래를 침범하였는데, 병사(兵使)가 직접 막아 싸워서 적도 수십 명을 죽이자 적이 비로소 물러나서 흩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의 비도들은 서로 연락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감영과 병영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방금 상당(上黨, 청주에 있는 산성)에서 병기를 잃었다는 급보를 들었는데 이번 보고가 뒤이어 올라왔습니다. 호서(湖西)의 감사와 병사가 평소에 대비하지 못하였으니 극히 소홀히 한 것입니다. 순무영에서 빨리 병사들을 징발하여 구원하러 가는 방도를 마련하여, 이 비도들을 빠른 시일 내에 소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 당일에 비답을 받았다.(『계초존안』의 1894년 9월 28일 기록과 동일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