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리청 소속에서 교체된 부영관 성하영이 첩보합니다. 영관과 계원영관(繼援領官) 구상조가 군사를 이끌고 청주로 급히 가던 차에, 10월 5일 진천에 도착한 연유는 이미 첩보하였습니다. 10월 7일 출발할 때에 이미 도착한 안성군수 홍운섭에게 도착한 순무사의 전령 내용에, “‘이번 비류(匪類)들이 안성에서부터 충주・진천 광혜원(廣惠院) 등지에 널리 퍼져 있어서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미 소모관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전령을 내려 앞으로 나아가 무찌르도록 하였으니, 서로 공문을 보내어 서로 날을 기약하여 진을 합쳐서 변화하여, 때에 따라 적을 물리치고 사로잡을 것이다. 상황을 먼저 빨리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안성군수의 공이(公移)를 보니, 지금 여기에 순무영에서 내린 전령[令旨]이 있습니다. ‘소모관 맹영재가 오기를 기다린 후, 마땅히 진천 주진소(駐陳所)에 군무와 관련된 임무를 교체하고, 절대 병정을 이끌고 나아가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주둔하는 사이에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사정이 실로 걱정이며, 영관은 지금 이미 체직된 것이어서 또한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우니, 부득이 그대로 머물게 하고, 사방으로 쫒아서 탐지하니 근처에 있는 비류(匪類)들이 모두 도피하였으며, 우두머리(巨魁)들의 몇몇 집을 수색하였더니, 남은 군물(軍物) 중에 안성군수가 잃어버린 화살 1부・활 1장(張)・철질려(鐵 [竹*疾] 䉫) 2두(斗)・새로 만든 화살 8부 50개・철창(鐵槍) 1자루・철촉롱(鐵燭籠) 4개 및 민간에서 탈취한 백미(白米) 7석・정조(正租) 19석과 약간의 솥[釜鼎] 종류 모두를 거두어 들였으며, 기록하여 안성현에 맡겨두었습니다.
이번 10월 8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무렵에 도착한 호서부원수(湖西副元帥)의 전령 내용에, “행군의 거동이 얼마나 어렵기에 진천에 도착하여 이틀을 머물러 묵고 있으니, 어떠한 이유가 있는가. 만일 부서져 힘이 없는 읍에서 중요한 군대를 대접하는 것이 하루일지라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어느 겨를에 이틀을 대접할 수 있겠는가. 읍의 형세와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만일 명확하지 않으면서 의심을 지니고 나아가지 않아서 군심이 태만하여 크게 기세를 잃었다면, 그 죄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하여 마땅히 군대의 규율을 사용하기 위하여 지금 장차 빨리 임금께 아뢰려 하며, 당일 내에 매우 빨리 이르러 병사를 바칠 것”이라 하였으니, 비록 오로지 이 전령의 내용(令旨)으로 진퇴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미 지난 날 청주로 빨리 나아가라는 영지(令旨)가 있었는데, 지금 또 청주 병영에서 나아갈 것을 독촉하는 전령이 있어 형세상 주둔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10월 9일 병정을 이끌고 청주로 갔습니다.
제(題) : 공문이 이르렀다(到付). 소모관 맹영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으니, 반드시 다시 기다릴 필요는 없고, 새로운 영관으로 교체하기 전까지는 이전과 같이 시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