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경리청대관 2원(員)・군관 1원・병정 54명・일본군 25명・통사(通詞) 2명이 9월 30일 본영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으며, 10월 1일 충주로 출발하였음.
一. 경리청 병정 150명・일본군 57명이 9월 25일 아산에 도착하여 머물러 묵었으며, 9월 26일 신창・홍주 등지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 중에 일본군 42명은 10월 3일 공주에 먼저 도착하였음.
一. 충주 단월(丹月) 등지에 모인 동도(東徒) 무리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9월 23일 선무사[鄭敬源]가 동도들에게 효유하기 위하여 충주에서 출발하여 청풍(淸風)으로 가는 길에 동도들에게 붙잡혀서 나아갈 수 없었다고 하며, 충주의 단월 등지에서 평민들이 동도들과 서로 싸울 때에 충주의 병참소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이 이러한 일의 기미를 듣고 4, 5인이 통사와 함께 곧바로 단월리에 가서 동도의 접주인 임국보(林局甫) 및 그의 무리인 박경천(朴敬天)・엄가(嚴哥)・류가(柳哥) 등 모두 4인을 잡아서 단단히 묶고 와서 병참소에 가두었음. 9월 27일 밤에 이르러 일본인이 임국보를 데리고 곧바로 충주 덕산면(德山面) 성내의 동도들이 접을 설치한 곳으로 들어가, 동트기 전 이른 새벽에 일제히 돌입하여 30여 명을 총을 쏘아 죽이고, 접사(接舍)와 인근에 있는 집 10호 및 군기를 그대로 불로 태웠으며, 4인을 사로잡아 병참소로 되돌아 왔다고 함. 그래서 따로 감찰하는 자를 보내서 정탐하였더니, 접주인 성두한(成斗漢)은 이미 자리에 없었고, 그의 3촌과 4촌인 성운한(成雲漢)・전원여(全元汝)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박가(朴哥) 등 모두 4인이 총에 맞아 죽었으며, 한바탕 적을 죽이니 아직 날이 밝기 전이어서 불에 탄 집 안에 총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단월성 2곳에서 잡아온 8인은 일본인 병참소에서 경사(京司)로 압송하여 넘겨주었다고 하며, 지금 충주목사 겸임 음성현감이 보고함.
一. 10월 3일 은진의 하리(下吏)인 이덕윤(李德允)이 와서 보고한 내용에, 10월 2일 밤 호남의 동도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돌입하여 관사(官舍)를 부수고, 은진현감 및 공형(공형)을 결박하여 호남으로 데려갔다고 함.
一. 상당산성(上黨山城)과 제천・단양・청안(淸安)・영동(永同)・천안・회인(懷仁)・진천・목천・직산(稷山) 등 이상 여러 고을에서 군기를 빼앗김.
一. 서천포(舒川浦)의 군기를 호남의 동도에게 빼앗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