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합니다. 부사가 9월 20일에 서울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출발하여 당일에 과천에서 머물러 묵었으며, 21일에는 용인(龍仁)에 머물러 묵기 위해 군대를 주둔하게 한 후, 용인현의 장교 최재철(崔在哲)의 보고를 받았는데, 그 내용에 “용인현 직동(直洞)・금량동(金良洞) 2개 동(洞)에 동학 접주가 있어서 행패를 부려 시끄럽습니다”라고 하여, 그날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에 그대로 출발하여, 장교인 최재철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으며, 직동에 도착하여 접주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여 잡으려 하였는데, 소위 접주 이관업(李觀業)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갔으며, 그들 무리인 이용익(李用益) 등 15놈을 잡았습니다. 이어서 금량동으로 향하여, 이삼준(李三俊) 등 5놈을 잡아서 앞으로 나아갔으며, 양지읍(陽智邑)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밝았습니다.
죄인들에게 그들의 행적을 일일이 캐어물었는데, 죄인 이용익은 본래 용인 갈천(葛川)에 사는 자인데, 그의 조카인 이종관(李鍾觀)과 함께 동학에 속아 미혹되었으며 사람을 해치는 것을 돕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에게서 획득한 장물(臟物)은 염주 1건과 축문(祝文) 1도(度)입니다. 정용전(鄭龍全)은 서울에서 옮겨와서 직동에 살고 있으며, 호남접(湖南接)에 들어간 것이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주영(李周英)은 본래 직동에 살았으며, 스스로 동학에 들어가 심하게 미혹되어 계문(戒文)을 깊게 감추고 있었습니다. 이삼준(李三俊)은 본래 금량동에 살고 있었으며, 동학에 속아서 미혹된 것이 여러 해가 되었고 골수에까지 침입할 정도입니다.
앞서 언급한 4놈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이미 드러났으니, 어찌 법을 벗어날 수 있겠으며, 범한 죄를 스스로 인정하였으니 어찌 한 가닥의 생명이라 해도 아깝겠습니까? 아울러 양지현의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큰 거리에서 처결하였습니다. 그 외의 16명은 모두 촌민으로 억지로 따랐기 때문에 모두 엄히 신칙하여 풀어주었습니다.
제(題) : 어찌 모두 목을 베어 매달아 경계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