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부사 이두황이 첩보할 일은, “10월 14일에 본진(本陣)이 바로 보은(報恩) 장내리(帳內里)에 들어가서 동도(東徒) 근거지를 불태우고 보은에 돌아와서 머문 연유는 전에 급히 보고하였습니다. 동도가 청산(靑山)과 영동(永同)에 모여 있기 때문에 16일 그 곳으로 가는 길에 회인(懷仁)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유시(酉時, 오전 7시∼9시)쯤 청주 병영에서 보낸 전령에, ‘지금 남적(南賊, 호남 동학농민군)이 노성(魯城)과 논산(論山)에 진을 치고 있고, 순영(巡營)의 전령이 계속 오기에 임금께 청했으니 급히 군대를 돌려 하루가 가기 전에 가서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술시(戌時, 오후7시∼9시)에 받은 감영의 관문(關文, 공문)에 ‘호남 비류(匪類)가 무리를 이끌고, 본 감영을 침범하러 와서 사태가 매우 급박하니 귀영(貴營)의 군사를 보내도록 지금 임금께 문서로 보고하였다. 지체해서 제때에 오지 못해 탄식이 있게 된다면 군율로 처리할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17일에 회인에서 떠나 공주 부강점(芙江店)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날 밤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에 받은 감영의 관문(關文)에, ‘군사를 본영에 뽑아 보내도록 벌써 2차례나 임금께 아뢰고, 도순무영(都巡撫營)에 보고했으니 반드시 윤허를 받을 것이다. 관문을 받고나서 바로 갑절로 길을 재촉하여 행군해서 감영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18일에 부강(芙江)에서 떠나 연기(燕岐)에 도착했는데, 공주와의 거리가 40리가 되었습니다. 형편을 살피려고 충청감영에 보고를 하고나서 바로 주둔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제내에, “보고를 잘 받았는데, 청주 병영 전령이 무슨 사태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